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 감독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그는 한국 독립영화의 거장이자 대부로 불리워지고 있다.

▲ 김동원 감독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그는 한국 독립영화의 거장이자 대부로 불리워지고 있다. ⓒ 성하훈

1986년 상계동 철거민 촌으로 한 젊은 감독이 들어선다. 알고 지내던 신부님의 부탁으로 그 곳의 모습을 담기 위해 찾았던 감독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철거민들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실감나게 체험하게 된다. 젊은 시절 그가 겪은 큰 충격이었다.

 

3년간 그들과 함께 살면서 찍은 상계동 풍경. 그것은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현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에 88년 27분짜리 다큐 영화를 만들었다.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분기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으며 불후의 명작으로 자리한 그 작품이 바로 <상계동 올림픽>이다.

 

이후 그는 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을 그린 <명성, 그 6일간의 기록>, 도시빈민들을 담은 <행당동 사람들>, 비전향 장기수들을 10년 넘게 담은 <송환>, 위안부 할머니들을 다룬 <끝나지 않은 전쟁>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그늘지고 소외된 자들을 끊임없이 조명한다.

 

김동원 감독. 상계동에 카메라를 들이댔던 30대 초반의 감독은 세월의 무게 속에 2010년, 50대 중반으로 변해 있었다. 1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그간 펼쳐온 감독의 왕성한 작품 활동에 격려를 보내기 위해 특별전으로 그의 회고전을 준비했다.

 

지난 20년 세월 속에 만든 영화들을 모두 상영하는 자리가 마련됐고, 배급사 '시네마달'은 이를 기념해 그의 주요 작품을 담은 DVD 세트도 출시했다. 부대행사로 스페셜토크와 막걸리토크 등이 연일 이어졌다. 극장에서 또는 막걸리 주점에서 관객들과 함께 영화에 대한 소통을 잇느라 여념이 없는 감독은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바쁜 인사 중 한 명이었다.  

 

"회고전은 죽은 사람들이 하는 건데..."

 

씨네토크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중 지난 1일 고사동 메가박스에서 진행된 김동원 감독과의 특별대담

▲ 씨네토크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중 지난 1일 고사동 메가박스에서 진행된 김동원 감독과의 특별대담 ⓒ 성하훈

 

감독의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안은 관객들로 연일 만원이었다. 관객 중에는 문정현 신부님도 있었다. 미국인 고 서로베르토 신부를 추모하는 영화 <한사람>이 상영되는 자리였는데, 한국에서 광주학살 방조와 매향리 폭격장 등 미국의 행위를 비판했던 선배 신부님의 모습을 보며 회한에 젖는 듯했다.

 

다큐멘터리 거장 감독에게 갖는 관객들의 궁금증도 상당했는데, 공동체·철학·사회학·신학 등 고차원적인 질문에 사회자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한편으로, 김 감독은 아직 작품 활동할 기운이 펄펄 넘치는데 '회고전'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듯했다. 그래서 회고전이기 보다는 '특별전'임을 강조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감독에게 질문을 던진 한 관객도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을 박제화시켜 창고에 넣는 기분이라 회고전 명칭이 맘에 안 들었는데, 감독의 기분은 어땠냐?"고 묻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회고전은 "죽은 사람들이 하는 것인데, 죽기 싫으면 더 잘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면서 "전주가 날 골탕 먹이려나 보다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좋은 뜻으로 골탕 먹이겠다면 얼마든지 먹겠다"고 웃어 보였다.

 

전주국제영화제 민병록 집행위원장에 따르면 이번 회고전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민 위원장은 "사실 다큐 영화라는 게 극영화보다 더 어렵다. 상업영화는 3개월 남짓이면 끝낼 수 있지만 다큐는 2~3년을 찍는 게 기본이다. 많이 힘들 수 있고 지치기도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에는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난 2일 저녁,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고사동 영화의 거리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나 지금껏 만들어 왔던 그의 작품과 독립다큐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원 안 받고 만든 진정한 내 작품은 세 편 뿐"

 

 영화 상영 후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김동원 감독

영화 상영 후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김동원 감독 ⓒ 성하훈

- 지난해 홍기선 감독 특별전에 이어 올해 회고전으로 마련됐다. 명칭 때문에 부담감이 있는 듯도 보이는데….

