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1988년 11월 23일, 삼성과 롯데가 김시진과 최동원을 맞바꾸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통산 최다승 투수와 통산 최다탈삼진 기록을 가진 최고액연봉의 투수가 서로 유니폼을 바꾸어 입게 된 사건이었다(자세한 내역은 롯데의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이 삼성의 김시진, 허규옥, 오대석과 맞바꾸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팀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다가 기자들의 전화세례를 받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시진과 최동원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 경우에는 … 아무래도 한국시리즈 여파 때문인 것 같습니다. 30년간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가물가물합니다." (김시진)
"트레이드는 구단의 고유권한이어서 구단에 대해 섭섭한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성원해 준 부산 팬들을 떠나려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최동원) - 경향신문 1988. 11. 23일 자

그러나 충격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한 달여 뒤인 1988년 12월 20일, 이번에는 롯데의 김용철과 이문한을 삼성으로 보내고 삼성의 장효조와 장태수가 롯데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다는 내용의 트레이드가 발표되었다. 물론 트레이드의 축은 통산타율 .350에 48홈런 305타점을 기록하고 있던 '타격의 달인' 장효조와 역시 통산타율 .289, 87홈런 365타점을 기록하고 있던 강타자 김용철이었다. 

삼성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 '롯데의 심장'이 아니라 '롯데 그 자체'였던 최동원은 삼성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 7승 7패만을 기록한 채 쓸쓸히 사라져갔다

▲ 삼성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 '롯데의 심장'이 아니라 '롯데 그 자체'였던 최동원은 삼성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 7승 7패만을 기록한 채 쓸쓸히 사라져갔다 ⓒ 삼성 라이온즈



호적에서 파내지는 아픔으로, 트레이드를 감수하다

1982년에 지역연고제를 기반으로 출범한 프로야구는 각 구단에게 연고지 출신 선수에 대한 독점적인 선발권을 무제한으로 보장해주고 있었다. 연고지 우선지명권이 '무제한'에서 10장으로 줄었던 1986년에도 2차 지명을 통해 선발된 다른 지역 출신 선수는 7개 구단을 통틀어 3명에 불과했다. 각 지역의 프로야구단에 본격적으로 외지인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 것은 1차 지명권이 3장으로 축소된 1987년에 이르러서부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문호가 개방되고 외지인들이 각 팀에서 의미있는 비중을 차지하면서, 문화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또 다시 십여 년이 흐른 뒤였다. 그래서 최소한 80년대와 90년대에 프로야구팀이란 각 지역의 야구명문 몇 개 학교의 동문연합팀이었고, 그 지역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팀이었으며,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타향살이를 하는 선수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프로원년에 불과 15명을 데리고 창단식을 치러야했던 해태는 임정면, 조충열, 김경훈, 홍순만 같은 타지 출신 선수들을 해당 연고구단의 양해를 얻어 데려다가 채워 넣어야 했다. 그 해 1할대 승률에 허덕이며 프로야구 전체의 존립을 위협한 꼴찌 삼미는 이듬해 우승팀 OB의 양해를 얻어 이선웅과 정구선이라는 국가대표 야수를 받아들인 것을 비롯해 정구왕, 김대진, 최홍석 같은 선수들을 얻어 써야 했다.

당시 '트레이드'라는 것도 없지는 않았다. 1983년 고향 팀 삼성에서 오대석이라는 벽에 막혀 만년 후보신세가 될 처지였던 서정환이 직접 프론트를 찾아가 '나도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요'라며 애원한 끝에 해태로 건너가 무주공산이던 주전유격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출발점이었다.

그 이듬해인 1984년에는 '굴러 온 바위' 장명부의 견제를 못 이긴 인천의 '박힌 돌' 임호균이 부산으로 쫓겨가는 일이 있었고, 다시 한 해를 지낸 1985년에는 선수단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청룡이 이해창을 삼성으로 보내고 이름값 높던 왼손투수 이선희를 받아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선수나 구단의 필요에 따라 남는 부분을 잘라내 선심을 쓰거나 거래하는 식이었고, 구단과 주요선수와 지역과 지역민이 하나로 연결되는 구도 자체가 흔들리는 경우는 없었다.

최동원과 김시진의 트레이드가 충격적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최동원은 그대로 롯데 자이언츠였고, 부산이었고, 부산사람이었으며 김시진은 그대로 삼성 라이온즈였고, 대구였으며, 대구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최동원과 그 김시진이 자리를 맞바꾸자 사람들은 '삼성 자이언츠'와 '롯데 라이온즈'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더 집요하게 표현해보자면 부산 라이온즈와 대구 자이언츠이기도 했다.

