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명이라는 관객 수에 있어선 눈부신 한해였습니다. 하지만 올해 영화계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희소식을 정리해 봤습니다. <편집자 말>

희소식 하나 - 여성 감독의 약진 

올해 영화계 최대 희소식은 여성 감독들의 약진이다. 시작은 변영주 감독이 열었다. 여성 성노동자를 다룬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으로 데뷔한 변 감독은 <낮은 목소리> <낮은 목소리2> 에 이어 충무로 메이저 영화계에 들어와 <밀애> <발레 교습소>로 새로운 작가세계를 일궜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했었다.

하지만 올해 개봉한 <화차>는 전국 240만 관객을 동원하며 변 감독을 주목할 만한 상업영화 감독으로 보게끔 했다. 차기작 <조명가게>도 강풀 원작 만화를 영화화 한다고 해서 이미 영화계 내에 기대감이 형성되어 있다. 

 7일 오전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화차>제작발표회에서 변영주 감독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영화 <화차>는 7년 만에 복귀한 변영주 감독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최초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변영주 감독 ⓒ 이정민


상업 영화계에서 변영주 감독과 함께 우뚝 선 여성 연출자로 방은진 감독이 있다. 한때 배우로 활약했던 방 감독은 <오로라 공주>의 각본과 연출을 맡으며 충무로에 데뷔했고, 자신만의 색깔을 전한바 있다. 올해 여러 대작들의 틈바구니에서 개봉한 류승범-이요원 주연의 <용의자X>는 원작 팬들의 반발에도 불구 진정성 있는 멜로로 알려져 전국 관객 150만 명을 들였다.

상업 영화계에서 두 여성감독이 활약했다면 독립 영화계에서는 정재은 감독과 김희정 감독의 약진이 돋보였다. <고양이를 부탁해>로 장편 데뷔해 화제를 낳았던 정재은 감독은 오랜 공백 끝에 한 건축가의 삶과 죽음을 그린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로 4만여 명의 관객을 들이며 독립 영화로서 소위 '대박'을 쳤다.

상업 영화계에 화려하게 데뷔한 감독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과 소통했다는 점에서 정 감독의 <말하는 건축가>는 의미가 있다. 또한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으로 여성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은 김희정 감독은 전작 <열세 살, 수아>에 이어 두 번째 작품도 완성도 있고 재미도 있는 장편을 내놓음으로써 평단과 관객에게 믿음을 주었다. 한편 올 상반기 최고 화제 다큐인 <두 개의 문>을 연출한 김일란-홍지유 감독도 진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다.

 영화<남영동1985>의 정지영 감독이 7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며 미소짓고 있다.

정지영 감독 ⓒ 이정민


희소식 둘 - 기성 감독의 건재

얼마 전 제33회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정지영 감독은 올해 한국 영화계가 가장 반가워할 인물 중 하나다. 자본과 권력의 간섭으로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감독들의 능력이 필요한 영화계에서 정 감독처럼 역량 있는 기성감독의 존재감은 지탱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998년 <까>를 연출한 후 한동안 상업 영화 개봉 소식이 없었던 정 감독은 올해만 <부러진 화살> <남영동1985> 두 편의 연출작과 각본을 맡은 다큐멘터리 <영화판>을 내놓으며 멋지게 귀환했다.  

그뿐 아니다. <번지 점프를 하다> <혈의 누>의 김대승 감독도 전작에 이은 사극 <후궁 : 제왕의 첩>으로 관객들에게 건재함을 알렸다. 비록 선정성 논란이 작품의 본질을 흐린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궁궐 안의 권력 구도에 대한 주제 있는 시각을 담은 작품이라는 점이 관객에게 받아들여졌다.

<은교>의 정지우 감독도 기성 감독의 능력을 발휘해주었다. <해피 엔드>로 주목을 받으며 데뷔해 <사랑니> <모던 보이>로 자기 스타일을 알려가던 정 감독은 깊이 있는 멜로드라마 <은교>로 매너리즘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객과 평단 모두 <은교>에서 느껴지는 '노화'라는 의미에 주목하며 감동한 바 있다. 한편 김기덕 감독은 각고 끝에 내놓은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해 충무로를 더욱 빛냈다.

 영화 <두개의 문> 중에서.

