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이 침몰되었다는 속보를 접한 날,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다. 사건에 관한 속보를 지켜보며 실종 장병들에 대한 연민이 우선 앞섰지만, 내가 잠 못 이룬 진짜 이유는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는 북한에 대한 지나친 적대주의였다. 일부 언론들은 '북 공격설'을 부추기고 있었지만 모두 심정적인 추론만을 근거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북을 향한 적대주의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묻게 되었다. 그 물음은 나를 영화 <GP506>(감독 공수창, 2007)으로 이끌었다.

<GP506>은 '군대영화'인가?

<GP506> 포스터 공수창의 <GP506>은 '군대영화'라기보다는 우리가 살아온, 또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근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영화로 보인다.

포스터 공수창의 은 '군대영화'라기보다는 우리가 살아온, 또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근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영화로 보인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우스갯소리 중 '여성들이 싫어하는 이야기 베스트3'가 있다. 3위는 군대 이야기이고, 2위는 축구이야기란다. 뭐 여기까지만 듣는다면 그다지 재미있을 것도 없는 이 이야기가 유머로 회자될 수 있는 까닭은 1위 때문이리라. 그 1위는 두 개의 종합, 바로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이다.

이 유머는 군복무를 마친 대한민국의 남성들이 그간 많은 여성들을 얼마나 멀미나게 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다. 한국군 창설 이래 수십 년간 이 무자비한 언어폭력(?)을 행하면서도 남성들은 같은 자리에 있는 여성들을 배려하는 센스 없이 그저 남정네들끼리 영웅담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언뜻 보면 이런 한국의 남정네들 가운데 2등하라면 서러울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바로 영화감독 공수창이다.

공수창이 누구인가. 바로 군대를 소재로 한 영화 두 편 <알 포인트>와 <GP506>을 찍은 감독이다. 때론 남성들마저도 술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고 싶을 정도로 지루한 군대 이야기를 영화로 찍은 이 감독, 어쩌면 그는 두 부류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성들을 앉혀놓고도 군복무 시절을 추억하는 센스 없는 남성이거나 잠정 관객 50%에 달하는 여성을 포기하고라도 군대 영화를 꼭 찍어야겠다는 용감무쌍한 감독이거나.

그러나 철저한 상업 매체인 영화에서 여성 관객을 포기할 만큼 용감한 감독은 없을 것이다. 필자가 보건대, 공수창의 <GP506>은 '군대영화'라기보다는 우리가 살아온, 또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근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영화로 보인다. 그 근대의 산물에 대한 사유를 좁혀 나가다보니 대표적 모순 집단인 군대가 떠올랐을 것이다. 또 한 번 시야를 좁히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냉전시대의 잔재인 G.P(Guard Post)가 보였을 것이다.

'계급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풍자

<GP506>의 첫 화면 감독은 근대의 산물에 대한 사유를 좁혀 나가다보니 대표적 모순 집단인 군대가 떠올랐을 것이다

의 첫 화면 감독은 근대의 산물에 대한 사유를 좁혀 나가다보니 대표적 모순 집단인 군대가 떠올랐을 것이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이 영화는 GP를 배경으로 한국 사회가 지닌 모순을 폭로한다. 영화의 전개에서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하는 수사관이 그곳으로 투입되는 것은 그 폭로의 출발을 의미한다. 부인의 발인 전날 새벽, 그는 빈소를 떠나 몰살 현장인 506GP로 향한다. 그의 발걸음은 가족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급'과 '국가'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령이었으며, 그 명령은 진실의 규명을 위해 내려진 것이 아니라 군 고위 책임자의 아들을 찾는 것에 주어졌다는 점에서 딜레마를 지닌 것이다.

몰살의 현장이자 오직 계급과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공간인 그곳 GP를 배경으로 영화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부조리에 대한 풍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그 부조리들은 '계급주의'와 '국가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다. 수많은 장병들의 죽음 앞에서도 클래식을 들으며 태연히 책장을 넘기는 군의관의 모습, 나이는 더 많지만 계급이 낮기 때문에 꼬박꼬박 존대를 해야 하는 수사관의 어투 등은 그 풍자의 한 단면이다.

영화 속 한 장면 수많은 장병들의 죽음 앞에서도 클래식을 들으며 태연히 책장을 넘기는 군의관의 모습

▲ 영화 속 한 장면 수많은 장병들의 죽음 앞에서도 클래식을 들으며 태연히 책장을 넘기는 군의관의 모습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영화 속 한 장면 GP에서 발견된 생존 의무병이 GP장으로 위장한 채 수사를 받기 시작한다.

