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날의 꿈 스틸컷

▲ 소중한 날의 꿈 스틸컷 ⓒ 연필로 명상하기

"나애리 나쁜 계집애"를 외치며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사춘기의 반항심으로 달렸던 하니는 마지막에 엄마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꿈을 응원해 주는 모든 이들을 위해 힘껏 결승점을 향해 달렸다. 그녀의 꿈과 함께 달렸던 어린 시절의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 <달려라 하니>의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이 무려 2편이나 상영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움도 있었지만 사실 걱정이 더 앞섰다.

 

왜일까? 마냥 즐거워만 할 수 없는 이 걱정들의 근원은? 수많은 세계적인 장편 및 TV애니메이션에 참여하며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한국이지만, 자국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만화는 어린이가 보는 것이란 편견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미약한 스토리, 자금부족, 인력부족 등 많은 이유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벽은 애니메이션을 만들든 만들지 않든 아무런 관심이 없는 현실과 한국 애니메이션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만든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완성도 문제였다.

 

이런 현실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기 대이상의 가능성을 보여준 수공예 애니메이션 한 편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났다. '연필로 명상하기'란 범상치 않은 이름을 가진 제작사가 만들고 있는 한국 장편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관을 들어서자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애니메이터들이 직접 사용했던 몽땅 연필을 관객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이 많은 관객에게 영화제 기간 동안 나눠줬을 그 연필을 받아 든 순간 그들이 쉽게 이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전해졌다. 그 동안의 노력들에 대한 결과물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상영이 시작되었다.  

 

<소중한 날의 꿈>은 주인공 이랑이 유일한 장기인 달리기에서 지고 좌절하던 중, 서울에서 전학 온 모든 것이 시시한 여학생 수민과의 우정, 첫사랑의 설렘을 안겨 준 철수를 통해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을 다시 꾸게 되는 성장담을 그린 작품이다. 제작사가 공개하고 있는 이 애니메이션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나 또한 이 시놉시스가 답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만으로 이 애니메이션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엔 많이 부족하다.

 

드디어 한국 애니메이션도 손맛이 나기 시작했다

 

소중한 날의 꿈 스틸컷

▲ 소중한 날의 꿈 스틸컷 ⓒ 연필로 명상하기

<소중한 날의 꿈>의 배경은 우리들이 지나왔던 70년대 옛 모습이다. 수업시간에는 핸드폰 문자가 아닌 쪽지들이 그들의 소소한 수다처럼 하늘을 나르고, 지금은 유치한 로맨스 장면에서 나오는 배경음악으로 친숙한 <러브스토리>가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그 시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 국민에게 인기를 얻었던 박치기의 왕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 경기와 드라마 <여로>가 버젓이 나온다. <소중한 날의 꿈>은 분명 우리 옛 모습을 통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소중한 날의 꿈>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직접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제작사가 이야기했듯이 순수 수공예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몇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관객들에게 의미가 전달되도록 해준다. 처음 애니메이션을 보기 전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섬세한 그림체 때문에 정말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그 장소에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예전에 나온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 이렇게 손맛이 뛰어난 작품은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소중한 날의 꿈>은 기대 이상의 탄탄한 스토리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늘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 해왔던 '스토리의 빈약함'을 넘어섰다. <소중한 날의 꿈>에서 무엇보다 기대 이상이었던 것은 적절한 코미디 요소를 함께 넣어놓았단 것이다.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려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다만 영화 후반부가 초중반부에 비해 내용이 지나치게 딱딱해지면서 코미디 요소가 사라지고 지루하게 전개되는 부분이 있었다. 초중반부 내용이 잘 정리되어 애니메이션을 보는 관객들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왜 이렇게 후반부가 정리되지 않았는지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직접 이상욱 PD에게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소중한 날의 꿈>은 내년 5월 개봉을 목표로 아직도 후반 작업을 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완벽하게 후반작업이 끝나지 않아서 영화 후반부가 초중반부와 달리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내년 정식으로 극장에 개봉할 완전한 편집판은 이런 아쉬움을 모두 다 수정해서 나올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더 커진다.

