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서 만난 늦은 가을, 이른 사랑 <만추>

작년 영화계 소식 중 가장 가슴 뛰게 했던 소식은 고전 영화의 리메이크였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이만희 감독의 <만추>. 두 감독 모두 한국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감독들이고 두 영화 모두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작품이다. 2010년 임상수 감독버전의 '하녀'가 이미 극장 개봉을 했고 이제 남아있는 것은 김태용 감독의 '만추'이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매니아 층을 확보했고 <가족의 탄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드러냈던 김태용 감독이라 그의 <만추>는 어떻게 나올지 상당히 기대되었다. 거기에 현빈과 '색,계'로 월드스타 자리에 오른 탕웨이까지 출연을 한다니 기대치는 최고조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 최고의 걸작으로 언급되는 전설적인 영화 <만추>의 리메이크 작이다.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과 김수용 감독의 <만추>에 이은 세 번째 리메이크 영화에 해당한다. 사흘의 휴가를 허가받은 모범수와 위조지폐범의 시한부 사랑을 다뤘던 원작이 이번에는 미국 사회에서 소외 받은 이방인들의 안타까운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와 그녀는, 그렇게 늦은 가을 이른 사랑을 만난다.

그와 그녀는, 그렇게 늦은 가을 이른 사랑을 만난다. ⓒ 보람엔터테인먼트 제작


만추를 보다? 만추를 느끼다!

영화의 스토리는 복잡하지도 않고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다. 약간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도 있겠지만 심오하고 철학적인, 무언가 대단한 것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살인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여자가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3일간의 특별휴가를 나온다. 버스에서 우연히 쫒기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 여자와 남자의 약간은 독특한 멜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스토리라인과 네러티브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것이다. 그저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는 영화이다.

김태용 감독은 "이야기보다는 배우의 연기를 중심으로 봤으면 좋겠다. 두 배우의 연기력에, 그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며 영화를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감상법이 될 것 같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왠지 영화에 자신이 없어서 두 스타 배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김태용 감독의 말이 옳았다. 이 영화는 스토리를 이해하기보다는 극중 인물의 감정, 그리고 영화 속 여러 이미지들을 그저 느끼고 감상해야하는 영화이다.

영화를 본다. 또는 영화를 읽는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 영화는 '영화를 느꼈다.'라고 하는 표현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시애틀의 황량하고 쓸쓸한 가을의 풍경. 그 속에 있는 한국인과 중국인. 그들이 그 속에서 만들어나가는 아주 독특한 멜로 영화. 보는 것이 아닌 느껴야 하는 영화. 느껴야 하는 영화이기에 글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싶어 이 영화에 대한 글은 쓰지 않아야 겠다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 영화의 잔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아있는 관계로 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흔히들 말하는 '앓이', '만추앓이'에 빠져버린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스산하고 황량한, 너무나도 쓸쓸해 보이는 시애틀의 풍경이었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들 외로울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영화 내내 따뜻한 햇살이 비친 적이 없다. 안개가 깔려있고, 채도가 빠져있는 듯 한 영상이 펼쳐진다.  모든 영화의 미장센은 영화의 분위기와 주인공의 심리와 함께 간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영상미 역시 주인공들의 외로운 심리상태를 표현해주는 듯 했다. 사랑에 상처받은 여자, 사랑 따위 날아가는 새나 줘버리라는 듯 자신을 파는 남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속은 외로운 두 남녀의 이야기이기에 황량한 풍경이 펼쳐지자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련하게 만들어버리는 마력을 선사했다. 그런데, 그런 풍경에 놓여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다.

주인공들은 시애틀에 있는 이방인이다. 김기영 감독과 김수용 감독의 리메이크와 달리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방인이라는 부분이다. 미국인이 아닌 백인이 아닌, 황인종의 이방인. 이들은 미국사회에서도 가장 소외받고, 인구 수도 적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영화는 원작과 달리 미국 시애틀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 속에 있는 주인공은 한국인이고 중국인이다. 그들이 어떻게 미국 땅에 살게 되었는지 친절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 곳에서 이방인이다. 약간은 서늘해 보이는 그 곳에서 주인공들의 심리를 표현하면서도 이방인으로서의 그들의 위치를 말해주는 영화의 미장센은 정말 탁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면서 미술이나 촬영이 참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엔딩 크레딧을 보니 대한민국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하는 김우형 촬영감독과 류성희 미술감독이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만추>의 영상은 은은하고 깊이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만추>의 영상은 은은하고 깊이있다. ⓒ 보람엔터테인먼트 제작


