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사의 문제적 감독 김기영이 1960년에 만들었던 원작을 당대의 '문제제기적' 감독 임상수가 50년 만에 리메이크했다.

곧 개막될 칸 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되었을 뿐 아니라 전도연과 이정재, 서우와 윤여정이라는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며 상업적 성공까지 겨냥하고 있는 21세기의 <하녀>는 에로틱 서스펜스를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장르를 스릴러로 표방하고 있다. 예술적으로 상업적으로 올바른 전략이다. 50년 사이 엄청나게 변화된 세태를 감안하면, 시골에서 갓 올라온 '식모'가 아니라 교육학과를 중퇴한 고급 '도우미'가 고급저택으로 들어간 것도 당연하면서 매력적인 설정이다.

에로틱한 사회물

 전도연

전도연 ⓒ 올댓시네마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에로티시즘은 근래 보기 드물 만큼 참신하다. 배우들의 몸사리지 않은 연기와 감독의 연출력, 세련된 미장센과 음악이 어우러져 일찍이 한국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바람난 가족>으로 이미 검증된 임상수의 '에로' 솜씨는 몇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자기만의 스타일을 획득했다.

<하녀>의 에로티시즘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탐미적 에로티시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솜털의 떨림까지 미세하게 포착한다. 영화의 2/5 지점까지, 옆사람 목젖의 조심스런  울림마저 신경쓰일 정도로 팽팽한 긴장이 몸과 마음을 조인다. 임상수 특유의 솔직한 섹스 담화는 에로티시즘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한다.

"빨대로 빠는 것처럼 쪽 빨아줘."

임상수의 전작 <그때 그 사람들>의 인트로 장면(박통 암살 직전, 경호원들이 대기 중이던 궁정동 안가의 공간들을 숨막히게 패닝하던 카메라워크) 만큼이나 대단한 미학적 성공을 거두었다. 작심하고 만든 자취가 역력하다.

그러나 이런 성취가 인상적인 만큼, 나머지 요소들의 실패(혹은 부재)에 대한 실망은 한층 크다. 정작 영화의 또 다른 긴장을 담당해야 할 서스펜스는 실종되고 그 빈 자리에 대한민국 최상류층 0.01%에 대한 노골적인(그래서 뻔한) 풍자만 남았다. 역설적이게도 그 풍자는 힘이 빠지고 캐릭터들은 일순간 다중인격자가 되며 영화는 신파로 전락한다.

세련된 그림과 분위기 있는 조명, 감각적인 대사와 음악에도 불구하고 몰입이 점점 힘들어진다. 영화는 중반 이후 갑갑하고 지루해진다. 충격을 주려고 의도된 것이 분명한 클라이막스가, 충격이 아니라 생뚱맞음으로 다가온다. 전반부에선 영화의 밀도를 강화시켜주었던 고급스러운 실내공간(러닝타임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진행된다)은 후반부로 넘어가면서부터 보는 이를 옥죄는 감옥이 되어 버린다.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원작에서 벗어나고 싶은 작가적 욕망일 수도 있겠다), 전반부에 던진 매혹적인 화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길로(감독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한 길이었겠지만) 폭주함으로써 영화를 시쳇말로 '이게 뭥미?'로 반들어 버린다. 짐작컨대, 원초적 욕망의 문제를 사회적 맥락으로 풀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긴 건 아닐까 싶다. 그 욕망 하나를 제대로 붙잡고 치열하게 파고들었다면 오히려 사회적 맥락들이 더 힘있게 살아날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은 나만의 잠꼬대일까?

어설픈 풍자 대신 주인공의 집착과 그에 따른 행동의 동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면, 그리고 중반 이후의 서스펜스를 밀고 갈 동력을 찾았더라면 그야말로 '숨막히는' 에로틱 스릴러가 될 수 있었겠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남은 건 서스펜스가 사라진 '에로틱 사회물'이다.  

 이정재와 전도연

이정재와 전도연 ⓒ 올댓시네마


추락하는 것은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건물 옥상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여자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전작 <눈물>에서 보여주었던 현란한 핸드헬드로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 먹자골목의 구석구석을 몽타지한다. 먹는 욕망에 사로잡힌 서울이라는 도시의 적나라한 뒷모습은 그 여자의 추락으로 마무리된다. 이건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다. 주인공 은이(전도연 역)가 반복해서 보여주게 될 물리적 추락과 아득히 높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녀가 필경 마주치게 될 운명적 추락을 암시한다. 영화의 추락도 이 은유에 밀접하게 닿아있다.

이혼을 한 뒤 그 동네의 한 식당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은이는 새 일자리를 얻는다. 재벌 2세쯤 되는 집안의 입주가정부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가정부 후보의 집에 찾아가 '백그라운드 체크'까지 하는 까탈스러운 마나님(윤여정 역)은 실상 그 집의 집사다. 그리고 은이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그 집안에서 유일하게 은이를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어른이다. 현대판 궁궐의 주인은 젊디젊은 남자(이정재 역)와 여자(서우 역), 그리고 여자아이다. 그들은 그림 같은 외모뿐 아니라 '친절'한 매너의 보유자들이다. 기분에 따라 더없이 지독한 멸시로 표변하는 친절이긴 하지만.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에 집안에서도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은 은이가 하는 일은 한마디로 '하녀'가 하는 일이다. 친절한 어른들에게 '친절'만 배웠지 아직 그것이 깔고 있는 추악한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아이와 은이는 교감을 만들어간다. 저녁엔 마리아 칼라스 노래를 배경으로 와인을 마시고 아침엔 거실 한켠에 자리잡은 연주실의 그랜드 피아노로 소나타를 연주하는 남자 훈과도 또 다른 형태의 교감을 만들어간다. 이 치명적인 교감이 몇 차례 진행되고,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은이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그 남자만 빼고 모두가 알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들….