 

이랑 잃어버렸던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조금씩 찾아가다

 

소중한 날의 꿈 스틸컷

▲ 소중한 날의 꿈 스틸컷 ⓒ 연필로 명상하기

다시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돌아와서 주인공 이랑은 달리기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을 인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이랑에게 달리기에서 지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과 함께 존재감도 사라지게 만든 중대한 사건이다. 중고시절 우리 모두가 겪어 왔듯이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는 이유가 된다. 달리기와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진 이랑은 철저하게 타인이 된다. 즉 자신은 주인공이 아닌 관찰자가 되어 그저 주변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생각과 고민들은 들어주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소중한 날의 꿈> 중반까지 이랑의 이런 태도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옛 향수를 가득 담아서 일상들의 이야기로 끌어간다. 서울에서 전학 온 도도한 수민은 반장의 말이 진리였던 순진하기만 한 그 당시의 시골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동경의 대상에게 상처입고 울 줄 아는 친구다. 얼굴만 마주쳐도 얼굴이 붉어지고 좋아하는 이성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소년 철수는 주인공 이랑에게 입 냄새마저도 참아 줄 수 있게 만든 첫사랑이다. 그렇게 이랑의 주위에는 그녀의 고민이나 꿈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많은 일상들이 존재했고, 그들과 함께 지나간다 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랑에게 비행사의 꿈을 키워가는 청각장애인 철수의 삼촌이 등장하면서 그녀의 심리적인 상태도 변한다. '타인'에게서 '나'라는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달리기에서 1등이 중요한 것이 아닌 최선을 다했던 내가 더 소중하며, 우린 그 과정을 통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단 생각만으로 이랑은 정신적으로 성숙해간다. 참으로 식상해 보이는 주제겠지만 <소중한 날의 꿈>은 이 깨달음을 말로 하지 않는다. 과거에 존재했던 하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공룡의 발자국을 통해 깨닫게 만든다.

 

<소중한 날의 꿈>에서 하이라이트인 공룡신은 이랑 자신의 숨겨진 감정이 공룡으로 형상화되어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 장면을 통해 타인이어야 했던 그리고 타인인 것만 같았던 이랑이 '나'란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보고, 자신이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이미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라

 

소중한 날의 꿈 스틸컷

▲ 소중한 날의 꿈 스틸컷 ⓒ 연필로 명상하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라' 이것이 <소중한 날의 꿈>이 가장 잘 선택한 주제인 것 같다. 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는 그 누구보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기존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던 단점을 하나하나 장점으로 만들면서 정면 돌파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 같다. 마치 그들 스스로 '그래 1등은 될 수 없다. 하지만 즐기면서 나를 알고 성장한다면 1등도 그 이상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지 오래된 향수를 자극하는 그저 그런 성장영화로 이 애니메이션을 말하고 싶지 않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스토리가 약하고 뒷심이 부족하단 편견에서 <소중한 날의 꿈>을 제외시키고 싶다. 분명 개봉이 한참이나 남은 완전한 편집본이 아니라서 제작사나 감독 스스로 여전히 후반부 이야기에 갈등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완성본이 아닌 현재의 상태만으로도 그들의 열정이 전해져 오기에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이 느리지만 한 발자국 전진하고 있음을 보았다. <천년여우 여우비>를 통해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이 상업적으로 한 발자국 나아갔음을 느꼈다. 물론 관객들에게 기대 이하의 결과를 준 작품도 있었다. <소중한 날의 꿈> 단 한 편만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짐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 시작 전 나눠준 이 몽땅 연필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소중한 그들의 꿈이 현재 진행형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언젠가 그들의 꿈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어본다. 그리고 <소중한 날의 꿈>에 대한 마무리를 하기 전에 꼭 한 가지 더 칭찬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주인공 이랑의 목소리 역할을 맡은 여배우 박신혜다. 그녀는 완벽히 인물에 일치되는 목소리를 통해 이랑이란 캐릭터가 영혼을 가진 인물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 애니메이션의 숨은 수훈갑은 바로 박신혜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소중한 날의 꿈> 마지막 글은 응원 글로 마치고자 한다.

 

"지금도 긴 연필이 몽땅 연필이 될 때까지 자신과 싸우는 그대들이여 공룡처럼 나아가라!"

덧붙이는 글 | 국도예술관 정진아 프로그래머가 글을 작성했습니다.

이기사는 영화리뷰전문사이트 무비조이(http://www.moviejo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10.15 14:51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국도예술관 정진아 프로그래머가 글을 작성했습니다.

이기사는 영화리뷰전문사이트 무비조이(http://www.moviejo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날의 꿈 정진아 국도예술관 무비조이 MOVIEJOY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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