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스페셜 '유리 감옥' 스틸

▲ 드라마스페셜 '유리 감옥' 스틸 ⓒ 한국방송


[기사수정 9일 14시 28분]

바야흐로 천인공노할 성범죄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경찰의 안이한 대처가 문제가 됐던 수원 오원춘 사건이 있었고, 전자 발찌 무용론을 부른 서울 광진구 중곡동 사건이 있었다. 또 통영과 나주에서 발생한 어린이 대상 성범죄 사건들은 물리적 거세를 징벌로 명기한 희대의 법안을 낳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국이 성범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라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사건들을 통해 관련 당국이나 시민들이 뼈아픈 교훈을 얻고 잘못을 경계하고 시정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유사한 사건들은 끊이지 않을 거란 얘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난 9월 2일 방송된 한국방송 드라마스페셜 <유리 감옥>(백혜정 극본, 이응복 연출)은 시의 적절한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성폭행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사건이 관련자들에게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또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지 않는 이들이 어떻게 '괴물'이 되어 문제를 일으키는지 등을 보여주며 시청자로 하여금 지금 한국 사회의 일면을 성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성폭행을 피하려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여고생 미정과 단 둘이 살던 강력반 형사 수정

여고생인 동생 미정과 단 둘이 살고 있는 수정(임정은 분)은 강력반 형사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 미정이 성폭행을 피하려다 뺑소니 차량에 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뺑소니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미정을 성폭행 하려 했던 조태석(배성우 분)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수정은 이후 10년 동안 미정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들을 벌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그 와중에 그녀의 인생은 망가져만 간다.

연이어 발생한 가정집 부녀자 납치 사건이 여론의 조명을 받던 어느 날, 수정은 그와 비슷한 수법을 쓰는 괴한의 습격을 받고 마취 주사에 찔리게 된다. 약 기운이 도는 몸을 이끌고 괴한으로부터 도망을 치던 수정은 이세현(진태현 분)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그녀는 수상쩍은 그의 집에서 미정이 사용하던 핸드폰을 발견하고 그가 뺑소니 범인임을 직감하게 된다.

<유리 감옥>은 스릴러로서 매력이 두드러진 드라마다. 극 중반까지 이 드라마는 수정을 습격한 괴한이 누구인지, 이세현이 수정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것들이 미정의 사망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남기지만 명확한 단서를 주지 않는다.

이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시청자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도는 상당 부분 주효했다. 정제된 대사와 공을 들인 티가 역력한 장면 연출 덕이다. 특히 괴한과 수정의 몸싸움 장면이나 괴한의 노반장(박충선 분) 습격 장면 등에서 그의 얼굴을 최소한으로 노출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비록 괴한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시청자의 뒤통수를 치는 데까지 이르진 못했지만, 적어도 이를 통해 그와 이세현의 관계 또는 역할에 대해 혼란을 주는 데는 성공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수정 캐릭터와 공권력에 관한 작위적인 설정들은 이런 재미를 반감시켰다.

먼저, 수정 캐릭터를 살펴보자. 클라이맥스 전까지 '무법자'처럼 날뛰던 그녀는 정작 중요한 상황이 되자, '방관자'가 돼버린다. 시청자들은 보통 이런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인데, <유리 감옥>의 수정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드라마스페셜 '유리 감옥' 스틸

▲ 드라마스페셜 '유리 감옥' 스틸 ⓒ 한국방송


드라마 속에 그려지는 형사 수정의 일탈...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억지설정

게다가 이 드라마가 묘사하는 수정은 '불량 형사'다. 그녀는 동생을 성폭행 하려 했다는 심증만으로 용의자인 조태석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구타를 하는가 하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는 그를 향해 총을 쏘기까지 한다. 동생을 잃은 그녀의 슬픔과 분노를 감안하더라도 어처구니없는 그녀의 행동은 확실히 도를 넘은 것이었다.

수정의 이런 무분별한 행동은 10년 동안 이어졌는데, 그녀는 급기야 조태석의 딸 돌잔치에 가서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그 자리에 있던 하객들에게, 그가 자신의 동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했다는 '허위 사실'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단지 그가 행복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저지른 일이었다.

