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산부인과, 유방암 클리닉, 갑상선암 클리닉, 피부과. 내가 정기적으로 다니는 대학병원의 진료과이다. 물론 감기 치료나 시력 검사는 집 가까운 동네 의원을 이용하고 있다.

 

지난 달의 일이다. 6개월 만에 찾은 한 진료실,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는 의사에게 나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번 검진에서 의사가 먼저 내게 초음파 사진을 같이 볼 것을 권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 "보면 뭐 알아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힌 채 건성으로 보고 진료실 문을 나서는데 속에서 불쑥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럼, 지난 번에는 왜 보여줬냐고?'

 

다른 진료과는 예전보다 의사들이 많이 친절해져서 궁금한 것도 메모해 가서 묻고 그러는데, 60세를 바라보는 이 의사는 하나도 안 변했고,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지난 번에 잠깐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특진료까지 내면서 이런 의사를 만나야 하는 건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영화 <우리 의사 선생님>  포스터

▲ 영화 <우리 의사 선생님>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인구 1500명 가운데 대부분이 노인인 시골 오지 마을의 유일한 의사 '이노' 선생은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존재이다. 각 사람의 병에 대해 상세히 아는 것은 물론 가정 형편까지 소상하게 꿰고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족집게처럼 짚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노 선생은 그냥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 의사 선생님이다.

 

이 마을에 실습을 하러 신참 의사인 도시 청년 '소마'가 발령을 받고 온다. 소마가 이노 선생을 모시고 진료를 하고 왕진을 다니다보니 주먹구구인 것 같은 부분이 있기는 해도, 환자를 돌보는 그 세심한 정성에 조금씩 감동을 하게 되고 앞으로 이 마을에서 의사 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망까지 품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노 선생이 실종된다. 형사들이 수사에 나서고 마을이 발칵 뒤집힌다. 증거라고는 논두렁에 던져진 이노 선생의 흰 의사 가운뿐.

 

형사들의 탐문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이노 선생과 관련된 이상한 점들이 속속 드러난다. 이노 선생이 자신의 가족사나 과거 경력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직접 했다는 이야기들을 앞뒤로 맞춰보니 다 다른 것.

 

이노 선생의 정체를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간호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색을 하지 않고 이노 선생이 환자들을 적절하게 잘 치료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이 마을을 드나드는 제약회사 영업 사원은 예전의 인연으로 이노 선생의 과거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그대로 덮어둔다. 여기에는 물론 자신의 이익이 얽혀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이노 선생에 대해 굳건한 믿음과 신뢰를 보여왔던 마을 사람들이 서서히 의구심을 드러낸다. 위약(placebo)효과가 거꾸로 나타나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노 선생을 믿었을 때는 치료 방법과 약이 효과가 있었지만, 그를 가짜 의사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과거의 치료 효과 역시 의심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노 선생을 그렇게 믿고 좋아하던 마을 노인들도 이제와서는 그가 준 약을 먹었지만 관절염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고 간도 더 이상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고들 이야기한다.

 

영화 <우리 의사 선생님>의 한 장면  의사 선생님 '이노'의 웃음...

▲ 영화 <우리 의사 선생님>의 한 장면 의사 선생님 '이노'의 웃음... ⓒ 영화사 진진

다만 한 사람, 도리카이 부인만은 그를 믿고 그의 진심과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확실하게 안다. 자신의 위중한 병을 자식들에게 숨기고 싶어하는 부인을 위해 이노 선생은 최선을 다한다. 부인의 딸이 도시의 큰 병원 내과 의사이기에 더욱 더.

 

무사히 부인의 딸을 속여 넘기지만 앞으로 1년 후에나 어머니를 다시 보러 올 수 있을 거라는 딸의 말에 이노 선생은 무너지고 만다. 어머니 살아 생전에 딸이 못온다는 뜻이니까. 그 길로 이노 선생은 스스로 사라져 버린 것.

 

이노 선생이 단 한 번 자신의 정체를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 대상은 바로 신참 의사 소마였다. 그러나 소마는 믿지 않았다. 아니, 꿈에라도 이노 선생이 가짜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겸손한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자격증 없는, 면허 없는 가짜 의사 노릇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이노 선생이 마을 사람들에게 준 든든함과 위안과 정성과 보살핌은 진짜였다. 치매가 심해 이제는 아들의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의사 출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펜라이트(penlight, 만년필 형 손전등)를 잃어 버렸다고, 그걸 자신이 훔쳤노라고 고백하는 이노의 목소리 역시 진짜였다. 아버지의 펜라이트는 진찰 도구이기도 했지만, 이노 선생의 신분과 실력을 보증해준 물건이었다.

 

처음에는 돈도 벌고 편할 것 같아서 이 마을에 왔지만, 어쩌다 공이 날아와서 받아치다 보니 공이 계속해서 날아왔다는 이노 선생. 전문 지식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노 선생이 그 공을 받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가슴 속에 자리한 진심이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늘에 통해서가 아니었을까.

 

사람의 몸과 마음이 완전 별개가 아니기에 몸의 병 또한 마음을 읽어주면서 고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노 선생이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만들면서 웃을 때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따라 웃었다.

 

마을 길을 오가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인사를 건네는 이노 선생은 비록 가짜여도 그 순간만은 진짜 인간이었고, 그러니 '우리' 의사 선생님이란 표현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진짜라고 믿었을 때와 가짜라고 생각할 때 그 효과가 천지 차이라 해도 환자는, 특히 어르신들은 혈압약이나 관절염약보다 구수하고 다정한 한 마디 말이 진짜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사람을 위한 일의 능력을 오로지 자격증만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내게 무안을 주었던 의사 생각도 나고, 내가 가지고 있으며 아주 잘 쓰고 있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에도 생각이 미친다... 나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덧붙이는 글 | 영화 <우리 의사 선생님 Dear Doctor / 일본, 2009> (감독 니시카와 미와 / 출연 쇼후쿠테이 츠루베, 에이타, 요 키미코, 야치구사 가오루 등) 

2010.05.11 11:28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영화 <우리 의사 선생님 Dear Doctor / 일본, 2009> (감독 니시카와 미와 / 출연 쇼후쿠테이 츠루베, 에이타, 요 키미코, 야치구사 가오루 등) 
우리 의사 선생님 의사 노인 거짓말 니시카와 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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