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원리원칙주의자였죠.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싫다고 정확히 말할 줄 아는 아내였죠. 옳은 건 옳고, 틀린 건 틀리다고 딱 부러지게 주장하는 여자였죠. 무언가 부드러운 속살이 있었음에도 딱딱한 껍질만을 드러낸 '갑각류'(甲殼類)처럼 비쳤지요. 혼인하여 7년 동안 살아 온 남편에게 그녀는 그렇게 굳어져갔죠. 전설의 카사노바가 다가서기 전까지 말이죠.

거대한 댐도 개미 한 마리가 뚫은 구멍을 통해 무너진다고 했던가요? 그토록 단단한 외벽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던 그녀도 다르지 않았죠. 다정다감하게 들이대던 카사노바의 전략적 만남에 의해 그녀는 서서히 연한 속내를 보여주기 시작했죠. 그리고 어느 한 정점의 순간에  그토록 냉정하던 그녀의 마음은 완전 녹아내렸고요.

민규동 감독의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꼭 그랬죠. 하루에도 쉴 새 없이 비판과 독설을 쏟아 붓던 아내 '정인'(임수정)의 모습 말예요. 그녀의 입바른 소리에 지칠대로 지친 남편 '두현'(이선균)은 회사의 파견 근무를 핑계로 서울을 훌쩍 떠나버리죠. 물론 떠난다고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나 봐요. 강원도까지 그녀가 따라왔으니깐 말이죠. 두현은 그곳에서 전설의 '카사노바'(류승룡)를 만나 못마땅한 아내를 유혹해 주길 바랬죠. 많은 거금을 주면서 말이죠. 그때부터 영화는 애정행각으로 돌변하고 이혼 상황으로 치닫는 것 같더니만, 끝내는 제 자리를 찾게 되죠.

언젠가 남자와 여자에 대한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여자의 감각은 귀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선이고, 남자는 눈에서 코로 내려오는 선이라고 말이죠. 여자는 청각과 촉각에 민감하고, 남자는 시각과 후각 더 빨리 반응한다는 뜻이었어요.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었죠. 남자는 화가 나면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가지만, 여자는 불쾌한 일이 생기면 하루 종일 핸드폰을 붙잡고 있다고 하죠. 속이 풀릴 때까지 수다를 떨기 위해서 말이죠.

스틸 한 컷 〈내 아내의 모든 것〉, 영화 속 남편과 아내의 모습

▲ 스틸 한 컷 〈내 아내의 모든 것〉, 영화 속 남편과 아내의 모습 ⓒ NEW



그것은 영화 속 남편과 그 아내도 마찬가지였죠.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그들 두 사람은 지진 속 식탁 아래에서 서로에게 반해 혼인까지 골인하게 되었죠. 이후 남편은 건축회사에 입사했고, 아내는 가정주부로 살게 되었죠. 문제는 결혼생활 7년차가 되었는데도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점이었죠. 둘 사이에 왠지 모를 활력소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이었죠. 

둘은 그 문제를 꿰뚫고 갈 방도를 다각도로 모색했지만 뭔가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남편은 서서히 그 문제를 안고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아내는 그 문제를 온갖 불평과 원망의 수다로 털어놓고 싶어했죠.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그들 부부의 문제를 서로가 다른 관점으로 풀어보고자 했던 셈이죠. 서로의 오해는 그렇게 해서 싹이 텄고, 점차 불신의 벽은 높아만 갔죠. 급기야 잦은 비판과 독설에 지친 남편이 그 환경을 벗어나려고 강원도로 떠났던 것이고요.

영화의 반전은 정확히 그 지점부터 시작되었어요. 자기만의 공간에서 맘껏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그 남편의 방에 설마 그 아내가 와 있을 줄이야,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요? 더욱이 그 남편을 위해 멋지고 맛있는 요리까지, 아주 근사하게, 준비해 놓고 있을 줄 말에요. 남편은 그런 아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홀로 외로이 지낼 남편이 안쓰러워 거기까지 짐을 싸 들고 온 사랑스런 그 아내를 말이죠. 하지만 그 남편에겐 그런 행동마저도 지긋지긋하게 비쳤던 것이죠.

스틸 한 컷 〈내 아내의 모든 것〉, 영화 속 카사노바와 그 아내의 정겨운 모습

▲ 스틸 한 컷 〈내 아내의 모든 것〉, 영화 속 카사노바와 그 아내의 정겨운 모습 ⓒ NEW


또 한 번의 반전은 전설의 카사노바로부터 비롯되었죠. 그는 그 남편이 살게 될 그 아파트 옆집에 이미 세 들어 살고 있는 존재였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 바람둥이가 살고 있는가 싶었을 거에요. 그저 우연한 등장 정도로 말이에요. 그런데 수많은 여성을 울린 그가, 심지어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는 여경의 마음까지 빼앗았던 그가, 끝내는 그 남편의 아내까지 유혹하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를 전설의 카사노바라 불렀던 것일까요?

이 영화는 영상미도 꽤나 탁월했죠. 헬리콥터로 비춘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인 평창도, 강원도의 바닷가 풍경도, 그 남편과 카사노바가 만났던 황태포 장소도, 영화<사랑과 영혼> 의 두 사람처럼 카사노바와 그 아내가 젖을 짰던 그 목장도, 그리고 서울로 올라온 카사노바의 작업실도 말이죠. 모두가 한 번쯤은 방문하고픈 명소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나만 그렇게 생각할까요?

남자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에게 모든 생을 불태운다고 하죠. 여자는 자신의 속내를 깊이 이해해 주는 사려 깊은 남자에게 남은 사랑을 불태우고요.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말도 그런 뜻에서 나온 것이겠죠. 그래서 그런지 그 아내는 카사노바의 적극적인 구애(求愛)앞에 정신까지 혼미할 정도였죠. 더욱이 서울에서 만난 마지막 날 밤의 '맘보 댄스곡'(Embrasse-moi) 앞에서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눈물까지 흘러내리고 말았죠.

거기까지가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보여준 그녀의 전부인 듯 했죠. 자신의 속내를 헤아려주지 못한 남편 때문에 갑각류로 살아왔던 그 아내가 급기야 카사노바 쪽으로 기울겠다고 말이죠. 마지막 방송 멘트에서는 이혼을 하겠다고 선언한 마당이었으니 더욱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아직 감춰 둔 초특급 반전이 그 영화 속에는 남아 있었어요. 어쩌면 그게 이 영화의 백미였지 않나 싶기도 해요. 그토록 톡톡거리던 '갑각'을 벗고서 온통 부드러운 속살로 그 남편에게 다시금 돌아서게 된 계기 말이죠. 정말로 애틋했고, 코믹했고, 나름대로 깊은 감동과 교훈을 남긴 살뜰한 영화였어요.

〈내 아내의 모든 것〉 민규동 감독 이선균 임수정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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