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영화 포스터

▲ 모비딕 영화 포스터 ⓒ 김준식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상상의 자유가 허락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상상이 지나치면 공상이 되고 망상이 되지만 영화적 상상력은 대부분이 금지되거나 불가능한 현실의 한계를 가볍게 넘는 자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모비딕>을 관통하고 있는 제재인 음모론은 실제보다는 상상에 가깝다. 음모론은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을 상상으로 재창조해내는 영화와 매우 닮아있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 영화의 재료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 <모비딕>은 엄격히 말해 음모론 영화는 아니다. 영화사에서는 마케팅 수단으로 음모론을 내세웠지만 음모론 냄새가 살짝 묻어나는 정도의 사회극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90년대 초반의 사회 분위기에 '기자'라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우리 사회의 수면 밑을 보여 주려고 한 감독의 의도는 충분히 수긍하지만 조금은 약한 스트리보드, 음모론에만 무조건 기대고 있는 부족한 영화 속 캐릭터 묘사, 가끔씩 음모론을 무색케 하는 등장인물 등은 영화의 주제의식과 긴장도를 느슨하게 한 면이 있다.

 

지금도 빈번하게 이용되고 있는 '북한'이라는 정치적 도구 혹은 장치가 우리에게 주는 역설적 위약효과는 여전히 대단하다. 하물며 90년대 초반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교량이 폭발하고 용의자는 죽고 살아남은 용의자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한다. 가까이 있는 놀이공원을 대상으로 한 테러이며 배후는 북한이다. 흠 잡을 곳 없는 완벽한 각본이다.

 

검찰총창의 대국민 성명을 통해 이것은 사실이 되고 정부는 대북 이념화 공세를 벌이며 내부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한다. 하지만 완벽함 뒤에는 반드시 완벽한 허점이 있다. 바다를 운항하는 배의 조타키를 닮은 로고를 쓰는 집단에서 유출된 자료가 어찌하여 주인공에게 전달되고 그 배후에는 엄청난(실제로는 별로 엄청나 보이지 않는)음모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흰 고래는 이 바다 어디엔가 반드시 있다.

 

영화의 시대공간인 90년대 민간인 사찰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의 덜 진보된 통신수단과 장비들 때문에 많은 인력들이 필요했고 그 많은 사람들 탓에 사람들의 관계는 서로 얽히고설키게 마련이다. 처음에 사회극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인데 이 영화에서 윤혁(진구 분)은 그러한 인간관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비롯된 에피소드와 인간관계가 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룬다. 나름대로 거대한 음모의 집단에서 빠져 나온 윤혁을 통해 그 음모를 역추적해가는 사회부 기자 이방우(황정민 분)가 마지막에 뿜어내는 분노는, 연기자의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동시대를 호흡해 본 경험 때문인지 충분히 동의할 만 했다.

 

그리고 꿈이라는 장치를 거쳐 물속에서 주인공이 거대한 무엇(고래)을 보는 시퀀스는, 감독이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영화의 주제를 관객에게 보여주려는 하는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허먼 멜빌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것도 매우 기발했다. 동시에 조타 키를 음모론의 상징으로 잡은 것 역시 참신한 아이디어로 생각된다. 실제 소설의 살아남은 화자 이슈멜(이스마엘)이 이방우로, 죽은 손진기를 선장 에이하브로 선긋기를 하는 것이, 영화 제목만 놓고 본다면 전혀 엉뚱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나의 생각은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정치하는 사람들이 있는 장을 말할 때 우리는 '정치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판'의 속뜻에는 싸움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왜 싸우는가? 당연히 권력 때문이다. 권력의 속성은 절대 양분될 수 없고 동시에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정치판은 살풍경하고 피아의 구분이 없다. 따라서 언제나 속이고 배신하며 또 연대하기도 하는 이율배반과 음모가 그 속에 있다.

 

반면 정치의 대상인 보통 사람들은 정치가들보다는 덜 배신하고 덜 이율배반적인 삶을 산다. 왜냐 하면 보통의 우리에겐 싸워서 가져야 할 권력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거대한 음모따위도  없다. 음모가 없는 우리가 이런 음모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무서움 혹은 슬픔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본 후의 느낌은 왠지 모를 슬픔이며 약간은 불쾌한 무서움이다.

 

배우 황정민의 연기는 <구르믈버서난달처럼><그림자 살인>에서 이미 느꼈던 편안함이다. 배우의 연기가 편안하다는 것은 배우 스스로 그 역에 충분히 몰입해서 정말 그 사람이 된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다. 김상호 역시 언제나 자신의 배역에 충실한 배우인 것 같다. 그리고 또 한사람 정만식(행동대장으로 분)이다. 악역이 살아야 영화가 산다는 것을 보여주듯 악역이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짧고 간결한 대사, 건조한 표정, 잔인한 행동 등이 영화에 생기를 주고 있다.

2011.06.15 16:20 ⓒ 2011 OhmyNews
모비딕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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