▲ 영화 속 한 장면 GP에서 발견된 생존 의무병이 GP장으로 위장한 채 수사를 받기 시작한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이러한 풍자는 몇 개의 에피소드들과 연결되면서 '계급'이 만들어낸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군의관과 수사관 사이의 대화도 그 고발의 하나이지만, 그 고발은 자신이 'GP장'이라고 주장하는 의무병과 수사관의 첫 대면에서 극에 달한다. 이 장면에서는 사병이 자신의 신분을 장교로 위장하는 순간 장교로 대우받게 됨을 보여줌으로써 계급사회의 핵을 이루는 '계급'이 얼마나 허위적인 것인가를 폭로한다.

공수창이 폭로의 초점을 계급주의와 국가주의에 두고 있으면서도 군대를 배경으로 삼은 이유도 사실 그러한 '허위'와 관련이 있다. 집단의 몰살에 대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라고 윤 하사의 질문은 물음이라기보다는 '분노'에 가까운데, 이에 대해 수사관은 "여긴 GP야. 제일 가까운 GOP도 4km야.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 없다고 보고하면 누가 알겠어"라고 답한다. 바로 우리 사회에 팽배함 복지부동과 보신주의가 폭로되는 순간이다.

폐쇄 공포와 괴질, 두 개의 은유

이제 우리는 <GP506>의 의미를 좀 더 심층적으로 탐색하기 위해 본격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그 질문은 '이 영화의 은유는 무엇인가'로 삼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GP506>은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시작하지만 그 외피는 어느 순간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은유, 즉 GP 안에서 무고한 젊은이들이 죽음의 강을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무엇보다 정신적 억압이다.

공간은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의 판단에 따라 해석되기 마련이다. 인지 심리학의 견해를 따르자면, 심한 불안 반응으로 예민하게 된 사람들은 좁은 장소 특히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장소에 있게 되면 불안이 엄습한다고 한다. GP 내의 그들이 총구를 북이 아닌 스스로를 향해 겨눌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 엄습한 불안 속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 방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한 장면 '괴질'은 영화적 은유의 백미이자 영화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 질병 중 하나이다.

▲ 영화 속 한 장면 '괴질'은 영화적 은유의 백미이자 영화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 질병 중 하나이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영화 속 한 장면 <GP506>은 GP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들에게 '적'은 북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공포였고 동시에 그들 스스로였다.

▲ 영화 속 한 장면 은 GP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들에게 '적'은 북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공포였고 동시에 그들 스스로였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GP506>에서 영화적 은유의 백미이자 영화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질병인 '괴질'의 원인 역시 폐쇄공포의 원인과 맥을 같이 한다. 영화 속 군의관은 이렇게 말한다. "여긴 50년 동안 버려진 땅이었소. 눈을 벌겋게 부릅뜨고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이 저주받은 곳에서 무슨 일인들 없었겠소?" 의학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군의관이 내린 이 비의학적 판단이야말로 우리 역사의 비극의 한 단면이자 비명이다.

그런데 이 '괴질'을 감히 이 영화 속 은유의 백미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피부가 하나의 심리적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양파껍질처럼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피부는 때론 어머니, 때론 사회, 그리고 때론 국가라는 제도를 나타내는 심리적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피부는 바로 '국가'의 은유이며, 그 피부에 괴질이 번져 나가는 것은 더 이상 그들에게 국가가 보호 장치가 아니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죽어간 것과 살아남은 것, 그리고 '국가주의'

이 영화에서는 두 번의 몰살이 등장한다. 수사관을 GP로 가도록 한 과거형의 첫 번째 몰살과 수사관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행하는 현재형의 또 다른 몰살이 그것이다. 두 번의 끔찍한 죽음 모두 '군대'라는 제도 안에서,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이름 아래서 행해진 몰살이다. 이러한 죽음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대한 비유로 보인다. 시간은 점차 흘러가고 모든 것이 변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희생당하고 그 자리에는 '국가주의'라는 망령만 남아 있다.

이처럼 공수창은 '국가'에 대해, '국가주의'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만 그가 국가라는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부정하는 대상은 경제개발을 앞세운 채 독재와 정권 연장의 야욕만 채워갔던 우리들의 과거이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군 복무 하던 시절은 군부독재가 가장 기승을 부리던 때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이러한 감독의 말에 주목할 때, 그에게 군대영화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군대 이상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설정을 가능케 한 것은 군부독재에 얽힌 정신적 외상일 것이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물론 '근대'이다.

오늘도 많은 사병들이 '국방의 의무'라는 구실 아래 소중한 젊음을 소진하고 있다. 또 군사독재 정권 시기와 거의 다를 바 없는 논리로 '잠재적인 적'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보고 듣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여전히 '우리의 적'인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나는 지난 3월 27일, 천안함 실종자 가족들에게 총을 겨누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며 북이 아닌 1980년 광주의 봄을 떠올렸다.

G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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