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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같다'

 

불국사 경내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이다. 불국사의 정문인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는 길 양쪽으로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있다. 내가 그동안 가본 절이 몇 군데 안 되지만 그중에서 가장 잘 정돈된 수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이 흘러내리는 연못도 있고 문을 마주보고 선 다리가 있다는 점도 창덕궁을 연상 시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주에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에 수학여행을 경주로 가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88년도에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당시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이유가 올림픽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그때 '올림픽은 서울에서 열리는데 왜 경주에 가지 못할까'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경주에 갈 일이 없었다. '경주'하면 '수학여행'이 연상되는 만큼, 수학여행이 아니고서는 경주에 갈 이유도 생겨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석굴암과 불국사를 보기 위해서 경주를 찾았다. 일정을 넉넉하게 잡을 수 있다면 다른 유적들도 둘러볼 수 있겠지만 1박 2일의 짧은 방문이라 목적지를 석굴암과 불국사로 한정했다. 시간이 좀 남아서 국립경주박물관도 가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처음 방문한 경주, 불국사를 거쳐서 석굴암으로

 

 

사천왕상이 서있는 천왕문을 지나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불국사의 앞 마당이라 할 만한 공간이 나온다. 정면으로 청운교-백운교가 보인다. 저 계단을 지나서 자하문에 들어서는 것은 속세를 떠나서 피안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바세계의 끝이자 불국토의 시작, 그러니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인 셈이다. 계단의 총 개수는 33개. 계단의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해서 잘못해서 굴러떨어지기라도 하면 진짜 천국으로 갈 수도 있겠다.

 

나는 그 계단으로 걸어가다가 멈칫했다. 청운교-백운교에 관광객들이 오르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걸어오는 동안 계단에서 사람을 한 명도 못 보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청운교-백운교는 석가탑-다보탑에 버금가는 불국사의 명물인데, 왜 못 오르게 막아놓았을까.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면 계단이 붕괴하기라도 할까 봐? 아니면 사람들의 발길에 계단이 더러워질까 봐?

 

모르겠다. 아무튼 청운교-백운교를 지나서 자하문에 들어서려던 나의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 석굴암도 관광객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유리벽을 통해서만 본존불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하던데, 불국사도 이렇게 관광객으로부터 유적을 보호하려고 하나 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화교-칠보교에 가보았더니 여기도 마찬가지, 관광객이 못 오르게 막아 놓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막아 놓았는지가 궁금해진다. 설마 1988년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그 해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왔더라면 이 두 계단을 모두 오르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석굴암에도 직접 들어가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지금, 나는 아쉬운 마음에 계단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이 두 계단은 모두 관광객의 발길을 거부한 채 계단 본래의 기능조차 상실해 버린 것이다. 계단을 보호하기 위해서 계단의 역할을 포기해 버린 아이러니. 나는 연화교-칠보교 위의 안양문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폐쇄했기 때문에 안양문도 제대로 된 문 역할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몇 년 전 극락전에서 발견된 황금돼지목조상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직통으로 가는 길이 막혔으니 대웅전에 가려면 극락전을 지나서 대웅전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 극락전에는 독특한 장식물이 있다. 그동안 감춰져 있다가 몇 년 전에 관광객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황금돼지목조상이 그것이다.

 

이 돼지상은 극락전 현판 바로 뒤에 앉아 있다. 극락전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물의 외양이나 내부 불상에 관심이 많을 것이다. 누가 목 아프게 현판 뒤를 유심히 보려고 했을까.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것처럼 숨어있는 돼지도 어쩌면 그동안 누군가가 자신을 발견해주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극락전 앞에는 그 돼지 모양을 본뜬 황금색의 복돼지상이 놓여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복돼지를 쓰다듬어보고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대웅전 앞 마당에 들어서자 불국사의 상징과도 같은 두 개의 탑, 석가탑과 다보탑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십 원짜리 동전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다보탑, 이 다보탑은 목조건물의 복잡한 구조를 그대로 석탑으로 옮겨온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의 석탑이다.

 

그런데 다보탑과 석가탑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주위에 난간을 둘러놓았다. 청운교-백운교에 올라 자하문을 지나서 다보탑을 만져보고 싶었는데, 그 소박한 바람이 연달아서 깨져버린 것이다. 1년에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불국사이니 관광객들의 손길에 탑이 더러워지거나 아니면 작은 손상이라도 생길까봐 이렇게 난간을 둘러놓은 모양이다. 내가 '가제트 팔'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탑에는 손을 댈 수 없다. 그냥 이렇게 바라보는 수밖에.

