영화<범죄소년>에서 17살에 낳은 아이를 버린 엄마 효승 역의 배우 이정현이 1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범죄소년>에서 17살에 낳은 아이를 버린 엄마 효승 역의 배우 이정현이 15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이제 갓 배우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17세 소녀는 카메라 앞에서 알몸을 보여야 했다. 3000대 1의 오디션이 대수롭지 않았을 패기와 재능이 있었지만 어린 소녀에게 해당 연기는 큰 부담이었던 건 분명했다.

영화 <꽃잎>(1996)이었다. 장선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지휘했던 그 영화는 광주 5·18 항쟁을 다룬 최초의 상업영화가 됐다. 물론 그 전에 배우 이경영이 출연한 <부활의 노래>(1990)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검열로 인해 30분가량이 잘려나간 채 상영된 불완전한 버전이었다.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영화 <26년> 때문이었다. 영화 <범죄소년>으로 인터뷰를 했지만 이정현은 <26년>에 대한 질문에 흔쾌히 응했다. 광주의 기억을 공유하고 자신 역시 그 소재가 특별하단 이유였을 것이다.

"광주 항쟁을 다룬 영화가 다양하게 나오는 건 좋다고 봐요. <범죄소년>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지만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어린 분들은 5·18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범죄소년>의 서영주, <꽃잎>의 이정현 그리고 <26년>

묘한 인연은 영화에 대한 소재뿐만이 아니었다. 영화 <범죄소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서영주의 극중 나이가 17세였던 것. 어린 나이에 소년원을 전전긍긍하고, 원치 않은 임신을 경험해야 했던 소년이 16년 전 멍한 표정으로 시대의 아픔을 견뎌야 했던 한 소녀와 오버랩 됐다.

암울했던 청소년 시절, 그리고 5·18은 이렇게 하나의 끈처럼 연결돼 있었다. 이정현은 "감회가 정말 새롭다. 지금의 <26년>은 <꽃잎>보다 터치도 가볍고 많은 사람들이 볼만한 영화"라고 촌평하며 당시의 기억을 꺼냈다.

"<꽃잎>에 출연했을 때 전 정말 아기였을 때잖아요.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 장선우 감독님이 5·18과 관련한 비공개 장면을 제게 다 보여주셨어요.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맞는 장면, 시체들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장면들까지도요,

너무 혼란스럽고 무서웠죠. '이걸 어떻게 영화로 표현하지' 혼자 고민을 했고 첫 촬영이 다가왔는데 너무 겁이 나는 거예요. 결국 그땐 아무 것도 못했어요. 감독님이 제게 '네가 연기자야?'이러시면서 화를 내셨죠."

노련한 감독은 어린 배우에게 현장에 대한 일종의 긴장감을 심어주고자 화도 내고, 몰아붙이기도 했을 테지만 분명 어린 배우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연이라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우리의 끔찍한 현대사를 표현한다는 자체가 이정현에겐 큰 난관이었던 셈이다.

떨리고 무서웠던 기억, 이제는 응원할 수 있다

<꽃잎>의 첫 촬영이 지나가고 이정현은 숙소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단다. 지방 촬영장 근처에 자리한 모텔에서 이정현은 혼자 울면서 고민했던 기억을 전했다.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이런 생각뿐이었어요. 결국 미친 소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촬영장에 내려와선 늘 허름하고 헤진 옷을 입고 다녔어요. 촬영이 끝나도 그 옷만 입었죠. 그렇게 다니니까 시골 마을 사람들은 정말 제가 정신이 나간 줄 아시기도 했어요.

어떤 할머니는 절 데리고 가서 씻겨 주시기도 했고, 읍내를 걸으면 음식을 주는 분도 있었어요. 그때 절 둘러싼 사람들은 다 몰카로 찍은 거예요. 제 모습에 자연스럽게 그 분들이 반응하시는 모습을 담은 거죠."

첫 촬영에서 울었던 이정현은 결국 영화의 완성본을 보면서도 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당시의 촬영은 어린 배우가 소화하기엔 너무도 벅찼던 경험이 아니었을까.

이제 어엿한 성인배우가 된 이정현이었다. 제법 후배들도 있고,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웃으면서 이정현은 "<26년>을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범죄소년>과 함께 영화 <26년>을 챙긴 관객이라면, 그 이전에 <꽃잎>에 대한 기억이 있는 관객이라면 다시 한 번 이정현을 곱씹어 보자. 시간과 경험이 만들어 낸 그녀만의 독특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소식이 있다. 내년엔 배우 이정현의 모습을 보다 많은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26년>의 배우 진구와 함께 등장한다. 김한민 감독의 신작 <명량>에서 또 다른 매력을 찾을 수 있겠다.



이정현 26년 진구 광주항쟁 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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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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