"명칭 자체가 감독이나 관객이 나름대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더 좋은 방향으로 정해지면 괜찮겠다는 생각은 있다. 나를 지지하기 위해 마련됐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고맙기도 하고, 너무 일찍 회고전을 갖는 것이 아닌가 씁쓸하기도 하고, 작품의 화질이 나빠 관객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 가지로 미묘한 심경이 교차한다."

 

- 관객과의 대화는 어땠는지. 답변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이 많은 모습이었다.

"대체적으로는 만족한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에 대해 어떤 방향을 제안해 주신다면 하는 식의 질문이 있는데, 내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영화적 질문이 별로 안 나오고 인생에 대한 질문이 많이 나오는데 이러다가 개똥철학자가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웃음) 영화적으로 구체적인 질문을 하면 좋겠는데, 너무 고차원적인 질문을 하니까 대답하기가 쉽지 않더라. 다큐에 대해 묻는 고등학생의 질문이 있었는데, 대견하기도 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느끼는 질문이었음에도 답변해주기가 간단치 않았다."

 

- 이름 앞에 '독립영화 거장'이나 '대가'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이렇게 불리는 것에 부담감은 없는지?

"느껴야 하는데, 벌써부터 부담을 느끼면 어떻게 하나 싶은 마음이다(웃음). 물론 책임감은 느끼게 된다. 대선배, 아버지, 선구자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사실 왜곡된 이미지가 많다. 뭐라고 불리든지 절반은 맞고, 절반을 틀리다고 봐야 한다. 남이 그러는 것에 신경 쓰는 체질이 아닌지라 무감각해지려 한다."

 

- 지금껏 많은 작품을 만드셨는데, 애착이 안 가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대표적인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겠나?

"여러 작품이 있지만 그래도 전환점이 됐다는 점에서 역시 <상계동 올림픽>을 꼽겠다. 만든 작품들은 많지만 내가 스스로 기획해 주위로부터 제작 도움 안 받고 만든 실질적인 내 작품은 <상계동 올림픽> <명성. 그 6일의 기록> <송환>. 세 작품밖에 없다.

 

- 이번 회고전에 만든 작품들이 다 선보인 것인지?

"수익사업 등을 위해 만든 것들은 뺐다.  민주화 운동 과정을 15분짜리 만든 것 등이 있는데, 지금도 부산민주공원에 있는 기념관인가에 가면 바닥에서 상영된다고 하더라.(웃음) 고 제정구씨 1주기~5주기까지는 추모 영상을 해마다 만들기도 했다."

 

"모든 다큐멘터리는 선동...중요한 것은 안 변해"

 

막걸리 토크 전주국제영화제가 특별히 마련한 관객들과의 막걸리 토크. 김동원 감독이 "4대강 저지를 위하여~"를 외치면서 관객들과 건배하고 있다.

▲ 막걸리 토크 전주국제영화제가 특별히 마련한 관객들과의 막걸리 토크. 김동원 감독이 "4대강 저지를 위하여~"를 외치면서 관객들과 건배하고 있다. ⓒ 성하훈

