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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여고 맞은편에서 54년째 수퍼를 하고 있는 정송녀(77·금잔디상회) 할머니는 말 그대로 김제지역 구멍가게의 산증인이다.
 김제여고 맞은편에서 54년째 수퍼를 하고 있는 정송녀(77·금잔디상회) 할머니는 말 그대로 김제지역 구멍가게의 산증인이다.
ⓒ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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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게… 가만보자, 스무살 초반부터 했으니까 올해로 54년 됐네. 하이구, 오래도 혔네, 겁나게 오래도 혔어."

김제여고 맞은편에서 조그만 가게를 하고 있는 정송녀(77·금잔디상회) 할머니는 말 그대로 김제지역 구멍가게의 산증인이다. 반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자리에서만 가게를 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당시를 살았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다 그랬듯 그 시절은 다들 굉장히 가난했다. 입을 것 먹을 것 제대로 챙기는 사람 많지 않았고 하루 세끼 다 먹는 게 소원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앞만 보고 갔지. 뭐 입에 풀칠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있었겄어. 바깥 양반은 학교에서 교사로 있고 나는 여기서 가게를 꾸려나갔지. 모든 게 귀하던 시절이라 닥치는 대로 팔았어. 옥수수도 쪄서 팔고 풀빵, 국화빵, 오뎅, 당면 잡채 등 팔 수 있는 것이면 머시든 다했지."

할머니의 가장 큰 자랑은 자녀들이다. 바쁘게 사느라 이것저것 교육에 신경을 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3남 2녀의 자녀들이 번듯하게 잘 자라 줬다. 좁은 방에서 공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서울대만 무려 3명이나 보냈다. 손자 손녀들도 서울대를 비롯해 명문대에 많이 입학했다. 할머니에게 이보다 더 큰 자랑거리는 없을 것이다.

"판 것도 많지만 도둑맞은 것도 많어. 정신없이 이것저것 만들고 팔고하다 보면 일을 마칠 때 쯤 이것저것 없어진 게 겁나. 어려운 시절이었으니까."

당시 경찰들은 수시로 불량 청소년들을 붙잡아 할머니 가게로 왔다. 절도범들에게 물건을 어디서 훔쳤느냐고 물어보면 금잔디상회를 말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머니와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단 한번도 구속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 내 자식 같고 그러잖아. 오죽하면 그랬겠어. 한번씩 꾸지람을 하기는 했지만 그 녀석들도 인생이 있는데 그러면 쓰겄어. 말 한마디라도 살갑게 하고 그러면 다시는 안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 지금도 가끔 물건들을 도둑맞고 그러는데 그러려니해. 그래도 가게해서 자식들 다 가르치고 집도 10채나 샀어. 다만 너무 한꺼번에 많이 훔쳐가면 찌끔 속은 상하데."

할머니도 한때는 꿈 많던 소녀였다. 학창시절 배구-야구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등 운동도 잘했고 리더십도 강해 모든 일에 적극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나보다 더 큰 급우를 앞에 두고 강 스파이크도 때리고 어지간한 공은 빠따만 휘두르면 안타였지. 지금 생각해도 운동신경은 참 좋았어."

백산초등학교 26회 출신인 할머니는 지금도 당시 급우들을 만나고 그런다. 당시는 학교 들어가는 나이들이 들쭉날쭉했던지라 80살이 넘은 동창들도 많다. 다만 세월이 세월인지라 작년에 만났던 동창생이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는 웬지 모를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내가 무슨 욕심이 있겄어. 그저 자손들 밥 안 굶고 어디 가서 욕 안 먹고 살고 우리 가게에 한번이라도 왔다간 사람들이 모두 잘됐으면 좋겄어. 내 나이가 올해 77이여. 럭키세븐이 둘이니께 행운이 겹겹으로 올거여."

많은 사연 속에서 억척스럽게 지내온 54년의 세월, 할머니는 지금도 자상한 웃음과 따뜻한 인정으로 손 때묻은 가게를 지키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디지털김제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54년째 수퍼, #서울대, #이승만정권, #반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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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디지털김제시대 취재기자 / 전) 데일리안 객원기자 / 전) 홀로스 객원기자 / 전) 올레 객원기자 / 전) 이코노비 객원기자 / 농구카툰 크블매니아, 야구카툰 야매카툰 스토리 / 점프볼 '김종수의 농구人터뷰' 연재중 / 점프볼 객원기자 / 시사저널 스포츠칼럼니스트 / 직업: 인쇄디자인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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