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의 한 장면

영화 <시>의 한 장면 ⓒ 파인하우스필름㈜


이창동 감독은 이제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될 것 같아요. 영화 <시>는 왜 유수의 세계영화제가 이창동이란 인물을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여태껏 그가 연출했던 작품 중에 최고란 단어를 사용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에요.

이 영화에는 감독의 작품 철학이 담겨 있으며, 동시에 배우의 연기 혼이 담겨 있고, 또한 관객들에게 전해주는 긴 여운이 있어요. 영화가 영화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텍스트로 읽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시>는 200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해요. 2000년대 한국에서 나왔던 그 어떤 작가주의 작품 중에서 이만큼 심미적 완성도를 가진 영화는 없단 소리에요. 이창동이기에 가능했던 영화이면서 이창동이기에 만들 수 있었던 영화에요.

<시>는 모든 장면들이 하나의 작은 결정체처럼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단 한 장면도 헛되이 지나가는 것이 없다는 것이죠. 미자 역의 윤정희씨가 보여준 연기와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속 세상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이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아름다운 것을 갈구하고 추구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그 이상을 추구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요.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미자의 행동과 삶이 자신의 가치관과 모두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뒤틀린 세상에서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엄청난 고난이자 역경이라고 할 수 있겠죠.

미자란 인물은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에요. 그녀가 보여주는 삶과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세상 속 현실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인물이기도 하죠. 그래서 미자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이상적인 삶을 원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해요. 오히려 현실의 잔인함 속에서 고결함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더욱더 뼈저리게 느끼게 되죠. 그래도 미자는 시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아요. 그녀에게 남겨진 것이 어떤 것이라 해도 시를 쓴다는 것은 그녀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고귀한 행동이자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에요.

영화 <시>는 미자가 시를 쓰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통해 우리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에요.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영화 속 미자의 삶

 영화 <시>의 한 장면

영화 <시>의 한 장면 ⓒ 파인하우스필름㈜


<시>는 상당히 독특한 형태로 출발을 해요. 영화 시작이 상당히 차분하면서도 격정적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오게 만든 것이죠. 이런 시작은 이후 미자가 시를 쓰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감독이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이건 감독이 직접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텍스트로 다시 읽어내는 개개인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평가를 할 수도 있어요.

미자는 성폭행 당한 후 자살한 소녀를 위해 자신의 시를 만들어요. 그런데 이 성폭행 당한 소녀가 자신과도 엮여 있어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와의 혈육 관계로 말이죠. 미자에게 시를 쓰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시상으로 옮기는 작업이에요. 하지만 이런 시를 쓰는 과정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과 소녀의 자살은 아름다운 세상 혹은 아름다운 시상과는 전혀 거리가 있는 것이죠. 이뿐만이 아니라 미자는 이상적인 삶과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에서 그러지 못하는 경우까지 발생해요. 그녀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죠.

미자는 자신이 원하던 삶과 배치되는 삶을 살아가요. 특히 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아름다운 시를 쓰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시상이 잘 떠오르지 않게 되죠. 거기에다 손자의 성폭행 사건까지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것 같이 보여요. 그녀가 추구하는 삶과는 동떨어진 사건을 일으킨 손자에게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 그리고 합의금 마련을 위해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 등은 분명 그녀가 말한 이상적인 삶과는 완전히 배척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녀가 싫거나 밉지 않는 것은 삶에 대해 끝까지 관조하고 어떤 것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자세 때문이에요.

그녀는 시를 쓰면서 느끼게 되는 모든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시로 만들어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그토록 환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현실을 받아들인 이후에 그녀가 진정 원했던 아름다운 시가 완성되어가요.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를 성토할 수가 없어요. 미자가 살아가는 현실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기 때문이에요.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미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프고 영화 속 사건들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와요.

영화 <시>, 흥행에도 탄력을 받기를

 영화 <시>의 한 장면

영화 <시>의 한 장면 ⓒ 파인하우스필름㈜


미자는 마지막에 시 한편을 남겨요. 그녀가 남긴 시는 세상 속에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 바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미자가 남긴 시는 동시에 성폭행으로 자살한 여학생을 위한 시이기도 해요. 미자가 시를 만들어가고 결국 결과물인 시를 남기는 과정들이 관객들에게 큰 여운을 남기는 것은 그녀가 과연 어떤 심정으로 이 시를 남겼을까 하는 문제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단정적으로 이 작품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영화를 바라보는 한 명 한 명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에요.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여러 사람들의 표정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영화 <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작품성을 가진 영화로 완전히 정점을 찍게 되죠. 이 작품만큼 깊은 생각과 사고를 가져다 준 작품성 있는 영화를 2000년대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시>는 앞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되고 다양한 텍스트로 의견이 나올 것 같아요.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영화를 바라보고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 영화에 대한 의견이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영화에 대한 모든 질문은 결국 관객 개개인이 내린 평가가 하나의 결론이 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엄청나게 많은 결론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구조죠.

이창동 감독은 정말 대단한 작품을 연출했어요. 다만 한국에서 이런 작가주의 감독 작품이 정말 아주 극소수로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요. 물론 <밀양>은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도 제법 탄력을 받았지만, 이 작품은 더욱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더 어렵게 영화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항상 많은 관객들이 좋은 한국영화가 나와야된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이런 좋은 작품들이 나왔을 때 관객들이 보여준 행동 역시 이율배반적인 경우가 많았죠. 작품성 뛰어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외면 받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에요.

<시>는 재미로만 따질 수 없는 작품이에요. 이 영화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관조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철학적인 물음으로 담겨 있어요. 그것 하나하나가 감독이 정해놓은 틀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해답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텍스트로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증거에요. 한국에서 이런 좋은 작품도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아요.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http://www.moviejo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창동 윤정희 무비조이 MOVIE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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