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빨랐던 선두권. 하지만 그들도 힘들었다는...

너무나 빨랐던 선두권. 하지만 그들도 힘들었다는... ⓒ 유지성


레이스가 너무 힘들고 어렵기에 단지 대회 3일 만에 벌어진 선수들의 동요는 다음날 주최측에서 제시한 제안을 최연장자인 뉴질랜드의 조가 받아 들여 극적인 타결을 보았다. 한국이건 외국이건 문제가 생겼을 때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최연장인 조가 그 역할을 참 잘해주었다.

문제가 복잡하게 꼬이며 심각해졌을 때, 처음에는 조가 주축이 돼서 대회 거부를 논하는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조는 중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적당히 자신의 불만도 표출하며 세계 각지에서 참가한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한 후, 주최측과는 타협을 통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역시 세월은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배우게 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는 조와 같은 어르신이 각 분야별로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대회 운영이 미숙해 발생된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들에 대한 주최측의 사과와 해명, 선수들과의 진솔한 대화 후 우리가 받아들인 주최측 제안은 이랬다.

1. 이전에 탈락한 선수들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며 구간에 상관없이 달린 거리를 인정한다. 단, 전체 9개 구간 완주자와는 최종 순위와 표기에 차이를 둔다.
2. 6일째 하루는 쉬는 날로 정해서 코스 길이를 줄인다. 그 후 중간에 자동차로 다음 캠프까지 이동한다.
3. 코스에서 제공하는 의료서비스 강화와 물 공급을 더욱 늘리겠다.

메마른 사막의 단비 같이 일부 코스 길이가 줄어든다는 소리에 모두 기뻐하며 환호를 보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암울함이 가득하던 캠프에 금세 희망의 빛줄기가 내리며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참, 사람 마음은 단순하고도 간사하다.

 다시 모든 참가자들이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모든 참가자들이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 유지성



 산악지대를 벗어나니 평지가 나왔지만 바닥은 모래.

산악지대를 벗어나니 평지가 나왔지만 바닥은 모래. ⓒ 유지성



 아웃백은 파리와의 전쟁터였다.

아웃백은 파리와의 전쟁터였다. ⓒ 유지성


오지 레이스 경력 10년차... 이참에 마사지숍을?

혼란스러웠던 밤이 지나고 대회 4일째부터는 다시금 전체 참가자들이 함께 달릴 수 있었다.

역시 출발은 약간 요란스럽고 시끄러워야 제 맛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자와 다시금 살아난 자들이 좀비처럼 아니 이미 좀비가 되어서 즐거운 웃음 속에 다함께 출발했다.

선수들과 주최측의 흉금 없는 대화 이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는 다함께 대회를 완성한다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대회가 워낙 장거리고 험한 코스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부상자들은 늘어만 갔다.

그중 쿠웨이트의 유세프는 왼쪽 발목 부상으로 거의 포기 수준까지 갔다. 하도 통증을 호소하기에 살펴봤더니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한눈에 봐도 테이핑이 잘못되어 있었다. 퉁퉁 부어 오른 발목은 잘못된 처방으로 발등부터 정강이까지 손상을 입고 있었다.

사실 대회에서 남의 탈락은 역설적으로 나의 기쁨이 된다. 남들은 저렇게 탈락하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한숨은 새로운 재생 에너지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게 사람이고 삶이다.

어쨌든 나는 이제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자신있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경지의 오지 레이스 경력 10년차다 보니 사람을 한 번 보면 그 사람의 컨디션과 현재의 문제가 대충 파악된다. 그래서인지 외국 참가자들 중에 문제가 생기거나 조언이 필요하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세프도 마찬가지였다.

아랍인 특유의 엄살과 오버액션 속에 아프다며 하도 징징거리는 유세프가 귀찮기도 했지만, 의외로 계속해서 달리고자 하는 의지가 상당히 강한 친구라 어떻게 하든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먼저 잘못된 테이프를 걷어낸 후 한 시간 이상 정성껏 마사지를 하고 약을 먹이고 테이핑을 다시 해줬다.

그런데 마사지를 하고 관리를 해준 유세프의 발목 붓기가 놀랍게도 얼마 후 싹 빠져 정상적인 발목으로 돌아갔다. 나도 겉으론 표현은 안하고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만 지었지만 사실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그걸 본 다른 참가자들의 마사지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야!'

대회 나가서 마사지숍을 열면 대박 날 것 같다는 감이 온다. 하지만 문제는 그 친구에게 테이프를 사용하니 다음에 내가 사용할 테이프가 없어졌다는 거. 결국 테이핑을 못하고 달렸던 마지막 날 롱데이에서 무척이나 고생했다.

