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방송된 SBS 설 특집극 <널 기억해>는 20년 지기 친구인 세 주인공의 고민과 갈등을 통해 오늘날 우정과 행복의 의미를 묻는 드라마다. '달인' 김병만이 주연으로 출연한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아버지(백일섭 분)와 함께 구둣방을 운영하고 있는 덕수(김병만 분). 노총각인 그는 이른바 동네 '소사'다. 같은 상가 사람들이 부탁하면, 터진 수도관을 고치고 입간판 형광등을 갈아 끼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런 그가 약삭빠른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거라며 못마땅해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덕수는 20년 지기 친구 둘이 있다. 하나는 인정받는 광고회사 팀장인 강수고, 다른 하나는 선물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은수(이영은 분)다. 은수는 덕수가 몰래 사랑을 키우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강수가 두 사람과 소원해졌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에 잘 웃지도 않게 됐고, 근래 잠도 통 못 잔다는 강수가 걱정인 덕수와 은수. 두 사람은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해주려 하지만, 강수는 부담스럽다며 엇나가기만 한다. 과연 덕수는 두 친구와의 우정을 지킬 수 있을까?

그래, 덕수는 착한 남자지만...

 SBS 설특집 드라마 <널 기억해> 백일섭-김병만 부자

SBS 설특집 드라마 <널 기억해> 백일섭-김병만 부자 ⓒ SBS



덕수는 착한 남자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끔 그는 콤플렉스인 작은 키를 두고 놀리는 손님이나 은수에게 못 되게 구는 강수가 미워질 때면, 구두 속에 구두약을 발라놓거나 승용차 앞유리에 낙서를 하는 등 소심한 '복수'를 감행하기도 하지만, 이내 안절부절하며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애를 쓰는 인물이다.

강수는 그런 덕수를 한심하게 보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기 일쑤인 그가 덜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수 잣대일 뿐이다.

알고 보면 덕수는 강수가 모르는 인간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다. 은수에게 막말을 하는 강수에게 "너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은수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너 그럼 천벌 받아"라고 친구로서 충고할 줄 아는 그는 결코 한심하거나 덜떨어진 인물이 아니다.

또 은수가 강수에게 헌신적인 것을 두고 자기중심적인 강수는 그녀의 행동이 단지 자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집착'이라고 해석하지만, 오랫동안 두 사람을 봐 온 덕수는 "은수는 그냥 알아본 거야. (네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그냥 아팠던 거야. 너 때문에"라며 그를 일깨우려 한다.

강수보다 '김병만'을 똑똑히 여겨야 '상식적인 사회'

널 기억해 SBS 설특집 드라마 <널 기억해>

▲ 널 기억해 SBS 설특집 드라마 <널 기억해> ⓒ SBS



덕수는 은수의 행동 이면에 있는 그녀의 진심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얘기다. 옳고 그른 게 뭔지 알고 이를 가려 행동하는 사람, 또 어떤 현상을 보고 사려 깊은 판단을 내리는 사람을 두고 덜떨어졌다고 말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수준이나 안목이 딱 거기까지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 이 드라마는 덕수와 강수, 두 남자를 대비하며 시청자로 하여금 '착하다'와 '똑똑하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해준다.

사실 지금 한국 사회가 두 단어를 제대로 쓰고 있다면, 착하게 사는 것이 곧 똑똑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아마도 덕수를 두고 착한 남자라고 이야기할지언정 똑똑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물며 강수보다 똑똑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면 터무니없는 소리로 취급받기 딱 좋지 않을까?

착하게 사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고, 따라서 이른바 '찌질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바보의 삶'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오늘 한국 사회에 대해, 이 드라마는 '착하다'와 '똑똑하다', 두 단어가 본래 뜻과 다르게 전용되고 있노라고 일갈하는 듯하다.

백일섭 - 김병만 부자, 그들이 선사한 웃음의 정체는?

 <널 기억해>에서 백일섭-김병만 부자는 깨알같은 웃음도 선사한다

<널 기억해>에서 백일섭-김병만 부자는 깨알같은 웃음도 선사한다 ⓒ SBS



덕수를 연기한 김병만은 그의 아버지로 나온 베테랑 연기자 백일섭과 함께 이 드라마의 웃음을 책임진다.