- 처음 작품을 만들 때와 지금 작품을 만들 때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예컨대 마음가짐 등에서 변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든 다큐멘터리는 선동이라고 본다. 남의 말이나 생각을 전달하고 그것을 알려나가는 것인데, 액티비즘처럼 보이기는 하고 자기 고민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관객들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작품이 약해진 것 같다는 생각은 있다. 그것은 내 책임이고 내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스타일이 바뀌고, 기술력도 좋아지고 바뀐 부분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 작품에 따라 감독의 시선에 차이가 많다. 도시 빈민에 대한 시선은 따뜻하지만, 87년 6월 명동성당에 대한 기록은 냉철하고 <송환>에서는 차갑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모든 영화는 차가우면서 따뜻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관찰한다는 면에서 차가울 수밖에 없고, 참여해야 한다는 점에서 따뜻할 수밖에 없다. 송환>에서 찍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몰래 찍을 때는 엄청 차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기수선생님들이 떠나시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들고 촬영해야 하는데 그것도 차가울 수밖에 없다. 착잡함도 있는데, 이중감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87년 6월 명동성당 같은 경우는 과거의 일이고 자료화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절제된 내레이션을 사용했는데, 나 역시 당시 그 자리에 있었는지라 전개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게 됐다. 영상 같은 경우는 굉장히 주관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한편으로 당시 카메라를 들고 갔었는데 고장이 나서 직접 찍지 못했던 게 아쉽다. 작품을 만드는 목적에 따라 시선을 달라지기도 하는데, 도시빈민을 다룬 <행당동 사람들>은 그들을 너무 미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 본인의 작품 중  가장 스타일에 맞고 좋았던 것은?

"가족들을 찍은 <철권가족>이다. 제작에 대한 부담도 없이 편하게 만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시 10만원 영화제라는 것이 있었다. 상금도 10만원이고 제작비도 10만원이어야 했던 영화제인데, 처음에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드는 가족들을 걱정의 시선을 보려고 했던 것인데, 카메라 앞에서 솔직한 이야기도 듣고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 철거민과 비전향 장기수, 위안부 할머니 등이 그간 감독 작품에 담겨진 주제들이었다. 기존에 주제들 외에 새로운 것들을 다룰 계획이 있는지?

"그런 계획이 구체적으로 있다. 그렇지만 아주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게, 다큐멘터리가 나를 낯설게 하거나 아주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큐 하려면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 놓치 말아야"

 

 영화 상영이 끝난 후 감독의 사인을 받고 있는 관객들

영화 상영이 끝난 후 감독의 사인을 받고 있는 관객들 ⓒ 성하훈

- 상업영화의 조연출을 하다가 우연찮게 다큐 감독에 뛰어들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상업영화에 남았다면 어땠을 것 같은지 아쉬움은 없는지?

"아쉬움이라기 보다는 가정을 해보게 되는데, 아주 잘 풀렸다면 이창동 감독 정도 됐을 수도 있겠고, 최악의 경우 아예 입봉도 못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2~3편 정도 연출하고 끝냈을 수도 있겠고…."

 

- 간혹 다큐멘터리를 하다가 상업영화 쪽으로 외도를 하는 분들이 있다. 어떻게 보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한 부분인지라 판단하기 힘들다. 다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지 않다."

 

- 후배들 작품을 보면서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은?

"취향의 문제인데. 20대 감독들의 영화 작품들을 보면 굉장히 자기표현에 능하고 솔직하고 이런 것들은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표현에 있어 딴지 걸거나 아니면 장난이라도 칠 수 있는 적극적인 태도가 부족한 게 아쉽다. 인디다큐페스티발 등 영화제에서 88만원 세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부쩍 눈에 띄고, 재미나게 잘만드는데 뭔가 탁치고나가는 힘이 없어 보이는 것도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 다큐 감독을 꿈꾸는 젊은 영화인들이 많다. 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책도 읽어야 하고 기본적인 수양도 쌓아야겠지만, 카메라도 배워야 하고 제작비도 잘 벌수 있어야 한다.(웃음) 그보다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것을 구체적 어떤 투쟁현장에서의 관심 아니면, 그 사람의 사고방식 안에서 얻을 수 있겠지만 결국은 삶에서 발견하고 느껴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 독립영화 진영에 대한 탄압이 심하다. 독립영화진영의 대표 감독으로서 어떻게 보는지?

"어처구니없기도 하지만 그간의 환경에 대해 반성해 볼 부분도 있고 어떻게 보면 잘 됐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자체적인 전용관 이야기도 나오는 것 같고.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여건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2010.05.05 13:36 ⓒ 2010 OhmyNews
JIFF 김동원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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