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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5년 우리나라의 첫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인이 혼을 다해 빚은 예술작품으로 심오한 불교사상과 뛰어난 예술혼을 독특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수십 년간 석굴암과 불국사를 연구해 온 한국미술사연구소 문명대 소장은 "석굴암과 불국사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이견이 전혀 없는 세계 최고의 불교 건축물로서 당연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산"이라고 말한다. 이는 석굴암과 불국사의 뛰어난 가치를 설명하는 데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왼쪽 위에 자리한 석굴암은 얼핏 잔디를 씌어 놓은 왕릉처럼 보인다.
 왼쪽 위에 자리한 석굴암은 얼핏 잔디를 씌어 놓은 왕릉처럼 보인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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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말하면 잔소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번 기사에서는 '우리나라에는 석굴암 외에 어떤 석굴사원이 있을까'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우리나라 목판인쇄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석굴암과 불국사에 관한 이 이야기들은 한눈에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꼭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하나, 우리나라에는 석굴암 외에 어떤 석굴사원이 있을까?

석굴암은 360여 개의 돌들을 하나하나 짜 맞춰 인공적으로 만든 특이한 석굴사원이다. 석굴암은 '앞쪽은 네모나고 뒤쪽은 둥글다'는 '전방후원(前方後圓)'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등의 전통사상을 내부 형태를 통해 보여준다. 즉, 석굴암은 인간이 살고 있는 인간세계인 땅을 네모난 앞쪽에, 진리를 나타내는 부처님세계인 하늘을 둥근 뒤쪽에 만듦으로써 '삶과 죽음의 세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돌고 돈다'는 '윤회'를 비롯한 불교 사상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석굴암과 같은 석굴사원은 기원전 3000년경 인도 아소카왕이 만들었다는 '바라바르 석굴'을 그 시작으로 본다. 석굴사원은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등으로 전파되었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국의 둔황 석굴 등은 우리 귀에도 익숙한 세계적인 석굴사원이다. 석굴암은 물론이고….

대개 석굴사원은 열악한 자연환경이나 기후, 맹수의 습격 등을 피해 수도를 하거나 종교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래서 초기의 석굴사원은 대부분 천연동굴 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열대나 사막지역에서는 뜨거운 열과 비바람, 독충 등의 위협이 컸기 때문에 수도자에게는 신변을 보호해 줄 석굴사원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불교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천연동굴 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자 점차 암석을 인공적으로 파내어 석굴사원을 짓게 되었다.

석굴암과 같은 우리나라의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과는 다르다. 자연환경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바위의 성질이 다른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인도나 중국의 바위는 파거나 다듬기가 쉽지만 우리나라의 바위는 뚫기가 매우 어려운 화강암 재질이 대부분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석굴사원은 석굴암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석회암 재질의 골굴사와 지붕을 씌운 마애여래좌상
 석회암 재질의 골굴사와 지붕을 씌운 마애여래좌상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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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우리나라에 석굴사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석굴암이 자리한 경주에는 6세기 무렵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 석가모니의 전세 상인을 일컬음) 일행이 함월산에 12개 석굴을 파내 법당과 스님이 머무는 집 등으로 삼은 인공 석굴사원인 골굴사가 있다.

골굴사(骨窟寺)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석회암 재질로 이루어져 있어 구멍이 숭숭 뚫린 하얀 절벽은 마치 사람의 뼈처럼 보인다. 석회암은 화강암보다 물러서 다루기가 쉽지만 비가 오면 녹거나 바람에 깎이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절벽 한쪽에 조각되어 있는 보물 제581호 '마애여래좌상'에는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지붕을 씌우기도 했다.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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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에는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삼존석굴'이 있다. 팔공산 절벽의 천연동굴에 만든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으로 석굴암보다 제작연대가 앞선다. 이 석굴에는 700년경에 만든 세 개의 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본존불은 2.18m, 왼쪽 보살상은 1.8m, 오른쪽 보살상은 1.92m 높이에 이른다.

특히 본존불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땅으로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며 땅을 짚어 부처의 영광을 증명하게 하는 손의 모습)인데, 우리나라 불상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사례다(석굴암 본존불도 항마촉지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군위 삼존석굴은 통일신라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문화사적 가치와 더불어 불교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강원 속초에는 신흥사의 부속암자로서 천연동굴을 이용해 만든 '계조암'이 있다. 통일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계조암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등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이 수도를 한 곳으로, 조사(祖師, 학파를 세운 사람)라 일컬을 만한 고승이 계속해서 나와 계조(繼祖)라는 이름을 붙였다.

계조암은 목탁바위에 들어 앉았는데 목탁 속에 들어있기에 다른 절에서 10년 걸릴 공부도 5년이면 끝낼 수 있다는 그럴 듯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한편, 계조암 바로 앞에는 떨어질듯 위태로우면서도 신기하게 오랜 세월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설악산의 명물 흔들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그밖에 강화에도 통일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창건하고, 조선 순조 12년(1812년)에 중건한 보문사 석실이라는 석굴사원이 있다. 천연동굴을 이용한 보문사 석실은 입구에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감실을 마련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해 미래불인 미륵보살,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 등을 모셨다.