또한 그녀는 근무 중 술을 마시는 일이 다반사인 걸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쯤 되면 그녀의 상태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진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0년 동안 경찰 당국은 과연 그녀가 정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걸까?

미국 드라마 <NCSI> 등을 보면, 수정과 같은 경험을 한 요원이 있을 경우, 당국이 전문가를 붙여 정기적으로 정신 상태를 점검하거나 끝없이 직무 수행 적합도를 체크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한국 경찰도 분명히 이런 시스템이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을 감안하면 위에 언급된 행동들을 충동적으로 저지르면서도 반성의 기색 하나 없는 수정이 10년 동안 강력반 형사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현실에서 종종 터져 나오는 경찰의 어이없는 비위 관련 뉴스를 반영한 결과로 보더라도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어디 그 뿐인가? 노반장이 괴한에게 총을 강탈당한 일과 관련하여 이 드라마가 묘사하고 있는 경찰의 반응은 시민 입장에서 볼 때 가공(可恐)할 만한 수준이다. 노반장은 괴한에게 총과 자동차와 핸드폰을 빼앗겼는데, 사실 이 정도면 경찰은 비상 태세에 돌입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드라마 속 경찰은 이와 관련하여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노반장이 징계를 받을까 두려워서 그 사실을 은폐라도 한 것일까? 덕분에 괴한은 불심검문에 걸리고도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고 사건은 더욱 커지게 된다. 즉 경찰의 대응이 상식적인 선에서만 이루어졌어도 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는 성립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란 얘기다. 공권력에 대한 이런 묘사가 지극히 작위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드라마스페셜 '유리 감옥' 스틸

▲ 드라마스페셜 '유리 감옥' 스틸 ⓒ 한국방송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 감옥>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시의적으로 볼 때 그 의미가 작지 않다. 결국 이 드라마는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이고, 지금 한국 사회는 위험할 정도로 죄의식이 희박해지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제목 '유리 감옥'은 죄의식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나오는 염치없는 인물들은 역설적으로 '유리 감옥' 대신 '보호막'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이들이 자신의 허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뉘우칠 줄 모르는 미몽에 빠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즉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려할 줄 모르는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 자신의 문제에 천착할 뿐이다. 드라마 말미에 수정은 노반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자식은 왜 잡히고도 미안하다는 시늉은커녕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일까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수정이나 노반장이나 그 '자식'이나 스스로 허물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오십보백보'다. 그때 수정이나 노반장의 얼굴에서는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과 그 잘못이 빚은 비극에 대해 반성하는 기색을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이들을 자신의 허물을 돌아볼 줄 모르는 '괴물'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그들이 속한 사회가 시비(是非)를 가리는 일을 바로 세우지 못한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비를 가리는 일이 바로 서야 시비를 가리는 기준이 선명해질 것이고, 시비를 가리는 기준이 선명해져야 잘못을 잘못인 줄 아는 눈이 생길 것이며, 잘못을 잘못인 줄 아는 눈이 생겨야 비로소 죄의식을 갖든 반성을 하든 할 텐데,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잘못은 바로잡지 않으면 반복되기 마련이고, 잘못을 반복하다 보면 잘못을 더 이상 잘못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그리고 잘못을 더 이상 잘못으로 여기지 않는 일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유리 감옥>의 괴한이나 수정 같은 '괴물'을 낳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일찍이 "성인(聖人)이냐 광인(狂人)이냐는 오직 뉘우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이토록 어지러운 걸 보면, "성인(聖人)"보다는 "광인(狂人)"들이 득세하고 있는 시절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故 장준하 선생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 정치권이 미래로 나갔으면 좋겠다. 계속 과거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것만 옳으니 그르니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할 여유가 우리 정치권에 있나."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말은 그녀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보수론자라면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이런 일이 있을 때, 법에 의거하여 시비를 명명백백히 밝히는 일에 있으니 말이다.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유리 감옥 임정은 배성우 진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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