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외대학보>가 자체 발간한 신문의 표지다. '학생회 선거 보도를 하지 말라'는 총장의 지시사항에 한국외국어대 학보사인 <외대학보> 기자들은 지면을 포기하고 자비를 털어 신문을 냈다.
▲ <외대학보> 자체 발간 신문 <외대학보>가 자체 발간한 신문의 표지다. '학생회 선거 보도를 하지 말라'는 총장의 지시사항에 한국외국어대 학보사인 <외대학보> 기자들은 지면을 포기하고 자비를 털어 신문을 냈다.
ⓒ 외대학보

관련사진보기


페이스북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 게시 하루 만에 '좋아요' 3313개가 붙고 공유 713건으로 화제가 되었다. "선거관련 기사를 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신문을 냈다"는 제목의 책자. 그 아래엔 한국외국어대 학보사인 <외대학보> 기자 14명 전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대학과 학보사 기자 간 편집권 분쟁은 매해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기사의 '논점'에 대한 제재가 아닌 총학생회 선거 보도를 전면 금지하는 지침을 내린 사례는 사상 초유다. 기자들은 자비를 통해 자체 발간 지면을 마련하고 직접 배포에 나섰다.

학생기자들, 왜 학교에 맞서는가?

학교의 '선거 보도 금지' 명령으로 지면기사가 불발되자 <외대학보> 기자들은 자비를 통해 자체 발간하여 학생들에게 직접 배포했다.
▲ <외대학보> 선거 특집호 학교의 '선거 보도 금지' 명령으로 지면기사가 불발되자 <외대학보> 기자들은 자비를 통해 자체 발간하여 학생들에게 직접 배포했다.
ⓒ 금준경

관련사진보기


3일 서울 이문동에 있는 한국외대 서울캠퍼스를 찾았다. 학보사 문을 열자 수북이 쌓인 유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강유나 편집장(영어, 22)은 통화 중이었다. 언론사의 취재였다. 전화를 마친 강 편집장은 급작스런 요청에도 "환영해요"라는 말로 취재를 허락했다.

"오늘 기자들이 정신없이 캠퍼스 전체를 뛰어다닐 예정이에요"라며 자체 제작한 학보 배포 계획을 전했다. 첫 수업이 시작되는 오전 9시부터 기자들의 발은 바빴다. 학생들의 알 권리를 총족시키기 위해 강의실과 교정 곳곳에서 신문을 배포했다.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묻자 강유나 편집장은 대답 대신 인터넷 창을 띄웠다. 주간교수와 강유나 편집장이 주고 받은 메일들이 보였다.

"사실 편집권 침해 사례는 처음이 아니에요."

모니터 속엔 주간교수가 보낸 '보도지침'이 있었다. 이전에 발행된 954호 지침에는 '총장 사진을 지워라'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몇 건의 메일을 더 열고는 학교가 지속적으로 기사에 대한 보도지침을 하달했고 수정 지시했다고 말했다.

대학의 편집권 침해는 매년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보도 자체를 금지한 일은 이례적이다.
▲ 대학의 학내 언론 탄압 사례 대학의 편집권 침해는 매년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보도 자체를 금지한 일은 이례적이다.
ⓒ 금준경

