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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태양이 동쪽 하늘에 떠오르고 있다
▲ 해오름. 붉은 태양이 동쪽 하늘에 떠오르고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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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밝아오는 신새벽. 어둠에 묻혀있던 먼 산이 모습을 드러내자 토굴을 가렸던 거적을 들치며 건장한 사내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맨발에 맨상투의 사내가 내뿜는 입김에 새벽안개가 부서졌다. 찬 공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가다듬은 사내들이 토루(土壘)로 모여들어 동녘하늘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대석(臺石) 아랫단에 유탁이 올라섰다.

"다 같이 복창한다. 태양은 내일 다시 떠오른다."
"내일 다시 떠오른다."

우렁찬 함성은 없고 입술만 움직였다.

"소리는 없지만 더 크게 한다. 하늘은 우리의 편이다."
"하늘은 우리 편이다."

유탁의 선창에 따라 수많은 입술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때였다. 동쪽 하늘이 열리며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해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같이 엎드려 절을 올렸다. 다섯 번이다. 경건한 의식을 치른 사내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장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영오배(日迎五拜) 의식을 치른 그들은 조반 전까지 벌이는 난상토론을 해맞이 난장이라 불렀다.

두령 유탁이 사자후를 토해내던 자리
▲ 노성대. 두령 유탁이 사자후를 토해내던 자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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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령님도 오르지 않고 비워두는 그 자리에 오르실 장군님은 언제 오십니까?"

벙거지를 쓴 사내의 얼굴에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등주에서 배를 타고 갱갱이에 내리면 빨리 오실 수 있지만 장군께서는 요동을 지나 압록강을 건넌다는 소식이다."
"와! 와! 와!"

그들이 기다리는 장군이 대동강을 건너고 금강을 건너기라도 한 듯이 환호했다.

"깽깽이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갱갱이가 어디냐?"

패랭이를 삐딱하게 쓴 사내가 이지험의 옆구리를 찔렀다.

"넌 어디서 왔길래 갱갱이도 모르냐?"
"한양에서."

시골뜨기와는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눈빛이다.

"여기 사람들은 강경을 갱갱이라 부르거든..."
"강경이 어딘데?"
"이 맹추 같은 친구같으니라구, 강경도 모르냐? 한강 삼개포구, 대동강 남포, 예성강 벽란도, 영산강 영산포와 함께 조선 5대 포구 말이야."

패랭이를 쓴 사내가 배시시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두령이 강경사람이냐?"
"아냐, 임천 사람인데 여기 현감하고도 막역한 사이지..."
"현감하고?"

패랭이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현감이 보낸 초관(哨官)이 우리 산채에 들어와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한양 소식을 그 때 그 때 받아보는 거지..."
"저기 군복을 입은 저 친구들은 그럼 무어냐?"

철릭에 털벙거지를 쓴 사내들을 가리켰다.

"저 친구들은 여기 봉수대 군졸들인데 칼을 차고 있는 저 녀석이 오장(伍長)이고 나머지 넷은 봉졸이야."
"저 놈들이 우리 편이라면 공주 월화산에서 보내오는 한양 소식과 은진 황화산에서 보내오는 남도의 소식을 따먹을 수 있겠네?"
"그야 말하면 마포바지에 비(屁) 빠지기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근데 난 산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라 일영오배의 참뜻을 모르거든."
"넌 그럼 뜻도 모르고 다섯 번이나 절했냐?"

패랭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절을 하지 않느냐? 이 때 하는 절이 일배(一拜). 먼저 가신 조상에게는 이배(二拜). 절집과 문묘에서는 삼배(三拜). 임금한테는 사배다. 국궁사배(鞠躬四拜)라는 말도 못 들어 봤냐? 하지만 우리는 태양을 향하여 다섯 번 절한다. 임금보다 태양을 섬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불씨(佛氏)도 중니(仲尼)도 전하도 믿지 않는다. 오로지 믿는 것은 태양밖에 없다."

"이야, 너 참, 유식하다. 그럼 운종가 종을 매달아 놓은 누각을 뭐라 하는 줄 아느냐?"

패랭이를 쓴 사내가 화제를 돌렸다. 한양 문제라면 자신이 우위에 설 자신이 있다는 표정이다.

"거야 보신각이라 하지. 인의예지신에서 신(信) 말이다. 일찍이 삼봉이 한양을 설계할 때 동쪽에 흥인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청문을 두고 중앙에 신의를 중요시한다는 뜻에서 종각을 세우고 보신각이라 했지."

한양성곽의 북문이다
▲ 숙정문. 한양성곽의 북문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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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북쪽엔 지(智)자를 넣지 않고 지금은 숙정문이라 불러?"
"처음엔 소지문(炤智門)으로 지었으나 어감이 여자의 특정신체부위를 연상시킨다 하여 숙청문으로 바꾸었지."
"크, 크, 크으."

패랭이의 눈앞에 무엇이 그려졌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혼자 웃었다.

"북(北)은 음양오행에 따라 겨울과 물을 의미하며 음기를 상징하고 있다. 숙청의 청(淸)자에 삼수변이 들어가니까 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변한 것은 중종 때 여자들의 바람 끼를 잡으려고 그렇게 바뀌었다."

3년 전에 문을 연 은진향교에서 수학한 저력이 있어서 일까. 이지험의 답변은 거침이 없었다.

"이야, 너 박사다. 책 몇 권이나 읽었냐?"
"네가 떠 넣은 밥숟가락 수만큼 읽었다."
"예끼 이 사람이..."

두 사람이 까르르 웃었다. 그들의 웃는 얼굴에 붉은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잡담을 중지하고 여기에 주목하시오."

안익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자를 죽인 것도 부족하여 세자빈의 오라비 강문성과 강문영을 귀양 보내고 중전마마를 경덕궁에 유폐했다."

산채가 술렁거렸다.

"어의도 아닌 것이 의원이랍시고 궁에 드나들던 이형익이 중전마마가 몹쓸 역병에 걸렸으니 전하께 옮기기 전에 격리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상감이 서궁으로 보냈다 한다."

"이형익 그 자와 나는 불알친구라 그 자를 잘 알고 있소. 동네 의원한테 어깨 너머로 침술을 배운 그 자는 여자들이 머리가 아파 찾아와도 하복부를 만지며 진맥하고 팔꿈치에 곰발이가 나도 여인네의 아랫배에 침을 놓던 작자요. 그러던 놈이 대흥에 있는 조 숙의 친정집에 드나들며 숙의 어미의 불두덩을 만져주다 궁에 들어가 요망을 떠는 것이오."

당진에서 산채에 들어 온 사내가 목청을 돋우었다.

"요런 배라먹을 년 놈들이 있나. 전하의 품속을 파고들어 여우 짓을 하던 그 년이 숙원에서 다섯 계단을 뛰어 넘어 소의에 오르더니만 눈에 뵈는 게 없나 봅니다. 당장에 쳐들어가 요절을 냅시다."

격한 육두문자가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덧붙이는 글 | 비(屁) -방귀
불씨(佛氏)-석가
중니(仲尼)-공자
경덕궁-경희궁



태그:#소현세자, #민회빈, #원손, #인조,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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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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