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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본이 돋보이는 영화

[고지전]이라는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책을 좋아해서 그런지 극본에 눈길이 갑니다. 극본을 쓴 박상연 작가의 프로필을 보면 영화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박상연 작가는 [공동경비구역JSA](2000), [화려한 휴가](2007) 등의 영화에 극본을 썼고, [로열패밀리], [선덕여왕]의 극본을 맡았습니다. 요즘말로 '흥행제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키피디아 사전을 보니, 1996년 민음사에서 출판하는 잡지《세계 문학》겨울호를 통해 장편 소설 데뷔를 했습니다. 이후 소설뿐 아니라 영화각본 작가, 텔레비전 드라마극본 작가, 집단 창작 크리에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오고 있습니다. 소설가, 드라마 작가, 영화작가라는 이력을 엮어내 빼어난 작품성을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고지전]의 기본컨셉은 [웰컴투 동막골]이 가지고 있는 반전 메시지입니다. [웰컴투 동막골]의 주연 신하균이 이번 [고지전]에서도 주연을 맡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죠.[웰컴투 동막골]은 아무도 찾지 않는 산간 오지 [동막골]에 인민군과 국방군의 낙오병이 조우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동막골]의 모티브는 [고지전]에서는 은밀한 공간인 '동굴'로 표현됩니다. 북한군과 국방군이 소통하는 묘한 중간지대입니다.

[고지전]에 노자, 시뮬라시옹, 까탈로니아의 메시지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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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에서 가장 돋보이는 메시지는 '노자'의 생명사상입니다. 머리를 취하지 않고 배를 취하며, 관념을 취하지 않고 생명을 취한다는 메시지는 이 영화의 주제와 같습니다.

온갖 색깔이 사람 눈을 멀게 한다. 온갖 소리가 사람 귀를 멀게 한다. 온갖 맛이 사람 입을 상하게 한다. 사냥질로 뛰어다닌다는 것이 사람 마음을 미치게 한다. 얻기 힘든 보화가 사람으로 하여금 덕행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러므로 성인은 배를 위하되 그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잡는다. (<노자 강의> 중)

영화 도입부에 동원된 학생들이 '북진통일' 현수막을 들고 다니며 호전적인 구호를 외치는 장면은 전쟁의 최전선과 묘한 괴리감을 보입니다.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사람의 처지와 책상 위에서 명령하는 자들, 말 섞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공허함이 몇 개의 컷으로 능숙하게 그려집니다. 적의 정보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본부에서 내리는 사수명령을 악어중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영화를 보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들고 싶은 작품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입니다.시뮬라시옹은 영어로 시뮬레이션(simulation:가상현실)인데, 가상현실이 현실을 집어삼킨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즉, 시뮬라르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지칭하고 이것은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영화 [고지전]에서는 '가상'과 '실제'가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며 파국을 향합니다. 특히 마지막 반전에서는 '가상'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을 때의 비참한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세 번째로 의미 있는 작품은 조지 오웰의 [까탈로니아 찬가]입니다. 특히 어떻게 적군들끼리의 소통이 가능한지 의심이 된다면 이 작품을 읽어보세요. 작가인 조지 오웰의 자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작가가 1936년 겨울부터 37년까지 통일노동자당의 민병대로 직접 참전해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과 맞서 싸운 이야기를 소설의 형식으로 증언하는 작품입니다. 작품에 따르면, 스페인 내전에서 실제로 전쟁을 하는 것은 파시스트와 반 파시스트군이 아니라 언론들입니다. 실제로 참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고지전]과 흡사한 장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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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주에 걸친 이 기간 동안 우리 전선에서는 딱 한번의 공격이 있었다.. 그 의용군을 이끌던 대위는 원래 정규군 장교 출신으로 그 충성심이 의심스러웠으나, 정부 측에서는 그를 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겁이 나서 그랬는지 배반을 하려고 그랬는지, 그 장교는 2백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수류탄을 던짐으로써 파시스트들이 대비할 태세를 갖추게 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부하들이 현장에서 그를 사살해 버렸다. 그러나 기습효과는 사라져버리고, 의용병들은 적의 맹공에 쓰지며 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 까탈로니아 찬가, 제6장 일부

현장과 탁상의 실상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간파한 손무(손자)는 "장수가 전쟁에 나가면 군주의 명령을 듣지 않는 수도 있다"는 전쟁원칙을 세웠습니다. [고지전]의 문학적 벤치마킹 대상은 [까탈로니아 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3개의 고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고지전]은 전쟁에 관한 성숙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며, 인문학적 사유가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극본을 쓴 작가의 인문학적 내공을 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많은 생각과 다른 작품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면, [고지전]은 좋은 영화입니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고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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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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