 

 

문득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보았던 첨탑들이 떠오른다. 이슬람 사원에 딸린 그 탑들은 장식용이면서 동시에 실용적인 측면이 있었다. 군인들이 탑에 올라서 외부의 동향을 감시하는 용도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물론 관광객들도 돈을 내면 그 위에 올라갈 수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 절에 있는 탑들은 그렇지가 않다. 장식용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뭔가를 보관하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사람이 그 위에 오를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묘한 차이점이다.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놓았다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박물관 안에 있는 유물이라면 몰라도, 야외에 당당하게 서있는 이 탑들을 만져보지 못한다니. 난간 속의 탑이 '나는 너희들의 손길이 닿아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성수기가 지나서 그런지 대웅전 앞은 비교적 한산한 느낌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아서 주변에서는 일본어도 들리고 영어도 들린다. 눈앞에 있는 다보탑만 아니라면 내가 외국을 여행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대웅전을 지나서 무설전, 비로전 등을 둘러보았다. '실내촬영금지'란다. 왜 이리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다. 기대감은 실망으로 조금씩 변해간다. 불국사 뒤쪽에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작은 돌탑들이 많이 모여있다.

 

유리벽 너머로 바라보는 석굴암 본존불

 

 

"걸어가면 50분 걸려요!"

 

불국사 정문 관리인이 이렇게 말한다. 불국사를 둘러보았으니 이제는 석굴암으로 가야 한다. 석굴암까지 가는 버스도 있지만 날씨도 덥지 않으니 산책 삼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석굴암 가는 길 양쪽에는 나무들이 우거져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서 마치 산림욕을 하는 기분이 든다. 이러니 버스를 탔으면 분명히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구두를 신고 있어서 산길을 걷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기분만은 좋다. 숨을 쉴 때마다 토함산의 한기가 몸 속으로 스며들어서 피로를 씻어주는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산길을 걷다보면 몸의 열기가 그 한기를 밀어낸다. 등줄기에 땀이 흐를 때쯤에 석굴암에 도착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왔는지 아이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석굴암 본존불이 모셔진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유리벽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까 유리벽을 통해서 본존불의 정면과 그 주변의 몇몇 조각상들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진촬영도 못한다.

 

밖에서 보았던 아이들을 떠올려보면 이렇게 막아 놓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이 안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더라도 석굴암 내부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수기 또는 수학여행 시즌이라면 엄청난 수의 학생과 관광객들이 이곳에 온다. 그들 모두에게 석굴암 내부를 개방한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법이니까.

 

그렇더라도 이렇게 막아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거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유리벽을 통해서 보는 것과 안에 들어가서 직접 보는 것은 천지차이일 것이다. 관리와 통제를 잘 한다면 제한적으로나마 개방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있지 않을까.

 

문에는 '대학입시 백일기도접수'라고 써서 붙여 놓았다. 이 기도를 접수하려면 돈 10만 원을 내야 한다. 그러면 특정한 시간에 스님과 함께 유리벽 안쪽에 들어가서 기도를 할 수 있단다.

 

나는 바깥으로 나와서 멀리 동해바다를 바라보았다. 석굴암 본존불이 바라보는 바로 그 방향이다. 날씨가 맑지 못해서 시야가 훤히 트이지는 않는다. 하늘은 바다처럼 바다는 하늘처럼 보인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듯이 본존불도 사바세계와 불국토가 맞닿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본존불은 지금 유리벽 너머, 일반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앉아 있다. 개방과 보호는 정말 양립할 수 없는 걸까. 복잡한 생각으로 토함산을 내려온다.

 

'석굴암과 불국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개요

* 등재 대상 - 석굴암과 불국사

* 등재 범위
1. 석굴암(본존불, 십일면관음보살상, 제석천상, 대범천상,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 십대제자상, 사천왕상, 금강역사상, 팔부신중상 등)
2. 불국사(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연화교, 칠보교, 안양문, 범영루, 좌경루, 석가탑, 다보탑, 대웅전, 무설전, 극락전, 관음전, 비로전, 나한전, 일주문, 불이문 등)

* 등재 사유
석굴암은 신라 전성기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 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종합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다. 불국사는 불교 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 등재 기준
세계문화유산 기준 I, IV
I. 독특한 예술이나 미적인 업적, 즉 창조적인 재능의 걸작품을 대표하는 유산
IV.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 등재 연도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회의 결정)


태그:#세계유산, #유네스코, #석굴암,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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