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비내리는 서울처럼, 태릉 실내빙상장 안에도 비가 내렸다. 수증기가 응결되어 천장에서 지상으로 비처럼 내리는 것이었다

지난 여름 비내리는 서울처럼, 태릉 실내빙상장 안에도 비가 내렸다. 수증기가 응결되어 천장에서 지상으로 비처럼 내리는 것이었다 ⓒ 곽진성


지난 7월 26일, 서울은 온통 물난리였다. 갑작스런 폭우가 도심을 덮쳐, 산사태와 자동차 침수사고가 잇달아 발생한 것이다. 이날, 서울에 내린 비는 시간당 최고 113㎜의  엄청난 양, 그로 인해 서울 교통 흐름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태릉선수촌 주변에도 많은 비가 내렸다. 태릉입구 역 주변 도로의 차량들은 불어난 물에 거북이 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험한 날씨에 태릉으로 훈련을 올 선수는 없어 보였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것조차 버거운 하루였다.

피겨 국가대표, 폭우를 뚫다!

그런데 그날 오전, 태릉 실내 빙상장에 거센 비바람을 뚫은 6명의 국가대표가 도착해 있었다. 이호정, 김해진, 박연준(14), 이동원(15), 곽민정(18), 김연아(22) 선수였다. '교통이 거의 마비 상태인데 대체 어떻게들 온 거지?'라고 깜짝 놀란 기자를 보며, 한 국가대표 선수 어머니가 담담하게 말했다.

"피겨 선수들은 웬만한 기상이변은 아무렇지 않게 뚫고 옵니다."

정말 그랬다. 유난스런 기상재해도, 대한민국 피겨 국가대표의 열정을 가로막지 못했다. 선수들에게 있어 예정된 훈련을 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수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루를 쉬게 되면, 그를 만회하기 위해 몇 배의 땀을 더 흘려야 한다는 사실을,

 태릉의 여름 은반, 대회를 앞두고 연습에 매진하는 선수들의 열정이 뜨거웠다. 김해진 선수가 멋진 동작으로 점프를 랜딩하고 있다

태릉의 여름 은반, 대회를 앞두고 연습에 매진하는 선수들의 열정이 뜨거웠다. 김해진 선수가 멋진 동작으로 점프를 랜딩하고 있다 ⓒ 곽진성


그렇기에 국가대표들은 웬만한 어려움 정도는 너끈히 이기고, 은반 위에서 훈련을 이어갔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며, 총총 피겨 국가대표팀 락커룸으로 들어가는 선수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특히 국가대표 막내 호정이와 해진이는 이날따라, 운동화 끈을 더욱 단단히 묶었다. 주니어 그랑프리 대표 선발전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스트레칭을 하며, 긴장된 마음을 토로했다.

"으악, 이제 대회, 일주일 남았어!" (해진)
"그러게, 그냥 빨리 했으면 좋겠다. 정말!" (호정)

 피겨 국가대표 이호정 선수, 대회를 앞두고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피겨 국가대표 이호정 선수, 대회를 앞두고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 곽진성


해진이와 호정이는 강심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에게도 이번 대회는 약간의 긴장을 갖게 했다. <주니어 월드 그랑프리 대표 선발전>은 세계 대회에 나갈 대표(여자3명, 남자2명)를 뽑는 아주 큰 대회였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불과 일주일, 대회를 앞 둔 어린 선수들의 가슴이 두근거릴 만도 했다.

중학교 2학년 국가대표 막내들보다 한 학년 위인 동원이와 연준이도 대회를 준비하며, 지상 연습에 한창이었다. 7월의 태릉에서 동원이는 청일점이었다. 친한 국가대표 형 (김)민석이와 동갑내기 국가대표 절친 (이)준형이가 미국 전지훈련을 떠났기 때문이다.

 피겨 남자싱글 국가대표 이동원 선수, 지난 여름 태릉 훈련을 열심히 해냈다

피겨 남자싱글 국가대표 이동원 선수, 지난 여름 태릉 훈련을 열심히 해냈다 ⓒ 곽진성


동원이는 형과 친구를 기다리며, 묵묵히 훈련에 임했다. 그 옆에서 같은 학년인 연준이도  막바지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폭우로 태릉에 오지 못한 막내 경아는, 같은 시각 과천링크로 발길을 돌려 훈련을 진행했다. 미국 전지훈련 중인 소연이와 준형이도 열심히 훈련하며 은반 위의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로 땀을 흘리는 위치는 달랐지만, 국가대표 주니어 선수들의 목표는 하나. 피겨 주니어 그랑프리 대표에 선발되는 것이었다. 꿈을 위한 은반의 연습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힘없는 하루, 뜨거운 열정으로 이겨내다

 피겨 올림픽 챔피언 김연아 선수의 지상훈련, 지난 여름 열심히 훈련에 매진했다

피겨 올림픽 챔피언 김연아 선수의 지상훈련, 지난 여름 열심히 훈련에 매진했다 ⓒ 곽진성


폭우가 쏟아지던 26일 오전,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 역시 지상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달리기로 몸을 푼 후, 트레이너와 함께 다양한 동작들로 스트레칭을 해나갔다.

