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내일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거 하나는 확신한다.
내일 너희들이 들어 올려야 하는 무게는
너희들이 지금껏 짊어지고 살아온 삶의 무게보다
훨씬 가볍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여중 역도부의 실화를 소재로 했던 영화 '킹콩을 들다' 중에서

정규수업이 끝난 지난 오후 3시 30분.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11명의 천안 성환중학교 역도부 아이들은 비를 피하기도 하고 맞기도 하면서 왁자지껄 낡은 조립식 건물 체육관으로 모여 들었다. 넓지 않은 연습장은 빗방울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 아이들의 호들갑 소리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젖은 교복을 서둘러 체육복으로 갈아 입으려고 '감독실'이라 써있는 작은방으로 몰려 들어가 낡은 캐비넷 앞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어젖힌다.

이들 중에는 여자 아이도 하나 끼어있다. 이름은 김지혜. 기자가 2005년 처음 만났던 초등학생 지혜는 어느덧 중2가 됐다. 키는 벌써 아버지와 비슷한 164㎝나 된다.

중학교 1학년 때 도 대회 나가 금상 싹쓸이 한 '소녀역사'

오늘도 맹훈련 중인 역도 꿈나무 김지혜 양. 지혜는 내년 전국 학생 신기록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오늘도 맹훈련 중인 역도 꿈나무 김지혜 양. 지혜는 내년 전국 학생 신기록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이진희


2005년 당시 지혜의 아버지 김명승씨는 몸 전체가 종합병동이라 할 정도로 불편한 상태였다. 진단서에 나온 병명만 결핵성 늑막염, 출혈성 위궤양, 요추부 염좌, 간경화, 원인이 명확치 않은 손발마비 등이었다.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몸 상태를 가졌고 기초생활수급대상자였던 그. 지금도 상황이 그때보다 그리 나은 편은 아니다.

허리 디스크가 터져 수술을 받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몸을 가누기가 더 어렵게 됐다. 내년쯤에 재수술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혈액종양에 걸렸다가 완치한 뒤 풍에 걸렸던
김명승씨의 어머니는 이후 치매에 시달리시다 2010년 2월 요양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요양병원에 어머니가 들어가시고 난 다음에는 지혜와 함께 밀양, 평택, 구미 등을 떠돌아 다니며 살았다. 가끔씩 전화로 안부를 전하곤 하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바로 올해 6월이다.

몸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김씨는 지혜의 소식을 전하며 한참이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조그맣던 지혜가 어느덧 미래가 촉망되는 여자 역도의 기대주로 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하체가 튼튼했던 데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다 보니 몸은 운동선수로 부족함이 없었죠. 운동을 시켜봐야겠다 생각하다가 역도에 관심을 갖게 돼 경북 구미에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게 됐어요. 근데 이 녀석이 중학교 1학년 때 경북 도 대회에 나가 금상을 3개나 따온 것이에요. 유례가 없던 일이랍니다."

여자 역도 꿈나무로 한창 기대를 모으던 지혜는 아버지와 함께 올해 천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가 하던 일이 어려워져 더 많은 빚을 지게 된 것이 주 원인이다. 구미에서 지혜가 다니던 학교와 경북교육청은 지혜와 명승씨를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고 했지만 그의 강력한 귀향의지를 끝내 막지 못했다.

천안으로 이사 와서 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지혜는 유년시절을 보낸 기억 때문인지 구미에서보다 더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역도를 하다 보니 눈에 띄는 것은 운동선수다운 대단한 식사량. 하지만 지혜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손사래다.

"아이~ 저 요즘 그렇게 많이 못 먹어요. 그저 고기 5인분에 밥은 한 공기만 먹는 정도라니까요."

"지혜는 역도 쪽으로는 타고 났죠"... 2012년 전국 학생 신기록이 목표

지혜는 올해 열린 전국소년체전 여자 역도 75㎏ 이하급에서 2등상 3개를, 얼마 전 아산에서 열린 전국역도선수권대회 여자 69㎏ 이하 급에서 2등상 3개를 수확했다. 전국대회 또래 최강급인 지혜가 등장하면서 학교와 시·도교육청은 물론 천안시도 한껏 기대치가 높아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아버지와 한 컷. 지혜의 꿈은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 아버지와 한 컷. 지혜의 꿈은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 이진희

"지혜같은 아이들이 국가대표가 되는 케이스죠. 역도 쪽으로는 타고 났다고 할 수 있어요. 요맘때 아이들은 보통 1년에 15~20㎏씩은 더 들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거든요.

올해도 잘했지만 내년에는 라이벌조차 없는 상황이어서 부상만 없다면 무난히 전국 1등을 차지할 거예요. 순발력은 약간 떨어지지만 하체 힘이 남자애들 만큼이나 좋아 더 잘할 거라고 보고 있답니다."

지혜를 가르치고 있는 코치의 말이다. 소년체전에서 올해 지혜가 들어올린 무게는 인상에서 75㎏. 용상에서 93㎏다. 용상과 인상 모두 잘하는 편이다보니 2012년에는 전국 학생 신기록도 가능할 전망이다.

"지혜는 불안정하고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운동을 통해 보다 나은 미래, 자신의 꿈을 향해 착실히 한발한발 내딛고 있는 중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그런 표가 잘 나기도 하는데 이 녀석은 잘 웃죠. 아니 너무 웃어서 탈이에요. 요즘은 아주 머리에 빗을 붙이고 다닐 정도로 멋을 부리는데 사춘기를 잘 극복하고 운동에 전념해 제 꿈을 잘 실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코치의 바람이다. 지혜에게 역도가 왜 좋은지, 또 바라는 점은 없는지 물어 보았다.

"특별한 매력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재미 있어요. 그냥…. 바라는 건 훈련장에 여성용 탈의실, 화장실, 샤워실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빠가 잔소리를 너무 많이 하세요. 조금 줄여주시면 더 좋겠어요(웃음)"

올해 9월말 쯤 천안 유관순체육관에는 역도 훈련장이 생길 예정. 지혜는 이제 자신의 꿈과 주변의 기대를 하나하나 충족시켜 나갈 작정이다. 미래의 '장미란'을 기대해도 좋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시사신문 677호에도 송고했습니다.
이진희 천안 충남시사신문 성환중 희망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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