이제 석굴사원을 말할 때 석굴암이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지 않은가? 비록 많은 숫자의 석굴사원은 아니지만 석굴암과 비슷한 종류의 석굴사원들이 곳곳에 있으니 우리나라도 세계의 석굴사원을 논할 때 한자리 쯤 차지해도 괜찮을 듯 싶다.

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우리나라 목판인쇄물이 아니다?

1966년 10월 불국사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석가탑 보수공사를 하느라 탑의 지붕돌인 옥개석을 들어 올리다가 잘못 떨어뜨려 한 쪽이 깨지는 불의의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이 사고로 지붕돌 아래의 몸돌 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상에 첫 선을 보이게 됐을 줄을. 

불국사 대웅전 앞 마당에 마주보고 서 있는 석가탑(왼쪽)과 다보탑.
 불국사 대웅전 앞 마당에 마주보고 서 있는 석가탑(왼쪽)과 다보탑.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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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제작시기 706~751년 추정)>은 그 의미만큼이나 이렇게 극적인 탄생 비화를 가지고 있다. 석가탑 같은 중요한 문화재가 손상된 것은 안타깝지만 덕분에 자랑스러운 우리 유산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참 희한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너비 약 8cm, 전체 길이 약 620cm 정도 되는 두루마리 모양을 하고 있다. 각 행마다 8~9자 정도의 문자가 인쇄돼 있으며, 조그마한 탑을 무수히 만들어 공양하고 불법에 따라 마음속으로 부처를 잊지 아니하고 불경을 외면 복을 얻고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라는 사실을 반박하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중국과 일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702년 중국이 만들었고 이를 신라가 수입한 것',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제작 장소와 시기가 불분명함으로 770년경에 만든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각각 주장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복제품.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복제품.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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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중국과 일본의 주장처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 아닌 것일까? 사실 이러한 논쟁은 종이와 인쇄술의 기원을 둘러싼 한·중·일 3국의 미묘한 자존심 문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논쟁의 시작은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학계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글자 중 여덟 글자가 당나라에서 사용한 무주제자(武周制字, 측천무후 즉위해인 690년에 반포하여 사용하다가 당 중종이 복위한 705년에 사용을 중지한 특별문자)이고 중국산 닥종이로 만들어졌다'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결국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중국 당국에서는 국가 차원의 전담팀을 만들어 이러한 주장을 국제 학계에 널리 홍보까지 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우리나라 학계는 면밀한 자료 조사와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첫째, '무주제자'라는 글자는 중국에서만 사용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사용하였다.

둘째, 재료인 닥종이는 전남 구례 화엄사 서탑에서 나온, 8세기 때 만든 <백지묵서경(白紙墨書經)>과 같은 신라 닥종이이다.

셋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쓰인 '정광(淨光)'이라는 글자는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국보 37호)의 사리함(706년) 글씨와 똑같은 서체의 신라 글자다.

넷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온전하지 않은 글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 '조(照)'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글자는 당시 당나라 황제였던 측천무후(무조, 武照)의 이름자의 하나인데,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황제의 이름자를 다른 데에 쓸 수 없었다.

대체로 지금까지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러나 국제 학계가 모두 이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을 우리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일례로, 영국의 고고학자인 '오렐 스타인'이 20세기 초 중국의 둔황석굴 천불동에서 발견한 금강경(868년)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으로 알고 있는 서양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산의 존재와 가치를 널리 알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세계 최초로 종이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중국이 우리나라로부터 인쇄술의 기원을 빼앗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지킴이와 알림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처럼 <무구정광대다라니경>도 논란을 벗어 던지고 당당히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게끔 말이다.

앞쪽에 보이는 것인 연화교, 칠보교이고 멀리 보이는 것이 청운교, 백운교이다. 전체적인 불국사 모습은 조화를 이루면서도, 공간에 따라 나오고 들어가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등 차이를 두고 있다.
 앞쪽에 보이는 것인 연화교, 칠보교이고 멀리 보이는 것이 청운교, 백운교이다. 전체적인 불국사 모습은 조화를 이루면서도, 공간에 따라 나오고 들어가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등 차이를 두고 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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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과 불국사는 이렇듯 천 년의 세월을 넘게 버텨오며 우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이야기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 이야기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하는 것은 온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석굴암과 불국사에 가거든 한 번쯤 석굴사원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만든 조상들의 위대함과 그 속에 담긴 특별한 가치를 떠오려보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참고 자료]
한국 7대 불가사의 / 이종호 / 역사의 아침 / 2007

우리 아이 첫 경주 여행(1, 2) / 박광일·이향이 / 삼성당 / 2008

불국사와 석굴암 / 글 문명대, 그림 강연경·박진아 / 스쿨김영사 / 2008

우리 문화유산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까? / 글 해살과 나무꾼, 그림 한창수 / 채우리 / 2009



태그:#석굴암, #불국사, #세계유산, #석굴사원, #무구정광대다라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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