"자, 오케이 갈게요! 시작!" 

트레이너의 힘찬 구호에 맞춰,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2018 동계 올림픽 최종 프리젠테이션를 위해 남아공 더반에 다녀왔던 김 선수, 장거리 여행으로 인해 많은 체력 저하가 있었지만 '이열치열'이란 말처럼, 더욱 강한 체력훈련으로 이를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열띤 훈련을 이어가는 김연아 선수의 연습량이 상당했다.

지상 훈련 후, 스케이트를 신고 은반을 유영한 김연아 선수는 환상적인 트리플 점프를 연이어 선보였다. 물리적으로 저런 높이와 거리가 가능할까, 놀라움이 드는 점프는 '날고 있다'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훈련에 매진하는 올림픽 챔피언 김연아

훈련에 매진하는 올림픽 챔피언 김연아 ⓒ 곽진성


김연아 선수의 환상적인 점프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지만 정작 본인은 아직 만족한 상태에 도달하지 않은 듯 보였다. 점프 후, 김연아 선수가 후배 곽민정 선수에게 말을 꺼냈다.

"이상하게 다리에 힘이 없어!"   (김연아)
"저도 다리에 힘이 없어요. 오늘 비가 와서 그런가?" (곽민정)
"난 비 안 와도 힘이 없어. 왜 그렇지? (김연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연아 선수, 곰곰이 생각하더니 잠시 후, 답을 찾은 듯 말했다.

 "아! 오늘 밥을 안 먹고 와서 그런가 보다!(웃음)"

재치 있는 말에, 은반 위 국가대표 선수들이 활짝 웃었다. 폭우에 왠지 모르게 힘이 빠지는 하루였지만, 선수들의 밝은 웃음은 눅눅한 하루를 이겨내는 원동력이 됐다.

이날 태릉 실내빙상장 안에는 밖과 같이 비가 내렸다. 천장의 물이 응결돼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호정이의 얼굴에도, 연준이의 이마에도, 그리고 김연아 선수의 뒷머리에도 큰 물방울이 톡하니 떨어졌다.

처음엔 깜짝 깜짝 놀랐던 국가대표 선수들, 하지만 이제 익숙해졌는지 차가운 물방울 견디며 연습에 몰입했다.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도 물 맞은 뒷머리를 슥슥 문지르고 훈련에 임했다. 여름날, 태릉 밖과 안에서 쏟아진 폭우는 당황스러웠지만, 이를 극복한 대한민국 피겨 국가대표들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었다.

비 내리는 태릉에서, 열연이 시작된다

점프 연습을 진행하던 선수들은 한 명씩, 카세트 쪽으로 다가와 자신의 프로그램 CD를 틀었다. 올시즌 새 프로그램을 얼음 위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다. 오전 11시50분, 국가대표 선수들은 은반 위에서 자신의 기량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설렘이 가득한 선수들의 표정은, 마치 여름날의 향연을 즐기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비 내리는 태릉에는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원이의 프리 스케이팅 음악은 '캐리비안의 해적 OST'이었다. 선율에 맞춰 은반 위를 힘차게 질주하는 동원이는, 마치, 푸른 대양을 항해하는'잭 스페로우'선장 같았다.

큰 키와 신체의 유연성에서 나오는 고난이도 트리플 점프는 감탄사를 자아냈다. 4분 10여초의 연습 무대는 2011년 동원이의 프리스케이팅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다.

 열네살 국가대표 스케이터 박연준 선수, 그녀의 2011년 프리 스케이팅 프로그램은 '록산느의 탱고'이다

열네살 국가대표 스케이터 박연준 선수, 그녀의 2011년 프리 스케이팅 프로그램은 '록산느의 탱고'이다 ⓒ 곽진성


이어 은반위에 선 이는 연준이였다. 이번 시즌, 연준이는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록산느의 탱고'를 택했다. 탱고를 좋아하는 연준이에게, 이 탱고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탱고 음악을 좋아하는 제게, '록산느의 탱고'는 특히 자신감을 주는 프로그램이에요."

이 곡은 대한민국 피겨 팬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피겨여왕 김연아의 열정이 이 탱고 음악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4년 전인 2007년 3월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피겨 세계선수권 대회>를 많은 팬들은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17세였던 김연아 선수는 대회를 앞두고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허리 부상으로 인한 고통이 온몸 구석구석을 찌르고 있었다.