영화 <두개의 문> ⓒ 시네마달


희소식 셋 - 작은 영화 관객의 존재감

올해 예술영화, 혹은 다양성영화로 불리는 이른바 (스크린 수) 작은 영화들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뜨거웠다. <우리도 사랑일까> <서칭 포 슈가맨> <케빈에 대하여> <두 개의 문> <MB의 추억> 등 수많은 작품들이 열악한 배급과 상영 환경 속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1만에서 많게는 7만 여명의 관객들을 만났으며, 대체로 좋은 평가를 얻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국내에 스크린 수와 별개로, 작품이 좋으면 극장을 찾는 적극적인 관객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올해 한국 영화계의 큰 수확이다. 이른바 마니아로 불리는 이런 관객들이야말로 유행 따라 극장을 찾는 관객들에 비해 장기적으로 영화계의 큰 손님이 될 수 있다.

최근 일부 극장에서 진행 중인 '씨네큐브페스티벌'과 '서울독립영화제'에 가보면 관객들의 열기는 참으로 뜨겁다. 다른 영화,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열정은 한국 영화계의 성질과도 일맥상통한다.

늘 새로운 걸 즐길 줄 아는 한국 관객들의 영화사랑은 이미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알려져 있어, 해마다 내한하는 외국 영화인들이 늘어나고, 한국에서 세계 최초 개봉을 하며, 한국 영화를 하나의 영화 장르로서 분류해 좋아하는 외국인들이 존재한다. 이런 열정이 올해 여러 작은 영화들을 살려냈고, 영화계에 적지 않은 감동을 안겼다.

희소식 넷 - 괜찮은 신인 감독의 등장

조성희. 아직 이 세 글자만보다는 <늑대소년>의 감독이 익숙할 것이다. 전통적 비수기라는 10월말에 개봉해 12월 현재까지 650만 관객을 들인 이 대단한 판타지 멜로 영화는 메이저 시장 데뷔 전부터 영화인들 사이에서 각광 받아온 조성희 감독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처럼 한국 영화계에는, 특히 독립 영화계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다. 충무로는 <늑대소년>의 성공으로 더욱 바빠지게 생겼다. 좋은 기획과 숨어있던 능력자 감독의 좋은 영화가 만나, 든든한 배급과 상영력까지 갖춰지면 수백만 관객이 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어서다. CJ측에서는 이미 오는 6일 개봉 예정인 <나의 PS 파트너>의 변성현 감독을 발굴해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늑대소년>의 조성희 감독이 9일 오후 서울 누하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며 촬영 뒷이야기를 전해주며 웃고 있다.

조성희 감독 ⓒ 이정민


조성희와 변성현. 두 신인 감독을 통해 한국 영화계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일단 더 많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충무로에 장편으로 데뷔를 해줘야 하는 것이다. 기성 감독들 중에 좋은 신작을 내놓는 이도 있지만, 올해만 해도 여러 기성 감독들이 전작만 못한 신작으로 혹평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뛰어난 감독들은 할리우드에 진출하거나, 제작이나 TV드라마, 후진 양성 등 영화연출이 아닌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될 성싶은 신인 감독들을 발굴하는 건 단순한 틈새시장 개척이 아니라 한국 영화계의 미래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다행히 올해 명필름은 몇 년 뒤 영화학교를 열어 숨은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키워낼 것임을 밝힌바 있고, CJ문화재단의 Project S는 계속해서 신인 감독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움직임이 있어 한국 영화의 미래는 어둡지만은 않다.

희소식 다섯 - 극장 영화 관객 증가

뭐니 뭐니 해도, <도둑들> <광해> 등 올해 천만 관객 영화가 두 편이나 나온 건 한국 영화계에 희소식이었다. '천만 영화'를 포함해 8편의 한국 영화가 수백만의 관객을 들였다. 올해 연기 잠재력이 터진 배우들이 많은데, 이건 관객들의 관람 잠재력이 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관객들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주로 음성적 다운로드와 안방극장을 통해 영화를 접하던 관객들이 하나둘씩 극장을 찾았고, 이는 올해 한국 영화 관객 수 1억 명 돌파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만큼 한국 영화를 포함해서 국내에 개봉되는 영화가 많은 관객들이 좋아하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관객 수나 스크린 수의 양극화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지만, 어쨌든 극장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건 그만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고, 이는 향후 한국 영화계가 어떻게 이어져 가느냐에 따라 소비 시장으로서의 제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 해주는 것이다. 어느 시장이든 수요가 받쳐주어야 존립과 발전을 꿈꿀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영화를 극장에서 봐준 관객들을 위해서라도, 충무로는 보다 다양한 작품을 완성도 있게 내놓을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작시 작가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촬영과 후반작업에 있어서 스태프들의 처우를 개선하며, 배급과 상영 그리고 마케팅에 있어서 정도를 지켜야 한다.

올해 한국 영화계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런 분위기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되려면 과연 관객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영화란 어떤 것일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관객과 소통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한국영화 변영주 정지영 조성희 변성현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