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 스틸컷

▲ 모딜리아니 스틸컷 ⓒ 안드레 드자위



17살, 모의고사 점수에 희비가 엇갈리던 단조로웠던 시간. 밥은 굶고 살아도 자신이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좀 더 현실적인 꿈을 꾸라며 충고했다. 그러고 8년이 훌쩍 지나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계획이냐고 묻는 나에게, 친구는 앞으로도 밥을 굶게 되는 한이 있어도 계속 하고 싶은 작업을 할 것이라고 했다. 순간 한결같은 친구의 의지에 소름이 돋았다.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의 경계가 무너진 지 오래인 나는 친구의 말에 적극 동의를 표하면서 예술가의 피는 타고 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믹 데이비스 감독의 2004년도 작품 <모딜리아니>에서도 예술가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의 천재적인 재능과 열정을 그렸다. 우리나라에선 개봉조차 하지 못했지만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선 널리 알려져 있는 영화다.

가난하지만 천재적 재능을 지닌 화가 모딜리아니와 화가 지망생 잔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로 사랑에 빠진다. 모딜리아니는 잔이 임신하자 그간 방탕한 생활을 접고 작품 활동에 몰두하지만 점점 악화되는 건강으로 힘들어 하다 괴한의 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난다. 잔은 모딜리아니가 숨을 거둔 다음날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자살한다.

영화 <모딜리아니>는 모딜리아니를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그린다. 당시 부유한 화가였던 피카소와 대립구도를 통해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에 대해서 묻고 있다. 다만 피카소가 가난하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모두 바보라고 말하는 등 자신의 역할을 너무 노골적으로 수행하여 세련미는 없었다. 잔과의 사랑 역시 모딜리아니를 매력적인 로맨티스트로 만들면서 이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모딜리아니를 미화시키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생각만큼 진부하지 않았다.

예술 작품 한편을 통째로 보는 듯한 영화

모딜리아니 스틸컷

▲ 모딜리아니 스틸컷 ⓒ 안드레 드자위



<모딜리아니>는 예술 작품 한편을 통째로 보는 듯하다. 배우들의 대사들은 시와 같이 함축적이며, 달빛 아래 흐르는 'La Vie En Rose'에 맞춰 모딜리아니와 잔이 춘 왈츠에는 낭만이 뚝뚝 흐른다. 르느와르, 피카소처럼 1910년대 파리 미술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화가들과 일본식 복장처럼 당시 유행하던 트렌드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주연 배우 앤디 가르시아와 모딜리아니의 싱크로율은 거의 100%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은 거루드 부인의 초상을 그리는 장면이다. 탐욕스럽게 파이를 먹으며 한껏 거만하게 행동하는 뚱뚱한 부인에게 모딜리아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있게 그릴까요, 없게 그릴까요?"
"뭘?"
"입가에 묻은 크림."

순간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미소의 달콤함에 충격을 받았다. 모딜리아니의 역에 앤디 가르시아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모딜리아니의 운명의 여인 잔은 프랑스 출신 배우 엘자 질버스테인이 연기했다. 그녀의 프랑스식 영어는 차분한 얼굴 안에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여성을 연기하는 데 잘 어울린다.

어린 시절의 모딜리아니가 여러 장면에 등장한다. 소년은 모딜리아니에게 남아 있는 순수의 영역이다. 모딜리아니는 몇 번이나 소년을 쫒아 내려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소년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애써 외면하려 하는 것도. 모딜리아니가 그토록 술에 내몰렸던 것도, 맑은 정신으로는 소년을 대면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모딜리아니가 괴한에게 습격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눈밭에 쓰러져 있을 때, 소년은 아무 말 없이 모딜리아니를 끌어안고 어루만진다. 광활한 눈 밭 위에 쓰러져 혼자 밖에 남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소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잔과 모딜리아니의 전설

모딜리아니 스틸컷

▲ 모딜리아니 스틸컷 ⓒ 안드레 드자위



잔과 모딜리아니의 전설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들 중에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것들이 많은데, 그것은 모딜리아니가 잔의 영혼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려고 비워둔 것이란 이야기다. 영화 후반부에 비로소 모딜리아니가 잔의 눈동자를 그려 넣은 장면은 가장 비극적인 장면과 교차편집되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모딜리아니에 관련된 비화는 너무 많기 때문에 실제로 모딜리아니가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러시아의 시인 일리아 에렌부르크가 모딜리아니의 죽음에 대해 말했다. '가난 속에서 죽었고, 죽은 후에 유명해진 사나이. 이 말은 모두 정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거짓말이기도 하다.' 그냥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수밖에.

영화 <모딜리아니>는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선 잘 모른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딜리아니라는 화가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은 달력에도 인쇄되어 있으며, 카페 화장실 액자에도 걸려 있고, 수첩 표지에도 있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모를 수밖에 없다.

영화 <모딜리아니>는 실제 모딜리아니의 원작품에 심취해 있는 마음과 영화를 통한 감동이 더해져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흥미를 갖지 않은 관객들이 볼 경우에는 스토리가 좀 지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황하던 예술가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서 새사람이 되는 스토리 자체가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모딜리아니 외에도 구스타브 클림트, 잭슨 폴락, 반 고흐, 장 미셀 바스키아의 전기를 다룬 영화들이 있었으나 모두 관객들에게 사랑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스토리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는 대중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가 약하고, 너무 심한 과장이나 왜곡은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모딜리아니> 역시 실존인물인 모딜리아니를 필요 이상으로 순수화 시켜 보기에 불편한 장면이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일반 관객들은 화가에 대한 미술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단 것이다. 르누아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영화에 실제 르누아르가 환생해서 등장한다고 해도 별 감흥이 있겠는가.

예술가의 고독.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모딜리아니 스틸컷

▲ 모딜리아니 스틸컷 ⓒ 안드레 드자위



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예술영화가 대중들에게 어필하려면, 일반 통상적인 극의 연출 기법은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불필요한 감정을 줄이고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 또 예술 영화는 난해하다는 평을 종종 듣는데, 난해한 것을 독창적이라고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두 성향은 비슷하게 시작하지만 확연히 다른 결과를 낸다.

예술가의 고독은 관객에게는 낭만이지만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얼마 전 대안 문화전시 공간에서 봤던 예술가의 공허한 눈을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관객 하나 없는 조용한 시간이었는데 관객이 들어가자, 계획에 없던 손님의 등장에 대한 당혹감과 뒤이어 정적을 깨트린 것에 대한 불쾌감을 읽을 수 있었다. 앞으로 그에게도 시끌벅적한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요한 순간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예술가들의 씁쓸한 인생에 낭만이란 포장을 씌워 고통마저도 아름답게 만든 영화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 눈동자가 없는 푸른 눈의 잔은 너무 아름답다. 푸른 루비를 눈에 보석으로 박은 듯이. 그림 속 그녀는 감정적으로 초연해 보인다. 눈동자가 없으니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 우는 것 같기도, 무표정해 보이기도 한다. 부서질 것만 같이 연약한 순간의 여성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다. 모딜리아니는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은 눈으로 봤던 모딜리아니가 죽자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의지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모딜리아니와 잔은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자신의 작업에 혼을 불어 넣거나 술독에 몸을 내던져 진탕 취해 버리고. 목숨을 걸며 사랑을 했다. 나에게도 운명에 내몰려 치열하게 목숨 거는 순간이 곧 도달하기를 기원한다.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을 너무 잊고 산건 아닌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잊고 살게 되었는지 쓸쓸히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http://www.moviejo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 무비조이 MOVIEJOY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