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용의자 X> 포스터

ⓒ K&엔터테인먼트

최근 개봉한 일련의 한국영화 속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여주인공을 향한 남성캐릭터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그 영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여인을 향해 한결같은 애정을 보이는 남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은진의 <용의자X>, 육상효의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 조성희의 <늑대소년>. 이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1주일 간격으로 개봉했고 감독의 이름만큼 어느 정도의 작품의 질도 인정받았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남자들은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여인들을 끝까지 보호하거나 헌신한다. 오죽하면 <용의자X>의 오리지널 일본 작품이 <용의자X의 헌신>일까?

<용의자X>에 등장하는 수학교사 석고(류승범)는 나름 평범해 보이지만 수학에 관해서는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옆집에 이사온 화선(이요원)에게 매료되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상처들을 말 없이 어루만져 준다.

하지만 그의 희생은 '집착'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자신을 범죄자로 내몰아가면서까지 화선과 그녀의 조카를 지켜내려 하는 모습은 현실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법한 이야기임이 분명하며 쉽게 동의를 이끌어내기도 어려워 보인다.

집착이라 할 만큼 위험한 '수학천재'와 '철가방'의 사랑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 중국집 배달원 대오 역할의 김인권.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 ⓒ 롯데시네마


이렇게 아련한 감정이 아닌 '집착'으로까지 느껴지는 캐릭터는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에서도 이어진다. 강대오(김인권)가 처음 집착하는 것은 무술이다. 그는 무술에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비록 중국집에서 일하지만 계속해서 이소룡 영화를 보며 기술을 갈고 닦는다. 하지만 배달 중이던 대학 기숙사에서 초봄 이른 바람과 함께 예린(유다인)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용의자X>의 석고와 강대오는 연인을 향한 접근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석고가 의도적으로 화선과 관련된 사건에 개입하는 인물이라면 대오는 의도치 않게 예린의 일에 휩싸이게 된다. 처음에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학생운동에 대해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예린을 향한 마음으로 이어지면서 강대오는 자신도 모르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린을 위해서 자신이 대신 감옥에 가는 용기를 발휘한다. 이 장면은 강대오가 바라던 연애의 모습(사랑하는 사람이 버스를 타고 가면 길가에서 떠나는 사람을 보며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혹은 표현받고 싶은)과 대구를 이루어 눈시울을 오랫동안 적신다.

하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면 강대오의 행동 속에서는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의 한 부분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의미 있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이렇게 <용의자X>의 석고나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의 강대오는 지고지순한 마음을 품고 있지만 그들의 사랑은 집착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위험한 것이다.

"기다려!"... 한마디의 약속에 의해 실현되는 영원한 순수함 

 서로의 머리를 어루만져주는 사랑

서로의 머리를 어루만져주는 사랑 ⓒ 영화사 비단길


그리고 이상하게도 난 조성희의 신작 <늑대소년>에서 늑대소년으로 등장하는 철수(송중기)에서도 석고나 강대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들보다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다소 어리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순이(박보영)를 향한 마음은 이 영화에서도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몇몇 대사들로 통해서 작품에 대한 집중도를 끌어올린다. 그 중 "기다려!"라는 대사는 사뭇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철수가 순이를, 순이가 철수를 향한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순이는 처음에는 단지 철수가 밥을 짐승(늑대)처럼 먹는 행위가 자신에게 방해가 되어서 애견 관련 책을 통해 '기다려'라는 용어를 배워서 사용하지만, 둘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 말은 서로를 향한 마음의 표현으로 확장된다.

순이의 '기다려'라는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철수'의 행위가 몇십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이루어지는 것을 관객들이 볼 때, 영원한 순수함의 실체는 한마디의 약속에 의해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관객은 그 장면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이것이야말로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앞선 두 작품 <용의자X> <강철대오>와 이 영화의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늑대소년의 희생은 그녀가 말했던 한마디를 철저히 지켜냄으로써 가능했다. 다분히 동화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수용해낼 장치들이 영화 곳곳에 심어져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몇십 년이 흐른다 해도... '지고지순한' 사랑은 가능하다

조성희 감독의 바람처럼 <늑대소년>에는 어린 날의 추억들을 떠올릴 만한 장면들이 있다. 늑대소년을 비롯한 아이들이 들판에서 노는 장면이나 놀다가 엄마와 할머니의 밥 먹으라는 소리에 제각기 자기 동네로 걸어가는 장면은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 소중한 한때를 같이한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면 몇십 년이 흐른다고 해도 그때의 기억들을 쉽게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고지순한 사랑은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잊어가고 있지만 바라고 싶은 이상일 것이다. 각자의 맘속에 우리 모두는 늑대소년과의 추억 같은 모습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되돌아 보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겠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바란다면 분명 만나게 될 것이다.

조성희 감독의 중편 <남매의 집>과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만든 장편 데뷔작 <짐승의 끝>에서 볼 수 있었던, 작정하고 극한까지 나아가는 치기는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자신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상업영화를 표방한 이 영화에서도 슬며시 내재되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의 전작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분명 늑대소년보다 더 짐승 같은 이들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늑대소년 박보영 송중기 조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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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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