부산 '라이온즈' vs 대구 '자이언츠'

롯데는 해마다 연봉싸움에서 질기게 버티며 '물을 흐리는' 데다가 선수회까지 만들겠다고 앞장섰던 골칫거리 최동원을 처분하고 싶었고, 우승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독한 선수'라고 판단했던 삼성은 김시진을 내주고라도 최동원을 가지고 싶었다.

매번 한국시리즈 우승의 문턱에서 걸려 넘어지던 삼성으로서는 최동원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거둔 4승이 김시진의 통산 111승보다 훨씬 무게있는 기록으로 여겨졌다. 김시진은 한국시리즈에서만큼은 그 때까지 7연패만을 기록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회심의 트레이드는 두 팀과 두 선수, 그리고 두 팀의 연고지 팬들 모두에게 만족이 아닌 상처만을 안겨 주고 말았다. 아직 너무나 단단하게 붙어있던 서로의 머리와 심장을 떼어내 바꿔 끼워 넣는 어설픈 수술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동원은 구단의 고유권한인 트레이드 결정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유권한인 새 구단과의 계약을 거부하며 버텼다. 조건은 엉뚱하게도 롯데 박종환 단장의 퇴진이었다. 반면 김시진은 곧장 새 팀으로 옮겨 칼을 갈기 시작했고, 롯데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등판하던 1989년 4월 14일 OB와의 대전경기에서 자신은 절대 새가슴이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는 듯 14이닝동안 219개의 공을 던지는 오기를 발휘하며 완투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분노도 오기도 오래도록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김시진은 곧 4연패의 늪에 빠지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6월 말이 되어서야 삼성 입단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합류한 최동원은 준플레이오프 2차전과 3차전에 연달아 선발등판 했지만 모두 초반에 강판당하며 사상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태평양 돌핀스가 벌이던 자축연의 조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산의 팬들은 삼성의 유니폼을 입고 맞은편 더그아웃에 앉은 최동원이 눈에 띌 때마다 응원가 가사를 잊었고, 대구의 팬들은 롯데 유니폼을 입고 돌아온 김시진을 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섣부른 판단으로 성적도, 팬들의 호응도 모두 잃어버린 채 밀려드는 부산팬들의 항의전화에 질려버린 롯데의 단장과 사장이 정말 최동원이 삼성과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날 사표를 내야만 했다. 그것도 그해 트레이드가 몰고 온 후폭풍의 한 요소였다. 

그 시기 있었던 트레이드에서, 장효조와 김용철은 잠시의 충격을 딛고 일어서 다시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마무리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자와 달리 예민한 것이 투수였고, 그중에서도 자존심 하나로 존재하던 이름이 최동원과 김시진이었다. 김시진은 92년 중반까지 3년 반을 더 롯데에서 뛰면서 13승과 24패를 통산기록에 추가했고, 최동원은 두 해 동안 7승과 7패만을 더한 뒤 90년을 끝으로 옷을 벗고 말았다. 선수생명이 짧았던 시절이긴 했지만, 충격적인 트레이드가 막 서른을 넘어서던 두 전설적인 투수의 허리를 꺾어놓은 것이다.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김시진 삼성에서 6년간 111승을 올린 김시진은 롯데로 트레이드되면서 '아마도 한국시리즈 여파 때문인 듯 하다'며 착잡해했다.

▲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김시진 삼성에서 6년간 111승을 올린 김시진은 롯데로 트레이드되면서 '아마도 한국시리즈 여파 때문인 듯 하다'며 착잡해했다. ⓒ 롯데 자이언츠



비극적 트레이드, 허리 꺾인 두 에이스

각 프로야구단들이 연고지 안에서 마음껏 고를 수 있는 선수의 수는 3명에서 2명을 거쳐 1명으로 줄었고, 이제는 그나마 전면드래프트제가 도입되면서 옛날일이 돼 버렸다. 그래서 연고지와 구단의 연결관계는 상징적인 것으로 격하되었고, 구단과 선수의 관계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직장과 직원의 계약관계로 돌아갔다.

지금에야 누군가 트레이드 매물이 되었다고 해도 자신이 팀의 필수요원이 아니라는 서운함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뿌리 뽑힌다'는 위기감을 느낄 리 없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변화인지는 또 모르겠다. 개방화도 좋고 평준화도 좋지만, 그래도 야구가 제일 재미있는 것은 구단과 팬이 한몸이라고 느껴질 때가 아닌가 해서다.

최동원과 김시진은, 1988년 11월 23일 이후 다시는 고향 팀에 돌아갈 수 없었다. 선수로서도 그랬고 지도자로서도 그랬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최동원과 김시진이라는 이름에서 떨림을 느끼고, 그리워하고, 애틋해한다. 잘려나간 분신들에게서 20년이 넘도록 아픔을 느끼는 것, 기껏 공놀이 따위가 가슴에서 암세포처럼 번져버린 야구광들 이야기다.

최동원 김시진 김은식 야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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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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