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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이고 백사장에는 차일이 쳐져 있었다. 칼바람이 불던 그 겨울날, 청나라로 끌려가던 여인네들이 등에 업은 갓난아기를 버려 애기시신들이 얼어붙어 있던 강변이다. 그늘 막에서는 주모가 떡과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몇몇 사람이 탁주를 마시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차일에 꺽쇠가 얼굴을 디밀었다.

 

"여기 탁배기 한 잔 주슈."

 

탁주잔을 받아든 꺽쇠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누룩향이 물씬 풍기는 걸쭉한 액체가 목 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목이 마를 땐 막걸리가 딱이다. 고급주가 아니고 아랫것들이 먹는 술이라 해서 사대부들이 막걸리를 '박주'라 깎아 내렸지만 백성들은 탁주라 부르며 즐겨마셨다.

 

"나룻배는 언제 떠난답니까?"

"배 떠나는 시간이 따로 있나요. 사람 차면 떠나지."

 

주모가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나룻배는 정해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건너 갈 사람이 없으면 한없이 기다리고 사람이 차면 건너가는 것이 나룻배다. 얼마가 지났을까. 일단의 부보상들이 짐 보따리를 짊어지고 몰려왔다. 자갈밭에 누워있던 사공이 벌떡 일어났다.

 

"건너갈 사람들은 빨리빨리 타슈."

차일에 있던 사람들이 후다닥 배에 올랐다. 배가 서서히 미끄러지며 강심을 향하고 있을 때였다.

 

"자, 잠깐만, 내 보따리를 두고 왔단 말이요."

사색이 된 부보상이 사공에게 통사정했다.

 

"불알 떼어놓고 장가간다더니만 장사꾼이 보따리를 놔두고 다녀."

또 다른 부보상이 이죽거렸다.

 

"흐흐흐 흐."

"크 크 크."

모두들 쳐다보며 히히덕 거렸다.

 

"돌아갔다 다시 나오면 배 삯을 더 내야 합니다요."

사공이 너스레를 떨었다.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우? 건너 나루에 우릴 내려주고 돌아 오시우."

맨상투에 두건을 두른 사나이가 눈알을 부라렸다.

 

"더 드립지요. 네, 네, 더 드리고 말고요."

 

이 때 칼자루를 쥔 사람은 삿대를 잡은 사람이다. 부보상이 안절부절 하는 사이 나룻배가 출발했던 나루에 되돌아왔다. 부리나케 뛰어내린 부보상이 주모가 있는 그늘 막에서 봇짐을 찾아와 배에 올랐다. 배가 다시 강심을 향하여 미끄러져 갔다. 멀리 남한산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은 허물어졌지만 소나무가 울창하다.

 

"멀리서 보면 기상을 뽐내고 있지만 가까이 가보면 낙낙장송도 있고 왜송(矮松)도 있겠지?"

 

조정에 나가는 정승판서가 그런 것만 같았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게 체모를 갖추었지만 가까이 가서 들춰보면 냄새가 날 것 같았다. 뱃사공이 흥얼흥얼 뱃노래를 불렀다. 가락은 뱃노래 가락이었지만 가사가 생소했다.

 

한 자리씩 깔고 앉아 있는놈들 조사하면 다 나온다

 

이 풍진 세상 빨리 간들 무엇하리

북망산이 멀다 해도 대문 밖이 북망일세

촌촌히 가도 북망산, 빨리 가도 북망산

북망산 빨리 간다고 누가 금가락지 준다더냐?

 

어린 자식 품에 안고, 자란 자식 손목 쥐고

신주단자 등에 지고 칠십쌍친 앞세우고

다리 아프면 쉬어가고 무릎 아프면 쉬다 가세

잡거니 붙들거니 촌촌이 져며가세.

 

도성 천지 백만호는 연기에 싸여 있고

양도군병 함몰하고 근왕군 끈처시니

슬프다 우리 님군 가엽다 우리 세자

죄상 들춰내면 모두 다 버힐 놈이로다.

 

병자호란 때 유행했던 난리가(亂離歌)를 개사한 뱃노래였다. '모두 다 버힐 놈'이라 하니 섬뜩하다. 조정에 있는 놈들 조사하면 죄다 목을 쳐서 죽일 놈들 이라 하니 난리를 당하여 백성들의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이러한 노래가 유행되었을까?

 

사공의 뱃노래가 구슬프다. 뱃노래 가락에 맞춰 물결이 뱃머리에 부서졌다. 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국가다. 충과 효가 상위개념이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신주는 그 무엇이 우선할 수 없다. 신주단자 모시고 칠십이 넘은 부모님과 함께 피란을 떠나던 민초들의 모습이 부서지는 물결에 어른거렸다.

 

환향년이라고 내치지만 돌아만 와준다면 원이 없겠수

 

"난리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수?"

꺽쇠가 사공에게 말을 붙였다.

 

"그 난리에 사연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수."

삿대질을 잠시 멈춘 사공이 먼 하늘을 쳐다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인물이 좀 반반하여 나에게 과분하다 싶었는데 청국에 끌려간 지 8년이 지났어도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우. 남들은 돌아온 계집을 환향년이라고 내치지만 나는 돌아만 와준다면 원이 없겠수."

 

"애들은 몇이나 되우?"

"지어미 끌려갈 때 돌배기 딸년이 아홉 살이 되었다우."

사공의 눈망울에 이슬이 맺혔다.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딸을 키웠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설움이 밀려왔다.

 

"살아있다는 소식은 들었수?"

"듣다마다요. 같이 잡혀간 사람에게서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우리 주제에 돈이 있어야 빼오지."

조선의 양민을 포로라는 이름으로 끌고 간 청나라는 속환(贖還)을 지불해야 포로를 풀어 주었다.

 

"얼마면 빼온 답디까?"

"120 냥이면 빼올 수 있다기에 송파장에서 장치기돈 130냥을 빚내어 불원 천오백리 달려갔지만 빈손으로 돌아 왔다우."

사공의 손등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청나라까지 갔단 말이오?"

"심양까지 갔지만 170냥 내라는 되놈 때문에 얼굴만 쳐다보고 왔다우."

사공이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훔쳤다.

 

"뙤놈들은 짐슴만도 못한 놈들이구만."

꺽쇠가 열불이 났다. 나룻배에서는 삿대 잡은 사공이 주인이듯이 포로 시장에서는 포로 주인이 왕이다. 포로는 정찰이 없다. 부르는 게 값이다. 눈치 봐서 더 부르고 마음 내키면 깎아 줄 수 있는 것이 포로 값이다.

 

"다른 여자들은 많아야 백 이삼십 냥이면 빼오던데 우리 마누라는 예쁘다고 더 달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예쁜 것도 죄가 되남요?"

 

사공이 삿대를 놓고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룻배가 출발하기 전, 넋을 놓고 하늘을 쳐다보며 자갈밭에 누워 있던 사공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공이 시름에 잠겨 있는 사이 방향 잃은 나룻배가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덧붙이는 글 | 장치기돈-원금에 1할을 더한 금액을 5일장마다 갚아나가는 고리사채. 오늘날의 일수 돈


태그:#송파진, #소현세자, #민회빈, #전라도, #난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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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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