보통의 멜로영화가 남녀가 만나 서로를 오해하고 싸우고, 또는 육체적인 교감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 영화는 두 남녀의 정신적 교감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런 정신적 교감이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 중 첫 번째는 놀이공원에서 훈과 애나의 대화 장면이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대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놀이동산에서 어떤 남녀가 싸우는 장면을 함께 보고 있다. 그들은 그 남녀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남녀를 보면서 각자가 상상하는 대로 상황에 맞게 대사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자기 고백인 것이다. 자신의 감정,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서로 같은 것을 보면서 정신적 교감을 하며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훈과 애나가 서로 어떤식으로 마음을 전달하고 서로 교감하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이고,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두 번째 명장면 역시 그와 비슷한 맥락인데 중국말이라고는 하오(좋다)와 화이(나쁘다) 밖에 모르는 훈 앞에서 애나가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이다. 애나가 중국어로 말할 때마다 훈은 '하오'와 '화이'로 대답한다. 훈은 애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애나의 말에 '하오'와 '화이'로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훈은 애나의 모든 말을 이해하고 들어주는듯하다. 애나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소통이 불가능하지만 정신적으로 소통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관객은 애나의 이야기를 모두 다 듣게 된다. 애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훈은 그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두 사람. 그 둘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나가면서 정신적인 교감을 이루어 나간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소통이 되지 않는 것 같은 이 장면에서 정신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고 그로 인한 감동이 발생하고, 이후 두 사람이 소통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에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명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마음이 통하자마자 헤어지게 된 두 사람. 2년 후 애나는 출옥하여 훈과 재회하기로 약속한 장소에 가지만, 그때는 훈이 감옥에 있음으로써 어긋나버린다. 이때 영화는 훈의의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고 오직 애나의 모습만 보여준다. 다시 재회하기로 했던 그 장소에서 애나는 훈을 기다린다. 김태용 감독은 그런 애나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지 않고, 프레임의 한쪽에 무게중심을 주고 풀 숏으로 잡으면서 애나의 모습을 너무나도 외로워 보이게 만들었다.

 낮선 곳, 이방인,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방. 그러나 그 보다 훨씬 깊은 어떤 감정이 영화를 사로잡는다. 한국판 <비포 선라이즈>를 보는 느낌

낮선 곳, 이방인,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방. 그러나 그 보다 훨씬 깊은 어떤 감정이 영화를 사로잡는다. 한국판 <비포 선라이즈>를 보는 느낌 ⓒ 보람엔터테인먼트 제작


하오,하오,하오...

두 번째 명장면과 세 번째 명장면을 보면서 어쩌면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정신적인 교감과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애나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춘 영화인 듯 했다. 두 사람이 결국은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 보다는 마지막 장면에서 애나의 기다림을 롱 테이크로 보며주면서 관객들은 애나의 고독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되고, 애나가 감옥에 가게된 사연, 그녀의 과거 등이 훈에 비해 많이 언급되면서 관객에 애나에게 감정 이입을 하도록 영화를 만든다. 그 중 결정적인 것은 애나를 연기한 탕 웨이의 표정이다.

<색,계>로 반짝 스타로 끝나고 말지는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은 정말 큰 오산이었다. 탕 웨이는 몸과 표정으로 표현을 할 수 있는 배우였다. '늦가을'이라는 제목과 탕 웨이의 표정은 딱 들어맞았다. 세상에 대해 미련도 없고 세상을 등진 것 같아보였던,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던 애나가 훈을 만나면서 다시 사랑을 느끼게 되었지만 다시 만나자고 했던 장소에 갔을 때, 그 남자가 없었을 때의 그 아련함을 표현할 수 있었던 탕웨이 덕분에 이 영화가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금 영화에 대한 모든 관심과 초점은 현빈에게 맞춰져있지만,
영화를 보면 <만추>는 탕웨이의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영화에 대한 모든 관심과 초점은 현빈에게 맞춰져있지만, 영화를 보면 <만추>는 탕웨이의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보람엔터테인먼트 제작


감히 작년 PIFF의 최고작이라고 찬사를 퍼부어도 모자라지 않을 영화라고 말하고 싶고, 올해의 영화라고 이야기 하고 싶은 영화이다. 폭력과 자극적인 소재로 물들어버린 한국영화계에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고 주목할 만하다.

만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