관련사진보기


또 기사를 쓸 때마다 편집 계획서를 의무적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 학교 측의 입장을 주임교수가 전해주는 형식이다. 더 큰 문제는 사전검열뿐 아니라 사후검열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과거 주간교수가 보낸 메일을 보면 '코멘트를 받았다. 조판소에 전화 걸어 수정요청해라. 1시간 남았으니 급하다'는 글도 있다. 이미 조판소로 넘어간 기사를 수정했는지 묻자 "수정하지 않으면 신문이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전반적 검열과 '선거 보도 금지'를 대학본부에서 지시했냐고 물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총장 및 처장단'일 것이라 답했다. "주간교수가 사전에 '편집 계획서'를 검토했는데 사후검열을 할 리 없어요"라며 메일에는 '코멘트를 받았다', '주문이다' 등 상부 지시를 암시하는 글이 많다고 보충 설명했다.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학교 홍보팀에 문의했으나 "학보의 편집권 및 전반적 운영은 대학 본부에서 알지 못한다. 전적으로 주간교수가 결정하는 것이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에 전종섭 <외대학보> 주간교수는 "사실 예산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에서 총학생회 선거가 단선이니 굳이 발행할 필요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2주 전부터 준비한 선거 특집호 지면 기획안에는 기사 배치와 담당 기자의 이름이 쓰여 있다.
 2주 전부터 준비한 선거 특집호 지면 기획안에는 기사 배치와 담당 기자의 이름이 쓰여 있다.
ⓒ 금준경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강유나 편집장은 이에 반박했다. 예산 문제라면 이메일로 기사를 배포하는 방법의 절충안을 냈다는 것이다. 주간교수도 동의했으나 총장과 주간교수의 면담 직후 입장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번처럼 입장을 번복한 것이나, 그 전부터 있어온 검열에 대해 전종섭 주간교수는 "총장은 신문 발행인이고 처장단은 신문 운영위원회와 마찬가지다. 학보사 운영 규정상 기사에 대한 검토는 문제될 것 없다"고 '윗선'의 개입을 사실상 인정했다.

강유나 편집장은 '총학생회 선거가 특별한 이슈가 아니'라는 전종섭 주간교수의 해명에 대해 "선거 특집호를 매년 발행해왔다"고 반박하며 "총학생회 선거가 단독선거라고 해서 보도하지 말라는 규정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강유나 편집장은 '주간교수가 허락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것에 걱정을 드러냈다.

"주간교수는 우리의 요구를 수렴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학교는 주간교수의 책임으로 꼬리를 자르려 해요."

한편 전종섭 주간교수는 "나는 학생들의 순수함을 믿지만 처장단 일각에서는 학생들의 행동이 정치적 목적이 있지 않냐는 의심도 있다"고 덧붙이며 학교본부의 불편한 시각을 전하기도 했다.

"우리는 전원버튼으로 조종하는 기계가 아니다"

자체 발간 학보엔 단과대 및 총학생회 선거운동본부의 공약과 정책 설명 및 분석이 담겨 있다.
▲ 자체 발간 학보 자체 발간 학보엔 단과대 및 총학생회 선거운동본부의 공약과 정책 설명 및 분석이 담겨 있다.
ⓒ 금준경

관련사진보기


학내 편집권 분쟁에서 학생은 절대 약자다. 지금까지 많은 대학 학보사들이 겪었던 분쟁의 결과가 이 사실을 역력히 드러낸다. 이를 알면서도 학교 지침에 반하는 행동을 한 계기를 물었다. 강유나 편집장은 언론의 역할을 설명했다.

"언론의 역할은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고 학보사의 역할은 학생들의 알 권리 보장이죠. 우리는 우리 역할을 했을 뿐이에요. 후배기자들도 장학금을 반납할 각오를 하고 기꺼이 응해주었어요."

해직이나 징계도 각오하고 있냐는 물음에 "저는 괜찮지만 우리 아이들(후배 기자)에게 피해가 간다면 보도지침의 모든 물증을 공개할 거예요"라고 답했다. 이번 싸움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물었고 그녀는 이렇게 답변했다.

"현재 규정상 총장 승인 후에 학보가 발행 가능해요. 기사를 검열하고 규제하는 것도 가능해요. 우리는 해당 규정 삭제가 최종 목적이예요. 그동안 총장과 처장단은 우리를 기계처럼 생각했어요. 보도 전원을 켜고 끄면 해결될 줄 알아요.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죠. 인간의 힘을 보여줄 거예요."

