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포스터 <언터처블:1%의 우정>

▲ 메인 포스터 <언터처블:1%의 우정> ⓒ NEW

성격은 달라도 그것 때문에 서로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완고한 사람이 때론 어설픈 사람을 좋아하는 게 그렇다. 내성적인 사람이 수다쟁이가 옆에 있는 걸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이들이 댄스곡을 즐겨하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격차이는 그렇다 쳐도 신분차이는 어떨까? 고급저택에 사는 이들이 전월세에 세 들어 사는 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대지주가 하루 벌어 사는 품팔이들과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대기업 사장이 시장 상인과 만찬을 즐길 수 있을까? 오줌보 친구라면 모르겠지만 우연한 사이라면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릭 토레다노 감독의 영화 <언터처블:1%의 우정>은 서로 다른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만찬까지 즐기는 모습을 그려낸다. 최상류층에 속하는 필립(프랑스아 클루제 분)과 최하층의 드리스(오마 사이 분)가 펼치는 연기력을 통해 실제 인물들의 더 따뜻한 소통과 우정도 그려볼 수 있다.

필립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백만장자다. 승무원이 딸린 전용기에 억대의 차들, 생일 때마다 대동하는 오케스트라의 공연. 그가 최상류층의 신분임을 드러내주는 것들이다. 그것이 그를 더 엄격하고 더 근엄한 성격의 소유자로 살게 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오페라와 클래식에 젖어 사는 것도 상류층만의 특권이라 여기는 까닭은 아니었을까?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이유도 그랬다.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픈 욕망이 발동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한 사고로 그는 목 아래의 감각까지 모두 잃었고, 대 여섯 번까지 시도한 아이는 모두 유산 당했고, 급기야 그의 아내까지 잃는 불운을 겪는다. 백만장자의 신분은 유지했지만 모든 것이 한순간 날아가 버린 그였다. 성경의 '부자 욥'에 빗댈 수 있을까?

필립의 앞에 나타난 '진짜 친구' 드리스

스틸 한 컷 <언터처블:1%의 우정> 속 한 장면

▲ 스틸 한 컷 <언터처블:1%의 우정> 속 한 장면 ⓒ NEW


그런 그에게 찐한 우정을 보여준 이가 등장한다. 흑인 출신에 삼촌 밑에서 배다른 형제들과 자란 방랑아 드리스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인도 사회의 불가촉천민에 빗댈 만한 사람이다. 어디에도 얽매임 없는 좌충우돌한 성격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취향은 필립의 집에서 도우미로 일할 때에 곧잘 드러난다. 성경의 '거지 나사로'에 견줄만 할까?

서로 다른 성격에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집 주인과 그 집의 노예와도 다를 없는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무엇이었던가? 무엇이 둘 사이를 우정의 끈으로 연결시켰던가? 필립은 돈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진정으로 위해주는 드리스의 진실성에서, 드리스는 자신의 조언과 재능을 인정해 준 필립의 배려심에서, 그들 사이의 우정이 싹트고 깊어졌다.

드리스의 진실성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한 밤 중 거친 호흡을 하고 있던 필립을 휠체어에 태워 부둣가 산책을 나선 일, 필립의 생일잔치 석상에서 클래식이 아닌 댄스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던 일, 별안간 필립으로부터 해고된 뒤로도 그의 아픔과 허전함을 달래주려 다시 찾아 간 일, 필립이 주고받던 연애편지의 주인공을 마지막까지 만나도록 주선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난 일이 그렇다.

스틸 한 컷 <언터처블:1%의 우정>의 한 장면

▲ 스틸 한 컷 <언터처블:1%의 우정>의 한 장면 ⓒ NEW


드리스를 향한 필립의 배려심은 어떠했나? 필립은 그가 일자무식이었어도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높이 샀고, 그가 그린 처녀작품도 자신이 아는 미술애호가에게 직접 선을 보여 판매할 정도로 그의 예술성을 인정해 줬다. 괴팍한 자신의 딸 아이에게 매를 들어서 훈계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인 데서, 그를 향한 진정어린 배려심을 엿볼 수 있다.

'언터처블'이란 영화 제목의 앞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필립과 드리스는 사실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사이다. 오늘을 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자화상이 그렇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야 잠깐의 흥미를 위해 함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신분상 차이는 서로 손을 맞잡을 수도, 오페라나 만찬 석상에서도 함께 즐길 수 없는 사이로 만든다.

앞선 그 제목 뒤에 토레다노 감독은 '1%의 우정'을 붙였다. 아니 또 다른 제목 하나를 단 것이다.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삭막한 연결고리보다, 서로 간에 '진실과 배려'를 나누는 인간다운 삶의 교감을 이루고픈 의도가 아니었을까? 말이 될지는 모르지만  '따뜻한 자본주의 사회'를 꿈꾸는 것 말이다. 이 영화 <언터처블:1%의 우정>은 두고두고 사랑받을 작품이다.

에릭 토레다노 감독 <언터처블:1%의 우정> 프랑스아 클루제 오마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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