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를 낳은 것은 2월 말이었다. 한 달 정도 몸조리를 마치고 나니 결혼 후 처음 맞는 내 생일이었다. 생일 이틀 전, 근처에 살고 계신 시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내 생일날 일찍 아침 드시러 우리집으로 오시겠다는 것이었다.

결혼하자마자 임신을 했고, 거기다가 전치태반으로 임신 기간 거의 대부분을 집안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 지낸 데다가 이제 막 몸조리가 끝난 처지인데도 뭐가 그리 어려웠는지 아무 소리도 못했다. 그리고 이틀 동안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아기 돌보면서 남편은 집안 정리하느라, 나는 못하는 음식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생일날 아침 일찍 상을 차려놓으니 시어머니가 오셨다. 밥상 앞에 앉아 하시는 말씀.

"나는 아침 먹었으니까 너희들이나 어서 먹어라. 이래야 니 생일에 니가 밥이나 제대로 먹을 것 같아서 그랬다."

시어머니는 정말 그러면 내가 감사히 여길 거라고 생각하셨을까. 그날 이후 나는 남편에게, 말귀 알아듣게 된 다음에는 아이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다. 밥 안하게 해주는 게 생일 선물이라고. 그렇다고 20년 동안 내내 생일날 밥을 안 해 먹은 건 아니다.

영화 <퍼즐>은 사람들이 여럿 모인 파티로 시작한다. 끊임 없이 새로운 음식이 나오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음식을 만들고 나르는 건 한 사람뿐이다. 바로 이 집의 주부인 '마리아'다.

그런데 무슨 파티인가 했더니 마리아의 50회 생일 파티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위해 주인공이 그 많은 음식을 만들고 생일 케이크까지 구워냈던 것.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데, 그래도 마리아는 별 불만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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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뒷설거지를 하며 선물을 뜯어 보니 '조각 그림 맞추기'(jigsaw puzzle)가 있다. 마리아는 깨진 접시 조각도 잘 맞추는 사람이니, 흥미를 느낄 수밖에. 그 때부터 마리아의 퍼즐 인생이 시작된다.

잘 맞추니 점점 더 재미를 느끼게 되고 식구들이 없는 시간이나 밤 늦은 시간까지 퍼즐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들른 퍼즐 가게에서 '퍼즐 대회에 함께 나갈 파트너를 구한다'는 광고를 본다.

남편과 두 아들에 집안 살림 밖에 모르는 마리아. 식구들 먹을 것 만들고, 빨래 해서 널고, 집안 청소하고... 그렇게 살아온 마리아의 일상에 변화가 찾아온다. 퍼즐 파트너를 찾아 가 퍼즐 연습을 시작하게 된 것.

퍼즐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고,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함께 몰입해 퍼즐을 맞추고, 차를 나누어 마시고, 퍼즐을 완성했을 때의 짜릿함을 공유하면서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런 생활을 식구들은 미처 눈치 채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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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퍼즐 대회에 나가기로 했다고 털어놓으니 식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이다. 특히 남편은 기가 막히다는 듯 쉬지 않고 웃음을 터뜨려 마리아에게 상처를 준다. 어쨌든 마리아는 퍼즐 대회에 출전해 중간에 위기를 겪지만 결국 해낸다. 그러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독일 세계대회 출전 자격과 비행기표는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일에 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하니까.

퍼즐 파트너와의 미묘한 감정 교류, 남편과의 뭉근한 정, 독립해 따로 나가 살 준비를 하는 큰아들, 여자친구와 인도로 떠날 준비를 하는 작은 아들 등등 영화는 마리아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오가며 잔잔한 듯, 그러나 수없이 많은 감정의 갈래들을 만들어낸다.

퍼즐 대회가 끝나고, 퍼즐 파트너와도 헤어지고, 아들은 이사를 나가고, 마리아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지만 그는 이제 예전의 그가 아니다. 퍼즐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었고, 자기 안에 있는 열정과 호기심과 도전과 말로는 다 표현할 길 없는 감정들을 확인했으니까.

물론 가정을 떠나거나 기존의 관계를 재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도 모를 마리아만의 변화가 있다. 조각 조각 나뉘어 있는 퍼즐을 끼워 맞춰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하는 것처럼, 인생 역시 각기 다른 그림과 모양의 조각들이 끼워맞춰지면서 전체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

그 조각들은 사람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으며, 관계일 수도 있고, 나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 모든 것이 모여 나를 이루고 내 인생을 이룬다. 50년 마리아의 인생에서 남편과 아이들과 가정이 전부가 아닌 것은, 미처 눈을 돌리지 못했을 뿐 삶이 워낙 복잡하고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아는 퍼즐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마리아가 홀로 찾은 들판에서 보인 얼굴은 그래서 처음과는 좀 다르다. 미세하지만 확실한 변화가 있다. 그것이 퍼즐과 퍼즐 대회 우승으로 인한 성취감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뜻하지 않은 만남이 가져다준 새로운 경험에서 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마리아의 얼굴은 맑고 파란 하늘, 밝은 햇살 아래서 빛난다. 그가 새로 손에 쥔 조각 그림은 무엇일까... 그 조각은 인생 전체 그림 어디에 딱 들어맞는 조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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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퍼즐 Puzzle (아르헨티나, 프랑스 / 2009> (감독 : 나탈리아 스미르노프 / 출연 : 마리아 오네토, 가브리엘 고이티, 아투로 고에츠 등) * 제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4/7~4/14)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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