<외대학보> 강유나 편집장은 기자가 학보사에 머무른 시간 동안 10통이 넘는 언론사 취재 전화를 받았다.
▲ <외대학보> 강유나 편집장 <외대학보> 강유나 편집장은 기자가 학보사에 머무른 시간 동안 10통이 넘는 언론사 취재 전화를 받았다.
ⓒ 금준경

관련사진보기


인터뷰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기자들이 학보사로 돌아와 있었다. 추가 유인물 배포를 위해서였다. 이들에게 각오를 물었다. 임채윤 기자(몽골어, 23)는 "별다른 각오는 없죠. 그냥 당연한 거잖아요? 학보사가 선거 기사를 쓰고 알려야죠"라고 대답했다. 김정원 기자(국제, 19)는 "기자란 직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라는 답을 남겼다.

이은결 기자(터키어, 20)는 "끝까지 열심히 할 것입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홍진아 기자 (정치외교, 20)는 "이번 일을 통해 기자의 소임에 대해 깨닫는 계기가 되었어요. 소임을 다할 거예요"라는 답변을 했다. 양재상 기자(몽골어, 21)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닌 건 아니니까요. 지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할 거예요."

기자들을 따라 나섰다. 강의실과 식당, 복도와 멀티미디어실, 학생회실 등 학교 곳곳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무관심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다. 기자들은 하루 종일을 자체 발간 학보 1000부를 배포했지만 힘든 기색 없이 밝았다.

다시 돌아온 학보사, 강유나 편집장은 또 취재전화를 받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후 얼마나 많은 언론사에서 전화가 왔냐고 물었으나 강유나 편집장은 다 기억하지 못했다.

"음… <경향신문> <뉴시스> <시사IN> <조선일보> <연합뉴스> <민중의소리> 등 열 곳이 넘어요."

강유나 편집장도 많은 언론사를 상대하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임채윤 기자가 멀티미디어실에서 공부 중인 학생들에게 자체 발간 학보에 대해 설명하며 배부하고 있다.
▲ 자체 발간 학보 배부 임채윤 기자가 멀티미디어실에서 공부 중인 학생들에게 자체 발간 학보에 대해 설명하며 배부하고 있다.
ⓒ 금준경

관련사진보기


김정원 기자가 외국인 학생에게 자체 발간 학보를 배부하고 있다.
▲ 자체 발간 학보 배부 김정원 기자가 외국인 학생에게 자체 발간 학보를 배부하고 있다.
ⓒ 금준경

관련사진보기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지난날 중앙대 교지 사건은 해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외로운 싸움은 아닐 것이다. 취재 중 익명으로 과자와 음료수를 보낸 학우를 만났다. 가톨릭대 교지 기자가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다.

외대학보 동문회에서 지원을 위한 회의를 열기도 하고 학내 방송사와 영자신문사에서 자체 신문 발간에 쓰일 A4용지 1400장을 기증하기도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50명이 넘는 타 학교 학보사 기자들이 응원글을 남겼다. 한국외대 커뮤니티에선 학보사를 응원하는 열기가 뜨겁다.

<외대학보> 기자들의 선택은 '원칙'을 향한 열정과 '상식'을 향한 믿음에 기인한다. 취재를 마칠 즈음 <연합뉴스> 보도 댓글이 색깔론 일색이라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렸다. 강유나 편집장은 "우리는 운동권도 아니고 이번 총학도 마찬가지"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원칙과 상식을 말하지만 색깔론으로 되돌아오는 현실이다. 언론에서는 <한겨레>가 그랬고 <시사IN>이 그랬다. 범위를 넓히면 철탑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와 용산이 그랬다.

자체 발간 학보를 배부하고 돌아오는 길에 12학번 새내기인 임채윤 기자가 양재상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 나중이 되더라도 이번 일, 기억에 많이 남겠지?"

<외대학보> 기자들에게 이번 분쟁이 부디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란다.

가톨릭대 학보 박진종 기자(회계, 24)가 음료와 과자를 들고 외대학보사를 격려 차 방문했다.
 가톨릭대 학보 박진종 기자(회계, 24)가 음료와 과자를 들고 외대학보사를 격려 차 방문했다.
ⓒ 금준경

관련사진보기




태그:#한국외대, #외대학보, #언론자유, #대학기자, #학보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