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혜화,동>의 한 장면.

영화 <혜화,동>의 한 장면. ⓒ 비밀의 화원


버려지고 탈장된 채 헤매는 유기견을 쫓는 여자, 흔치 않다. 그도 모자라 방 안 가득 아프고 갈 곳 없는 개들을 데려다 보살핀다면 필시 남모를 사연을 간직했을 터다. 동물병원 애견미용사인 스물 셋 혜화는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유기견을 돌보고 또 엄마 없이 자라는 수의사의 아들을 보살피는 혜화의 일상에 파장이 인다. 혜화의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지는 이는 5년 전 사라졌던 연인 한수다. 유령처럼 혜화의 곁을 떠돌던 한수는 자신들이 낳았던 아이가 살아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혜화의 마음에 일었던 파문은 점차 거부할 수 없는 소용돌이처럼 커져만 간다.

영화 <혜화,동>(2월 17일 개봉)은 그때부터 5년 전에 있었던 혜화(유다인 분)와 한수(유연석 분)의 사연 속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고등학생이던 그들은 열렬히 사랑했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기 직전, 한수의 홀어머니가 그들의 결합을 반대하면서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 버린다. 그때 열여덟의 어린 혜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10대의 출산과 입양? 무책임했던 어린 부모의 자아 찾기? 한 영화평론가는 "아가들아, 제발 콘돔을 써요"라고 충고했지만, 17일 개봉한 이 영화 <혜화,동>은 형식과 주제 양쪽에서 그보다 훨씬 깊고도 넓은 세계를 열어젖힌다. 감히 쉬이 짐작할 수 없는 혜화라는 한 사람의 소우주 말이다.

겨울(冬)에 한 아이(童)를 만나 흔들리는(動), 스물 셋 혜화

혜화의 감정은 끊임없이 흔들린다(動). 제 새끼를 잃어야했던 어미의 아픈 심정은 열여덟, 스물 셋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다. 한수가 찾아 온 그 스물 셋 겨울(冬), 혜화 마음에 인 파장은 극대화된다. 그래서 결국 아이(童)를 만나고픈 혜화의 마음은 한수와 다른 듯 다르지 않다(同). 이렇게 다층적인 제목에서 감지되듯, <혜화, 동>의 가장 강렬한 드라마는 바로 혜화의 마음이요, 그것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憧)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혜화의 마음을 전달하는 형식은 쉼 없이 현재의 겨울과 5년 전 출산 전후를 오고가는 1인칭 시점의 회상(플래시백)이다. 지금보다 더 밝고 발랄했던 혜화는 우유부단한 한수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꽤나 순수하고 당돌한 소녀였다. 매끄러운 교차편집으로 밝혀지는 혜화의 과거는 관객들에게 그 슬픔을 전이시키기에 충분하다.

'슬픔'이란 단어에 신파를 짐작할 필요는 없다. 생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드라마는 '희로애락'을 적절히 안배할 줄 안다. <혜화,동>이 그런 경우다. 비록 혜화가 어린 나이에 아픔을 겪어야 했고, 관객들은 그 과거 속으로 초대되어 찬찬히 그 전말에 고스란히 동참하게 되지만, <혜화,동>은 어떤 일방적인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혜화가 죽었다고 생각한 아이와 떨어지는 순간, 눈물, 콧물을 짜내는 신파를 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편 <도둑소년>과 옴니버스 장편 <원 나잇 스탠드>로 주목받은 민용근 감독은 장편 데뷔작에서 범할 수 있는 감정 과잉의 우를 범하지 않는다. 세심하게 안배된 혜화의 심리묘사에 점차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한 섬세하고 절제된 묘사와 과거와 현재가 적절히 배분된 편집의 균형감은 혜화의 현재 시간에까지 적절히 녹아든다. 과연 10대에 아이를 잃은 혜화가 현재 겪어내는 심리는 어떤 종류의 것인지, 또 한수가 나타났을 때 그녀의 흔들리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러한 궁금증을 시종일관 놓지 않고 또 섣불리 결론내리지 않는 <혜화,동>은 감정에 관한 일종의 미스터리 영화라 불러도 무방해 보일 지경이다.