 이정재

이정재 ⓒ 올댓시네마


아, 윤여정!

원초적 욕망을 욕망으로 풀지 않고 사회적 맥락으로 성급하게 달려간 것이 영화의 구조적 문제라면, 영화를 끌고가야 할 주인공 은이의 캐릭터와 동기를 얼버무린 건 그만큼이나 치명적인 내재적인 문제다. 주인공 은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동기가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캐릭터의 성격도 왔다갔다 한다.

은이는 어떤 여자인가? 그녀가 아이에 대해 갖는 감정은 집착인가 기회인가? 그녀는 아무런 보상도 필요없이 아이를 키우겠다는 순진무구한 여인인가, 아니면 대단한 집안의 대단한 아이를 가졌으니 대담하게 요구하는 뻔뻔한 여자인가? 도통 은이 얼굴의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는다. 혹시 그녀가 다중인격이라는 복선을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 아닐까?

그러니 그녀에게 다가올 위기와 파국이 걱정스럽지 않다. '어, 저 여자 왜 저러지?'라는 의문만 솟아난다. 은이는 '칸의 여인' 전도연의 헌신적 연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구멍을 가진 인물이다.

아내가 되었건 다른 여자가 되었건, 당당히 펠라치오를 요구하는 집주인 훈은 절정의 순간 제왕의 포즈를 취한다. 원하는 것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다 가질 수 있도록 키워진 그는 이른바 '성골'이다. 심지어 아내와 장모까지도 그런 소유물 중의 하나로 여긴다. 그의 몸은 예술이고 그는 아침마다 예술을 연주한다. 그는 친절하고 쿨하다. 왜냐하면 저들과 섞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정재였기에 가능한 캐릭터였다. 이정재의 잠재력이 제대로 터질 수 있는 영화였다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정재가 정말 좋은 배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거다.

이처럼 매혹적인 '옴므 파탈'이었던 훈은 일순간 가련할 정도로 위선적이고 연약한 소인배로 돌변한다. 그것이 바로 감독이 의도했던 풍자의 효과일까? 그러나 저들의 소름 끼치도록 몰인간적인 괴물성은 훈의 사악한 카리스마가 방출되는 순간이었음을, 그 힘(욕망)이 끝까지 유지되어야 은이의 욕망과 운명의 강렬함이 제대로 힘을 받을 수 있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분'은 본인의 장난으로 생긴 아이를 유산시킨 장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감히 너희들이 내 자식을 지운다고? 당신 딸 몸에서 나온 자식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야!"

너무나 아름다운 피아노 곡을 연주하면서 던지는 이 대사에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행복한 배우는 윤여정이다. 연극적 세팅, 지리멸렬한 인물들 속에서 유일하게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저택의 주인이건 하녀건 다들 꿈을 꾸듯 부유하지만, 평생 프로패셔널 하녀로 살아온 긍지와 굴욕감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복잡한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한마디로 살아 숨쉬는 '인간'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그녀가 연기하는 집사는 영화와 주인공에게 위기감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관객이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해석과 주석들을 구차하게 만드는 건 그녀의 존재감이다. 은이가 입원한 병원을 다녀와 저택의 광활한 정원을 걸어가는 윤여정의 뒷모습에서 프랑스의 대배우 장 가방의 노년의 모습이 느껴졌다. 신산하면서도 존재의 심연이 묻어나는 뒷모습.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스쳐가듯 삽입된 그 장면은 그야말로 보는 이를 '빨대로 쪽 빨아들이며'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배우 윤여정의 전성기는 지금부터일 거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윤여정만큼이나 눈을 사로잡는 배우가 젊은 여주인으로 나오는 서우다.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들은 내용과 상관없이 몰입하게 된다. 배우의 아우라가 있다는 얘기다. 옹알거리듯 새된 목소리가 그토록 성숙한 역할에도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영화 <파주>로 이미 인정받은 배우라는 걸 뒤늦게 알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녀는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는 원석인 것 같다. 건투를 빈다.

 윤여정

윤여정 ⓒ 올댓시네마


<하녀>는 형식미에 있어 그간 한국영화가 이뤄낸 성과들을 십분 자기화하고 있는 영화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임상수 감독은 에로티시즘의 표현에서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점에서 '웰 메이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영화의 전체 덩어리를 놓고,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는 영화의 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코 '잘 만든 영화'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녀>는 화제와 캐스팅만큼이나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은 작품이다. 마치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 정도는 나도 만들 수  있다고 과시하는 듯 세련된 영화의 품새(우연인지, '친절'은 <하녀>를 읽는 중요한 키워드다), 살떨리는 에로티시즘,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 거기다 '그들만의 세상'에서는 뭘 먹고 입고, 어떻게 장식하고 생각하며 사는지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열받는 이도 있겠지만).

<하녀>는 어디선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한국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법한 작품이다. 김기영이 왜 문제적 감독인지 재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재능 넘치는 감독 임상수가 문제적 감독으로 등극할 날을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필자의 개인블로그에도 동시에 포스팅되었습니다.
하녀 임상수 전도연 이정재 윤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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