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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인천과 대구의 대결.

내가 경기장에서 직접 본 이 경기가 한국프로축구연맹이 발표하는 '2010 컵 대회 2라운드 베스트 매치'에 뽑혔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경기 내용이나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럴 만도 했다. 0-3으로 끌려가던 방문 팀 대구FC 선수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두 골을 따라붙어 축구에서 가장 재미있다고 하는 펠레 스코어(3:2)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 같은 날 벌어진 다른 경기에 비해 월등한 숫자(2만1011명)의 관중이 들었다. 수요일 저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이곳보다 30분 먼저 시작한 한 경기장의 관중수가 578명이었다고 한다. 인기 걸그룹 티아라의 하프 타임 공연 덕분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는 나에게 펠레 스코어나 뜨거운 관중 열기로 기억되지 않는다. 나는 2004년 3월 1일 인천 유나이티드 FC 창단 기념 경기(인천 4-0 감바 오사카)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안방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 없이 문학경기장 혹은 숭의경기장을 찾았다. 하지만 이 같은 모멸감은 처음이다.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워 축구팬이자 인천 시민으로서 그냥 참고 넘어갈 수가 없어 이렇게 글을 쓴다.

문학구장에 나타난 안상수 후보, 선수들과 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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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경기는 6·2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열렸다. 그래서 경기장 밖 분위기는 예상했다. 하지만 그 '불순한 의도'가 경기장 안까지 밀려들어 올 줄은 몰랐다.

시작은 이랬다. 킥 오프 예정 시간을 20분 정도 앞두고 도착한 친구가 왜 선수 소개를 안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보다 30분 전에 우리들은 선수 소개를 분명히 들었고 전광판에서도 확인했다. 관중들이 많이 모이지도 않은 킥 오프 50분 전쯤에 선수 소개를 한 것이다. 왜 이렇게 선수소개를 일찍 시작했을까. 그 다음 진행은 더 가관이었다.

경기 시작 전 인천구단은 코스닥 상장에 대한 보고회를 열었다. 코스닥 상장 심사에서 통과되면 국내는 물론 아시아 프로구단 역사상 최초로 증권시장에서 거래되는 뜻깊은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창단 때부터 지지하던 한 축구팬으로서 정말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뿌듯한 보고 이후 경기장 분위기는 더 이상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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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라는 사람이 '기호1번 한나라당 인천시장 후보' 어깨띠를 버젓이 두르고 경기장에 나타난 것이다(안상수씨는 현 인천시장으로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구단주이기도 하다). 안상수 후보는 축구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이름을 공공연하게 2만여 관중 앞에서 자랑했다. 그의 선거운동원들도 여럿 따라 붙었다. 그는 구단을 아껴 달라는 '연설'을 1분 정도 했다. 우회적으로 지지를 호소했던 것도 같은데 정치인이 축구장에 나타난 것 자체에 분개한 나와 친구들은 화가 나서 신경 써서 듣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히는 일은 경기 시작 직전 선수들과 기념촬영을 한 안상수 후보가 경기장 한복판 중앙원에 둥글게 서서 구단 선수들과 함께 큰 절을 올리는 것 아닌가? 순간 관중들이 가장 많이 들어찬 동쪽 관중석에서는 박수와 야유가 묘하게 겹쳤다. 2005년 많은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던 '정규리그 통합 순위 1위(챔피언결정전 준우승)'를 기록했을 때도, 당시 안상수 시장이 이렇게 관중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혹 증빙사진을 요구하는 분들도 있겠다. 너무 화가 나고 손이 떨려서 절 하는 사진을 찍지 못한 점 양해 바란다).

"브루노(새로 입단한 브라질 출신 골잡이)는 무슨 죄야? 뭘 알고 큰 절을 올린 것일까?"

함께 경기를 보러온 친구들이 내뱉은 말이다. 선수들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내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경기 시작 후에도 경기장 돌며 인사... 해도 너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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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킥 오프가 예정된 시각(오후 7시 30분)보다 9분 가량 늦어진 것도 화가 나는데 안상수 후보는 여전히 어깨띠를 두르고 운동원들과 함께 관중석을 누비고 돌아다녔다. 나와 친구들이 앉은 자리를 시계방향으로 한 번, 시계반대 방향으로 또 한 번 돌았으니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다. 다른 후보들이 깨끗하게 경기장 밖에서 선거운동을 끝낸 것과 비교하면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2004년 3월 1일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안방 경기를 거의 빼놓지 않고 찾아갔던 나는 구단주라는 사람이 이렇게 정성스럽게 팬 가까이에 찾아와 손을 내미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그 화려한 시청을 다시 차지하고 싶은 걸까?

2004년 3월 1일 안상수 당시 인천시장이 지붕 없는 차를 타고 최태욱 선수와 나란히 손을 흔들며 시민들에게 인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 그 마음으로만 우리들 앞에 섰다면 그는 지금의 인천 시민들로부터 더 많은 박수를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축구연맹은 인천구단 징계를... 선관위는 적절한 조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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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10 시즌부터 '데드타임을 5분 더 줄이고 팬들과 5분 더 만나자'는 '5분 더 캠페인'을 전개해 관중들에게 더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날 경기는 권력에 눈 먼 사람을 축구경기장에 들여 예정 시간보다 9분이나 더 늦게 휘슬이 울리게 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만이 넘는 관중들 앞에서 방만하게 경기 진행을 한 인천구단에게 규정에 합당한 벌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선거관리위원회는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축구장에서 선거운동을 한 안상수 후보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인천선관위 "사실 확인 필요"
오마이뉴스 편집부는 이날 안상수 후보의 축구장 유세에 대해 인천선거관리위원회에 문의했습니다. 인천선관위는 "안 후보가 문학경기장에서 축사를 했는지 등등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 확인이 필요하다"며 "사실 관계 확인 후 선거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2004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구입한 시즌권을 모조리 가위로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열성팬은 아니지만 소박한 시민구단의 발걸음에 지지를 보냈고 선수들이 흘린 땀들을 소중하게 생각해 왔다.

지난 겨울 일찌감치 구입한 2010년 하프시즌권은 몇 번 써보지도 못했지만 잘라 버릴까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저런 사람 때문에 내 돈을 찢어 버리는 것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경기를 끝내고 관중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걸어오는 선수들의 얼굴을 보고 참았다.

권력에 눈 먼 자들은 더이상 축구장에 얼씬거리지 말라. 선수들의 순수한 열정을 그 어떠한 의도로 이용하거나 왜곡시키지 마시길.

K-리그 축구 선거 인천 유나이티드 FC 대구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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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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