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이 아닌 영혼을 뿌린 남자, 최동원과 선동열.

공이 아닌 영혼을 뿌린 남자, 최동원과 선동열. ⓒ 밀리언 스토리


업으로 삼는 분야에서 자신보다, 아니 자신만큼 능력 있는 후배가 나타나는 것은 솔직히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겉으로는 잘된 일이라고 밝게 웃지만, 속으로 미동조차 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 그렇지 않아 보이려고 노력할 따름인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간 쌓아온 능력을 여러 사람 앞에서 인정받아야 할 때는 더욱 괴롭다. 언젠가 내려가야 할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고 올라오는 라이벌을 통해 검증받는 과정을 거친다. 그것은 잔인하고 쓰디쓴 인생의 한 단면이다.

반대로 후배 입장에서도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이긴 마찬가지. 꿈꿔왔던 일인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지만, 까딱 잘못했다간 '그러니 구관이 명관이지' '알고 보니 별것 아니네'라는 조롱을 듣기 십상이다. 이래저래 양쪽 모두 부담이 된다. 즐거운 건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뿐.

최동원과 선동열.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결례인 한국 야구의 대표 명사. 세상 사람들은 둘만의 정면대결을 원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 승부를 가려야 했다. 점령을 위해서가 아닌, 지면 물러날 곳이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그 절절했던 승부의 기록물이 나왔다. 영화 <퍼펙트게임>이다.

1987년 그 날, 몸과 마음을 태워버린 둘만의 승부

 실제 투구폼을 재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친 조승우와 양동근.

실제 투구폼을 재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친 조승우와 양동근. ⓒ 밀리언 스토리


영남과 호남, 연세대와 고려대, 롯데와 해태. 세상은 그들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었기에 그들에게 거는 팬들의 기대는 각별했다. 그렇게 '라이벌'이란 단어는 그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멍에였던 것이다.

야구팬이라면 알고 있듯이 두 사람은 세 번을 맞붙었고, 사이좋게 1승 1무 1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놀라움을 맛보게 된다. 1986년 4월 19일, 첫 대결에서 선동열은 1 : 0 완봉승을 거뒀다. 4개월 뒤에는 최동원이 2 : 0의 완봉승을 따냈다. 두 사람 모두 완투승과 완투패를 나눠 가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선수가 끼어들 틈이 없었던 셈.

마지막 대결은 1987년 5월 16일에 벌어졌다. 영혼까지 쥐어짠 승부는 15회 2 : 2 무승부. 최동원은 60명 타자에게 209개의 공을, 선동열은 56명에게 232개를 던졌다. 타자 효율성에선 선동열이, 투구 효율성에선 최동원이 근소하게 앞섰다. 하지만 그런 걸 따져서 뭘 하랴. 둘 다 자신의 몸을 배려하지 않은 '바보 같은 우직함'을 보여줬다.

영화는 바로 그 마지막 경기를 집중 조명한다. 이를 위해 둘이 그날 던졌다는 사실 이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픽션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야 본전이기 십상인 스포츠 영화. 게다가 이미 결과까지 나와 있는데, 영화는 어떻게 두 사람의 내면을 그려냈을까.

새롭게 창조된 캐릭터들, 둘의 성격을 대비시키다

 영화에는 극적 구성을 위해 실제는 벌어지지 않았던 몸싸움 장면이 들어갔다.

영화에는 극적 구성을 위해 실제는 벌어지지 않았던 몸싸움 장면이 들어갔다. ⓒ 밀리언 스토리


영화 <퍼펙트게임>의 시작은 대륙간컵 대회에서 연일 완투하고 금의환향하는 최동원(조승우 분)을 비춘다. 그 옆에는 부럽고 존경스러운 눈길로 최동원을 바라보는 햇병아리 시절의 선동열(양동근 분)이 있다. 곧바로 시간은 1986년으로 넘어간다.

그사이 미완의 대기에서 벗어나 마운드의 지배자로 거듭난 선동열. 그는 24승(8완봉승, 14완투승, 5완투패)에 방어율 0.99라는 경이적인 성적으로 정규시즌 MVP를 거머쥔다. 흐뭇함과 씁쓸함을 담은 박수를 보내는 최동원.