 쿠웨이트의 유세프를 치료해 주는 필자

쿠웨이트의 유세프를 치료해 주는 필자 ⓒ 김경수


 캠프 위로 비행기가 지난간다. 마치 문명 세계와의 조우 같았다.

캠프 위로 비행기가 지난간다. 마치 문명 세계와의 조우 같았다. ⓒ 유지성


10년 전엔 '코리아'라고 하면... 격세지감

이번 대회에 한국인은 필자를 포함해 총 4명이 참가했다.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참가국이었는데 주최측도 놀라고 선수들도 놀라워 했다. 내가 처음 참가할 당시인 10년 전에는 아시아 참가자는 무조건 일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왔다 하면 별종 취급을 받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처음 참가한 사하라에서 유럽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넌 어디서 왔니?"
"프랑스,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코리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인간들 서로 눈치를 본다. 누군가 말을 꺼낸다.

"음... 한국이 어디 있어?"
"이런 무식한 것들 한국도 몰라, 월드컵 열리는 곳이잖아."

잠시 생각을 하더니 누군가 이야기한다.

"아! 알아 알아 타일랜드!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거야. 하하하."
"야! 너희들 진짜 무식하다, 어떻게 코리아도 모르냐?"

나는 순간적으로 열이 받아 주변에 있는 참가자들에게 무식한 것들이라 말을 했다. 그러자 한 명이 상당히 미안한 얼굴로 마지못해 이야기한다.

"노스 코리아!"
"우씨!"

10년 전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오지 레이스에서 참가자 1위 아시아 국가는 단연 한국이다. 대회당 10명 이상 많으면 20명 이상 참가를 하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과 함께 우리의 위상도 많이 올라갔다. 또 최근에는 한류와 더불어 한국사람들의 인기도 덩달아 뛰고 있다. 몇 년 전 가장 텐트 메이트를 삼고 싶은 나라 사람을 뽑는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이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아름다운 코스가 연속으로 펼쳐졌다.

아름다운 코스가 연속으로 펼쳐졌다. ⓒ 유지성


 물을 건너는 한국참가자 김혜진씨.

물을 건너는 한국참가자 김혜진씨. ⓒ 유지성



 젖은 신발을 말리는 모습. 이러다가 신발 태워 먹고...

젖은 신발을 말리는 모습. 이러다가 신발 태워 먹고... ⓒ 유지성



 단지 5일만에 신발의 수명이 다했다.

단지 5일만에 신발의 수명이 다했다. ⓒ 유지성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이게 '번데기'의 힘

호주 아웃백 레이스를 전반적으로 봤을 때 2번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첫번째는 대회 3일 이후 벌어진 선수들의 대회 거부 사태. 두번째는 번데기 사건이다. 바로 번데기로 인해 한순간 찢어져 있던 선수들이 하나로 뭉치게 됐다.

내용은 이렇다. 주최측이 프랑스이고 프랑스 참가자가 제일 많다 보니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 두 그룹으로 나눠졌다. 결국 따로 따로 노는 불화합의 조합으로 진행되는,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있었다.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선수들과의 불협화음은 또 다른 장애다. 그런 부조화는 여러 대회를 나가봐도 유난히 프랑스 사람들이 좀 심한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분위기를 흐리는 주범이었다.

대회 5일째였다. 그날은 대회 6일째부터 마지막 날까지 먹을 식량과 용품을 보급 받는 날이라 먹거리가 좀 풍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 시간에 모닥불 주위로 몰려든 참가자들 사이로 번데기를 끓여 먹는 놀라운 광경을 연출했다. 또한 미리 준비한 소주도 한 병 따서 전체 참가자들에게 돌렸다.

처음에는 거북해하던 참가자들이 고농축 단백질이라고 설명한 번데기와 한국의 대표적 위스키라  포장한 소주를 한 입씩 받아 먹고는 눈이 번쩍 뜨이며 환희의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한국의 비빔밥은 고기 위주의 건조식품으로 입이 건조해진 그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맛으로 다가갔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나눔은 서로의 마음을 여는 작지만 가장 효과적인 무기다. 더불어 굶주림과 피로에 찌든 마음과 육신을 달래주는 맛들어진 음식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는 매개체다. 참고로 번데기는 잘 끓여서 따뜻한 국물과 함께 먹어야 제 맛이다. 작은 번데기 하나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위 아더 월드'로 묶어주는 행복 전도사 역할을 했다.

 전세계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준 번데기

전세계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준 번데기 ⓒ 유지성


덧붙이는 글 월간 <아웃도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호주 아웃백 유지성 오지레이스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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