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는 도시의 밤
 그들 뒤로 보이는 도시의 밤

그들 뒤로 보이는 도시의 밤 ⓒ 시네마달


1분, 1시간, 하루, 한 달의 낱낱의 존재들은 누구에게나 짧은 시간이다. 잡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개별의 시간들은 쉬지 않고 흐른다. 11시 59분에서 1분이 지나면 12시가 되고 이내 새날이 된다. 12월 31일에서 하루가 지나면 어김없이 새해가 시작된다.

그렇듯 흐르는 시간은 불현듯 다가오지만 기여코는 어쩔 수 없이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짧디 짧은 시간이건만 원규(원태희)에게 한국에서 주어진 시간은 채 10시간이 되지 않는다. 밤이 되어 찾아와 밤과 멀어져 이별을 고하는 한 줌의 시간들 앞에서 원규는 절규하듯 매달린다. 택시를 타고 도윤(김현성)과의 약속장소에 나타났을 때 택시 뒤로 보이는 도시의 밤은 지치고 외롭다.

그 밤 속을 헤쳐나오는 것처럼 원규는 캐리어와 함게 택시에서 내리고 예전 연인이었던 도윤과 재회하지만 아무말 없이 껌을 씹으며 거리를 함께 걷는다. 그들에게 제법 큰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은 곧이어지는 까페 신에서이다. 그들의 자세한 사연(왜 원규는 독일로 떠났고 도윤은 혼자가 되어 다른 이와 새 삶을 시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구체적인 언급을 삼간다. 대신 테이블에 놓인 도윤이 핀 담배를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원규가 길게 한번 빨았다가 다시 그 담배가 놓였던 자리에 도윤을 위해 조심스레 놓는 장면에서 우린 짐작할 수 있다.

무척 그들의 아픔의 상처가 컸으리라는 것을. 원규는 아무말 없이 도윤의 까페를 떠나는데 그들이 함께 한 담배 연기는 차가운 밤 속을 잘도 헤엄쳐 다닌다. 꺼지지 않는 연기처럼 그들은 도시에서 피어나 아픔을 간직한 채 배회한다.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지만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 속으로 원규의 도윤의 사연이 그려짐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지만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 속으로 원규의 도윤의 사연이 그려짐 ⓒ 시네마 달


사연들이 흐르는 종말의 밤

원규의 사연이 구체적으로 들어나는 것은 태준(이이경)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채팅으로 만난 태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한없이 따라간다. 만나자마자 난데없이 산을 오르는 원규를 태준은 화가 나지만 뒤따라간다. 처음엔 원규와의 만남을 원나잇 정도로만 생각했던 태준이지만 이상하게 그에게 끌리게 되어감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이는 계속해서 비틀어져 꼬여간다.

산 위 화장실에서부터 어긋났던 둘의 감정은 섹스 도중 태준이 원규의 등에 난 상처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자 겉잡을 수 없이 폭발해 버린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태준은 원규에게 이끌려가듯 다시 돌아오거나 멈추어선다. 태준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그가 원규의 등에서 처음본 상처 때문인지 모른다. 영화는 태준이 술집을 나와 원규를 향해 뛰어가는 장면에서 구구절절한 원규의 사연을 봉합해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지지부진하게 보여내지 않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는 더욱 더 세련되게 세공되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그런 이야기들이 쌓여갈 때쯤 둘 모두 외형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데 그 상처들을 어루만져 주는 것은 시간이다. 상처들이 쉽게 치유되기에는 시간이 오래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 수시로 껌을 씹거나 침을 뱉으면서 자신의 아픔을 인고하지만 그들의 불안은 그대로 화면 밖으로 전이된다. 원규의 손이 떨리듯 태준이 발이 떨리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중간, 태준은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의 속마음이기 알 수 없지만 세상 끝에 선 것처럼 느껴지는 태준에게 종말은 오래 묵은 사연들을 잊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원규의 사연들이 사라질 때쯤 다시 그 둘(태준과 원규)의 사연들이 시작되는 종말의 밤은 참으로  구구절절 사연들이 흐른다.

 사연들이 흐르는 밤

사연들이 흐르는 밤 ⓒ 시네마 달


상처가 흐르는 하얀 밤

줄곧 원규를 뒤쫓았던 태준. 그 둘의 상황이 역전되는 것은 라스트 신에 이르러서이다. 둘은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한다.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으려는 원규와 그가 언제라도 한국에 돌아와 주길 바라는 태준. 태준은 원규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단지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섹스 후 산을 내려오는 장면에서 숨김없이 그는 원규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여기서 풀어 헤쳐졌던 지난 원규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과연 그보다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태준의 이야기는 무엇일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 <후회하지 않아>의 수민(이영훈)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태준 역시 사연이 많아 보이지만 우리가 정작 그에 대해서 궁금해 지는 순간은 그때부터이다.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동물원이라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그였기에 더욱. 그럴 즈음, 흰 눈이 내린다.

도시의 밤과 묘하게 어루러지는 하얀 눈은 이내 하얀 밤을 만드는데 그 안에서 둘의 상처는 눈이 흐르는 저만치로 흘러간다. 그 상처가 흐르는 것처럼, 맞다. 밤도 흐른다. 이제는 정말 원규가 태준의 뒤를 쫒는다. 하지만 태준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 와주었던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원규는 택시에 앉아 기다린다. 허나 그는 보이지 않고 몇 분의 시간이 지나면 곧 꺼질듯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만이 그와 함께 한다. 갑작스럽게 대사가 등장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그 노래가 동물원이라도 가보고 싶었던 태준을 향한 노래란 걸 깨달았을 때 묘한 전율이 느껴졌다.

곧이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태준이 뒤돌아 보는 장면이 이어지지만 우린 알 수가 없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개인적으로 짐작해 본데 그가 보고 있던 것은 도시의 밤이 아니었을까? 영화에서 등장하는 도시의 밤의 풍경은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운데, 그것은 창문밖으로 공원 화장실 뒷편으로 이곳저곳으로 내달리는 태준의 오토바이 뒤로 삶의 흔적처럼 붙어 있다. 태준은 다름 아닌 그 무시하게 아름다운 밤의 풍경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밤은 흐른다. 이도 저도 아닌 밤도 있고 이것도 저것도 이유가 되는 밤이 있다. 원규와 태준은 사연이 있는 밤을 걷고 내달리고 오토바이나 차를 타고 달려간다. 정해진 시간이존재했었던 것만큼 원규는 떠날 것이다. 태준은 하루벌어 하루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아침 7시가 되면 퀵 서비스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럼으로 그들에게 세상을 불태워 버리는 종말이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보았다.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던 하얀 밤. 역설적이지만 하얀 밤. 약속이나 한듯 증거처럼 눈이 내린 그 밤을 말이다.

<백야>는 제목처럼 하얀 밤을 이야기한다. 상처가 흐르는 하얀 밤을 시간이 흐르듯 풀어 놓는다. <후회하지 않아>이상의 경지에 올라선 이송희일의 신작은 쉽게 거론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도 아니며 한숨을 잠재우는 다행스런 결말도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향한 따스한 어루만짐이 느쪄진다. 그래서 도시의 밤처럼 꽤나 아름다운 영화이다

 하얀 밤의 역설적인 제목처럼 이상하리만치 아름답게 느껴지는 도시의 밤

하얀 밤의 역설적인 제목처럼 이상하리만치 아름답게 느껴지는 도시의 밤 ⓒ 시네마달



덧붙이는 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송희일 백야 이이경 원태희 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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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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