불완전한 인물들의 감정에 대한 성실한 묘사

 영화 <혜화,동>의 한 장면.

영화 <혜화,동>의 한 장면. ⓒ 비밀의 화원


'버려짐'의 정서는 <혜화,동>의 전편을 지배한다. 자신 또한 입양아인 혜화는 결국 자신이 아이를 생으로 이끌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렸을 터다. 그가 유기견에 집착하는 이유도 생명에 대한 남다른 끌림과 모성애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혜화는 한수에게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으며, 한 대학교수의 집으로 입양됐다는 사실을 듣고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사실 이러한 '버려짐'의 모티브는 주요 인물들의 불완전해 보이는 외형과도 연결되어 있다. 상처 입은 영혼이었던 혜화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군대에서 부상을 입어 절뚝거리는 한수 또한 홀어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자라났다. 혜화가 아들처럼 보살피는 수의사의 아들조차 어머니를 잃은 상태다.

그리고 그 중심엔 입양(됐다고 한수가 알려온)된 혜화의 아이가 존재한다. 심지어 혜화는 5년 전 다른 집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애완견과 그 새끼들에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다. 탈장된 유기견에 유달리 집착하며 찾아 헤맬 수밖에 없던 심리는 그러한 과거에서 기인한다.

<혜화,동>이 놀라운 순간은 그러한 혜화의 심리를 놀라운 호흡으로 전달할 때다. 여느 관습적인 클로즈업과 달리 카메라가 종종 혜화의 얼굴에 다가갈 때, 혜화의 미묘한 심리와 상처는 고스란히 스크린 너머로 전이된다. 영화란 장르에서 클로즈업이 얼마나 강한 정서적 휘발성을 지니는지 TV 다큐멘터리를 경험했던 민용근 감독은 신인답지 않게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공간 설정 또한 탁월하다. 현재의 겨울, 혜화가 유기견을 구조하고 또 찾아 헤매며 한수와 5년 만에 만나는 공간은 황폐한 철거촌이다. 버려짐의 정서를 공간적으로 치환하고, 또 역설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인 것이다. 공간과 인물의 정서를 과거와 현재의 교차 속에 스며들게 한 <혜화,동>은 이미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 감독상과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상을 비롯하며 '2011년의 영화'로 예견돼왔다.

<만추> 탕웨이에 비견할 만한 '혜화' 유다인

 영화  <혜화,동>의 한 장면

영화 <혜화,동>의 한 장면 ⓒ 비밀의 화원


후반부의 숨겨진 반전은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한수가 자신들의 아이라고 했던 교수의 딸을 유괴하기에 이른 두 사람 중, 영화는 물론 혜화의 시점을 따르게 한다. 경찰이 당도하기 직전, 길게 찍기로 묘사된 혜화가 아이를 씻겨주는 장면은 스물셋 혜화의 모성애를 극명히 표현하는 명장면이다.

그러나 아이의 정체가 밝혀질 때, 그리고 두 사람이 알지 못했던 5년 전 과거가 밝혀질 때, 고스란히 혜화의 감정을 따라갔던 영화는 궤도를 이탈하는 듯도 보인다. 누구는 반전으로, 또 누구는 혜화의 아픔을 승화시키려는 영화적 장치로 읽을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돌려져야 마땅할 듯 보인다.

그럼에도 결말부까지도 혜화의 혼란스러움과 또 안도감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유다인의 표정이다. 섣부른 감이 없지 않지만, <만추> 탕웨이에 비견될 만큼 '올해의 발견'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오롯이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혜화역의 유다인은 다층적인 감정을 흔들림 없이 연기하며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약간 비틀어 읽자면, <혜화,동>은 아픈 과거를 청산하는 과정을 정직하게 돌파하는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그건 해묵은 감정의 청산뿐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이행하지 못했던 과오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동반하고 있어서다. 교차상영을 포함 24개 스크린으로 소박하게 출발한 이 진심의 영화가 좀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래서다.

혜화동 유다인 민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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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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