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오프닝, 주인공이 손에 막 인화된 폴라로이드 사진을 들고 흔들어댄다. 원래대로라면 그럴수록 점점 더 선명해져야 하는 사진은 반대로 점점 더 흐릿해지고, 이윽고 하얀 백지가 되어버린다. 마치 실제로 우리의 기억력이 그러는 것처럼.

<메멘토>는 최근 영화 <인셉션>, <다크나이트>와 7월에 개봉 예정인 <다크나이트:라이즈>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2001년 만든 본인의 두번째 작품이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크리스토퍼의 동생인 조나 놀란이 쓴 소설 <메멘토 모리>를 원작으로 하였다는 점인데, 소재를 착안한 동생과 그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낸 감독 모두 보통 실력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인 주인공, 10분마다 초기화되는 기억

주인공 레너드는 전직 보험 수사관이었던 남자이다. 그는 아내가 집안에 침입한 강도에게 성폭행 당하는 것을 막으려다 머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눈을 뜬 채로 아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고, 그 정신적 충격이 육체적 부상과 더불어 작용해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다.

그가 겪는 증상은 사고 이전까지의 삶은 기억할 수 있지만, 사고 이후부터의 기억은 10분에 한번 꼴로 초기화되어 모두 삭제되는 것이다.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하는 그는, 하루에도 수십번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나.. 왜 여기에 있지? 뭘하고 있었던거지?"

언뜻 듣기에는 그냥 심한 건망증 정도로 들리겠지만, 그의 상태는 훨씬 더 심각하다. 아무리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해봐도, 시간이 지나면 방금전까지 있었던 일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이를 알아챈 사람들이 방금 계산했음에도 돈을 더 요구하는 등 그를 속이려 들기 일쑤이고, 자신이 현재 어디에 왜 와있는지도 알 수가 없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 ⓒ Newmarket Presents


그는 해결책을 '메모'에서 찾는다. 자신이 현재 어디에 와있고, 무엇을 하던 중이었으며, 주위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종이에 펜으로 일일이 적는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내용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도록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 자신의 상태, 살해당한 아내, 범인을 찾아서 복수를 해야한다는 내용까지.

하지만 누군가 그랬던가. '우리는 잊기 위해서 메모한다'고. 그가 기억을 위해 메모한 정보들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조작된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고, 단기 기억상실증인 그는 어디에서부터 누구에 의한 조작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메모들에 대한 이러한 의심조차 10분 뒤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니까.

감독의 천재적인 연출력, 관객의 기억력을 테스트하는 듯한 영화

영화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둘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영상으로 번갈아가면서 보여준다. 하나는 흑백 영상이고, 다른 하나는 컬러로 된 것. '레너드'의 이야기를 두 개로 나누어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흑백은 흑백영상끼리, 컬러는 컬러끼리 내용이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흑백과 컬러 영상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영상이 번갈아 나오는 횟수와 간격이 잦아서, 자칫 집중하지 않으면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인지 헷갈려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마치, 관객이 영화 속 주인공 '레너드'가 되어버린 듯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지럽게 섞여있는 퍼즐을 맞추는 듯한 기분으로 영화를 잘 짜맞추다 보면, 관객은 놀라운 반전도 맞이하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든 구성과 더불어 주인공 '레너드'의 허술한 기억력에 관한 내용으로 마치 관객의 기억력도 시험하는 듯 하다.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 ⓒ Newmarket Presents


주인공이 극 중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순간들과 정보를 사진과 기록으로 남기는 동안, 그 메모들이 쌓이면서 되려 진실을 왜곡하는 일도 겪는다. 분노하거나 감정적이 된 주인공이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방향으로 현실을 종이에 적는 순간에 그 '왜곡'이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감독은 이 영화로 말하려는 듯 하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라고. 자의적으로든 아니든, 때로 우리의 기억력은 스스로에 의해 검열되고 편집된다. 실제로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놓은 경찰들의 기록이나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기억은 현실과 많이 다른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나쁜 기억들은 충격을 받아들이기 쉽게 잊어버리거나 미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잊고 싶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편집된 기억을 가지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같은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지인과 대화를 하다보면, 때로는 이상하게도 그 사람과 다르게 기억하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듯이 말이다.

또한, 주인공의 짧은 기억력은 그리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닐 수도 있다. 온갖 분야에서 최첨단 기기들이 하루가 다르게 홍수처럼 쏟아지는 '스마트'한 시대에 살아가는 21세기의 우리들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당장 본인의 스마트폰만 사라지더라도, 이제 우리는 메모를 따로 해놓지 않았다면 지인들의 전화번호조차 기억하기 힘든 기억력의 소유자들이 되어버리진 않았나.

시시각각 변하는 정보들 사이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숨가쁜 일상 속,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력을 유지한 채로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도 어느샌가 레너드처럼 혼자 멍하게 앉아 촛점 잃은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었던거지?"

메멘토 크리스토퍼 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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