덕수를 연기한 김병만이 극 초반 반성문을 대신 써 달라며 무릎걸음으로 강수에게 다가가는 모습이나 그가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할 때마다 누군가의 옆에 붙어 앉아 그 사람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 등은 키득키득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재미는 같이 있으면 늘 아옹다옹하는 부자를 자연스럽게 연기한 두 사람의 호흡에서 나온다.

드라마 도입부에서 두 사람은 덕수가 사기를 당한 일로 쫓고 쫓기는 활극을 펼치면서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선사했고, 일련의 대화 장면에서는 옥신각신 차진 대사를 주고받으며 유쾌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덕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 강수를 연기한 배우는 김진우다. 신인배우인 그의 외모는 파릇파릇하던 시절의 정준호와 권상우를 떠올리게 하는데, 못돼먹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강수 캐릭터를 거부감보다는 안쓰러움을 자아내는 인물로 연기해냈다. 단선적인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연기해냈다는 점에서 앞으로 그의 행보를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널 기억해>가 보여주는 서늘한 한국 사회

SBS 설특집극 <널 기억해> 명절 특집극 대부분이 '가족간의 화해' 혹은 '세대간의 이해'에 관한 해피엔딩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SBS 설특집극 <널 기억해>는 '루저'와 '망명자' 등을 내세워 한국사회의 '불통'으로 인한 '파국'을 경고하고 있다

▲ SBS 설특집극 <널 기억해> 명절 특집극 대부분이 '가족간의 화해' 혹은 '세대간의 이해'에 관한 해피엔딩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SBS 설특집극 <널 기억해>는 '루저'와 '망명자' 등을 내세워 한국사회의 '불통'으로 인한 '파국'을 경고하고 있다 ⓒ SBS



<널 기억해>는 기본적으로 착한 드라마다. 친구란, "사람들이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해주고 행복해하는" 것처럼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며, 그 기억만으로도 '내'게 행복을 주고 또 스스로도 행복해지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드라마의 메시지는 따뜻하고 울림이 있다.

하지만 정작 이 드라마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이 드라마의 시선이다. <널 기억해>는 기본적으로 강수가 사는 세계와 덕수와 은수가 사는 세계를 마치 평행선처럼 이질적인 세계로 그린다.

오늘 한국 사회 '주류'의 잣대로 봤을 때 전자가 자본주의의 상층부를 이루는 승자들의 '세계'라면, 후자는 그로부터 밀려난 '패자'와 자발적으로 걸어나온 '망명자'가 공존하는 하층부 또는 주변부의 세계다. 또 그 연장선상에서 세 주인공을 각각 평가하면, 강수는 어떻게 해서든 승자로 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인물이고, 덕수는 이른바 '루저', 은수는 '망명자'다.

이런 분류법이 적절한지 여부를 논외로 하고 본다면, 이와 관련하여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바로 두 세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이질적인 관계가 돼버렸다는 것.

덕수는 이른바 '루저', 은수는 '망명자'

은수와 강수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장면을 보자. 강수는 "니들하고 난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니들은 히히덕거리며 살아도 되는 세상에 살지만 난 먹히냐 먹느냐 하는 정글에서 살아가고 있다"며 '선'을 긋는다.

입장은 다르지만 두 세계에 '선'을 긋는다는 점에서는 은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자신이 불쌍해서였어. 아무리 머리 쥐어짜도 아이디어 안 나오는데 쥐어짜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였어. 더는 못하겠다 싶어서 사표 내고 너랑 덕수 크리스마스 선물 사려고 왔는데, 여긴 다른 세상이었어.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얼굴로 선물들을 고르고 있는데, 그래, 여기 있자, 한 거야."

<널 기억해>는 행복한 삶을 살려면 덕수와 은수가 사는 세계를 택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 기저에는 오늘 한국 사회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위에서 언급한 두 세계 중 어느 한쪽만을 택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고 믿는 단절론이 자리하고 있다.

결코 훈훈하지만 않았던 <널 기억해>

이른바 '불통사회'로 불리는 한국 사회의 오늘과 그로 인한 '파국'을 경고하는 듯한 드라마의 결말을 보라. 결국 세 주인공의 오랜 '우정'은 깨졌고, 은수는 강수에게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젠 너 혼자 가, 강수야."

일반적으로 훈훈함을 기대하게 되는 설 특집극이지만, 이례적으로 이 드라마의 결론이 서늘하고 씁쓸하게 느껴진 건 그런 이유에서다.

널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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