성적은 탁월하지만, 평소 생활은 다소 다른 두 사람.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일상생활마저 스스로 통제하는 최동원. 그에 비해 밤새 퍼 마시고도 완봉승을 챙겼다는 일화가 남아있는 선동열은 어느 정도 동료들과 어울림을 즐기는 상태다. 물론 압도적인 기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두 사람의 성격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적 캐릭터가 창조됐다. 롯데의 김용철(조진웅 분)은 늘 최동원만 주목받는 세상이 탐탁지 못하고, 평소 동료들과 술 한 잔 기울이지 않는 성격이 마음에 안 든다. 때론 이죽거리고 일촉즉발의 대립을 벌인다. 조진웅은 코믹한 역할까지 함께 소화했던 배우다. 요즘 최고 주가를 드높이는 <뿌리 깊은 나무>의 '무휼'을 스크린에서 만나 반갑기까지 하다.

해태 타이거즈의 김응룡(손병호 분) 감독은 선동열의 평소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 최동원을 넘어설 수 있는 재목이지만, 현실에서 안주하는 듯해 몹시 불만이다. "그런 식이라면 퇴단 시켜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너는 아직 동원이 보다 모자라다"며 자존심을 긁기도 한다.

지역 감정을 기뻐하던 시대의 아픔까지 담아내

 실제 좋은 선후배 관계였던 두 선수.

실제 좋은 선후배 관계였던 두 선수. ⓒ 밀리언 스토리


영화는 시대의 배경이나 추억을 충실히 살렸다. 야구가 뭐라고 경기장 안팎에서 오물을 집어던지고, 상대팀 버스를 불태우던 옳지 못한 행동들. 행여나 응원하는 선수를 비판하면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만난 듯 이를 드러내던 악다구니까지 그대로 담았다.

영화에는 그런 지역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윗선'의 모습도 등장한다. "저럴수록 선거에 유리하다"며 기쁜 미소를 짓는 이들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사연들이 엮이고 쌓여가며 영화는 마지막 대결로 달려간다.

영화는 마지막 대결에서 스포츠 영화다운 묘미를 극대화 시킨다. 수개월 동안 노력했다는 주·조연 배우들의 땀이 배어나와 제법 흥미롭다. 특히 조승우와 양동근의 연기대결이 볼만하다. 조승우는 안으로 많은 것을 삭히며, 지쳐가는 몸을 일으켜 세우던 최동원의 모습을 담아냈다. 따라 하기 힘들다는 최동원의 역동적인 투구 폼도 완벽 소화했다.

시사회를 지켜본 조승우가 감탄했다는 양동근도 대단한 재능을 뽐낸다. 선동열 특유의 투구 폼은 물론 투구 후 기뻐하는 모습, 설렁설렁한 전체적인 행동을 완벽히 재현했다. 질투와 존경의 양면성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넘던 눈빛도 그가 아니라면 표현하기 어려워 보인다. 

영악한 이들이라면 피했을, 바보 같던 우직함

 프로야구 롯데 대 해태 경기에 선발등판한 최동원과 선동열 투수./본사자료
//1987.5.18(부산=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프로야구 롯데 대 해태 경기에 선발등판한 최동원과 선동열 투수 ⓒ 연합뉴스


영화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 마지막 대결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하지만 전반부 빠른 진행에 비해 다소 길게 끄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사실 영화 재료 자체가 감동을 주지 않으려 해도, 감격할 수밖에 없는 소재다. 실제 언론 시사회가 끝난 후 많은 이들이, 이미 영화 초반부터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고 한다. 하늘로 간 최동원 선수를 떠올렸기 때문 아닐까.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수 없었던 두 사람의 대결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날 대결 후 최동원은 "앞으로 프로야구를 이끌어갈 최고투수는 선동열"이라고 추켜세웠고, 선동열은 "최동원 선배라는 거대한 목표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삶을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너의 우월함을 너와 비슷한 누군가와의 대결을 통해 입증하라는 세상의 압력.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니 문득 그들이 싸운 대상은, 상대방이 아니라 세상이 아닐까 싶다. 확인하고 규정·확정 짓고 싶은 사람들을 향해 '자 이 정도면 됐냐!'하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항변한 그런 싸움.

현대 야구는 철저히 분업화돼 있기에, 다시는 그날 같은 대결이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팔이 빠지도록, 혼이 소진되도록 공을 뿌리던 그들의 대결. 굳이 시대 탓을 하지 않더라도, 대결은 그들이 영악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보 같지만 우직하게' 던진 두 남자의 대결에 코를 훌쩍일 수밖에 없다. 다시 못 볼 명승부를 선사한 두 선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도 좋을 영화다.

덧붙이는 글 개봉 : 12월 22일(목)
퍼펙트게임 최동원 선동열 야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