동작 하나, 움직임 하나에 살을 에는 고통이 밀려왔다. 제대로 경기를 치를 수 없는 상태였다. 임시방편으로 온 몸에 파스를 둘렀지만, 아픔을 완화시키지 못했다. 굳어버린 표정에선 고통을 참고 견디는 한 스케이터의 아픔이 엿보였다. 이런 상태로 <세계선수권대회>를 출전하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였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는 부상을 견디며, 연습을 진행했다. 땀과 고통으로 범벅된 그런 훈련 속에 대회가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고통을 이기고 은반 위에 섰다. 3월23일 저녁, 록산느의 탱고 선율에 맞춰, 김연아 선수는 혼신의 연기를 시작했다.

 2007 세계선수권 쇼트프로그램에서 '록산느의 탱고'에 맞춰 열연을 펼치는 김연아 선수 (EUROSPORTS 화면캡처)

2007 세계선수권 쇼트프로그램에서 '록산느의 탱고'에 맞춰 열연을 펼치는 김연아 선수 (EUROSPORTS 화면캡처) ⓒ EUROSPORTS 화면캡처


그런데 연기를 시작한 김연아의 표정에서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물의 흔적도 사라졌다. 대신 음악과 완벽히 어우러진 한 마리 작은 새처럼 자유스럽게 은반 위를 누비고 있었다. 점프는 실수 없이 완벽했고, 연기는 아름다웠다. 

<김연아 선수 07 세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 영상>

2007 세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에서 김연아는 최고의 연기를 펼쳐 보였다. 고통마저 승화시킨 열연이었다. 당연히 최고의 결과가 따랐다. 쇼트 프로그램 세계 신기록인 71.95 점, 그렇게 피겨여왕의'록산느의 탱고(영화 물랑루즈中)'는 피겨 팬들에게 '불멸의 프로그램'으로 남게됐다.

당시 열 살이던 연준이도 김연아 선수의 연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록산느의 탱고'에 특별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4년 뒤, 연준이는 자신의 프리 스케이팅 음악으로 록산느의 탱고를 선택했다.

"사람들이, 많이들 물어요. '록산느의 탱고'가 연아 언니의 쇼트 프로그램 음악이었기 때문에 부담은 안 되는냐고요. (웃음) 괜찮아요. 연아 언니가 감동 연기를 보여준 '록산느의 탱고'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감을 가지고 하고 있어요." (박연준)

연준이에게 있어, 자신이 감동받았던 '록산느의 탱고'를 연기하는 것은 살짝 부담이 될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국가대표 주니어답게 그런 부담을 떨쳐냈다.

고혹적인 탱고 선율이 부드럽게 은반 위를 감쌀 때, 연준이는 부담을 누르고 은반 위에서 집중해 연기를 시작했다. 부드럽게 상체를 움직이며, 지켜보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긴 다리와 긴 팔에서 표현해 내는 예술성은 14살 스케이터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출중했다.

연준이는 피겨여왕의 '록산느의 탱고'와는 또 다른 색깔의 연기를 펼쳤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견스럽고, 뜨겁게 칭찬해 줄 일이었다. 이날, 연준이의 멋진 연기를,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한민국 피겨 주니어의 새로운 '록산느의 탱고'는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행복하게 했다.

 김연아 선수와 곽민정 선수, 넘어져도 밝게 웃으며 멋진 포즈를 지어보였다.

김연아 선수와 곽민정 선수, 넘어져도 밝게 웃으며 멋진 포즈를 지어보였다. ⓒ 곽진성


 김연아 선수와 곽민정 선수, 여름 훈련의 고단함에도 두 사람은 태릉에서 밝게 웃으며 어깨춤을 췄다

김연아 선수와 곽민정 선수, 여름 훈련의 고단함에도 두 사람은 태릉에서 밝게 웃으며 어깨춤을 췄다 ⓒ 곽진성


2011년 7월 26일, 4년 전과 같은 눈물의 탱고는 없었다. 홀로 고독하게 세계 무대에 맞서야 했던, 부상과 싸우며 마음 속으로 울어야 했던 한 피겨 스케이터의 아픔도 없었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밝은 미래였다. 탄탄한 우정을 바탕으로 한 희망 가득찬 미래가 국가대표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서는 피겨 국가대표 선수들의 환상적인 트리플 점프가 은반을 수놓고 있었다. 실수에도 아파하지 않고, 어깨 춤을 덩실덩실 추는 연아와 민정, 이를 지켜보는 호정,해진,연준, 동원이의 웃음 소리가 태릉에 가득했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기에, 여름 은반 위의 태릉은 행복하고 든든했다.

피겨 국가대표 태릉 훈련 록산느의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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