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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대도 있고 삿대도 있지만 사공이 정신 줄을 놓아버렸으니 나룻배가 방향을 잃었다. 물살이 센 강 중심에서 사공이 삿대를 놓고 시름에 잠겨 있으니 배는 하류로 떠내려갔다.

"지금 이 배가 어디로 가는 거요?"

승객들의 아우성에 사공이 정신을 차렸을 때, 배는 급류에 밀려 부리도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룻배가 강심을 통과할 때는 삿대를 잡은 사공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고 얼굴이 벌개져도 급류에 밀려 약간 비스듬히 강을 건너는데 아예 넋을 놓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사공이 안간힘을 쓰며 방향을 잡으려 해도 송파진 건너편 나루에 배를 대기란 이미 늦었다.

"지송합니다. 잠실 나루에 대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독도에 대겠습니다."

송파 나루를 출발한 배가 잠실에 닿으면 나그네들은 뽕밭 사잇길을 통과하여 신천리 당산나무 아래서 다리쉼을 했다. 갈수기에는 바닥이 드러나고 홍수기에는 샛강이 생기는 신천강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한강 종합개발 하기전 잠실. 세월이 흘러 신천강의 수량이 많아졌고 깊어졌다.
▲ 부리도 한강 종합개발 하기전 잠실. 세월이 흘러 신천강의 수량이 많아졌고 깊어졌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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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에서 합수된 한강은 홍수기에 광진을 지나며 두 길로 갈라졌다. 송파강과 신천강이다. 송파강은 한강 본류가 흐르고 신천강은 갈수기에 바닥을 드러냈다. 잠실은 자마장리와 맞닿은 경기도 고양군 관할 강북이었다.

송파진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경강에는 여러 나루가 있었다. 군대가 주둔하는 진(鎭)이 있었고 나그네들이 이용하는 진(津)이 있었으며 화물이 집산되는 포(浦)가 있었다. 강원 두메산골에서 뗏목을 이용한 목재와 땔감이 도착하는 곳이 독도(纛島)였으며 쌀과 소금과 해산물이 집하되는 곳이 삼개나루였다. 화물전용이나 다름없는 나루에 승객을 내려주겠다는 것이다.

"이거 봐요. 사공! 우리가 무슨 나무토막이란 말이요? 숯덩이란 말이요?"

"지송합니다. 지가 잠깐 정신 줄을 놓고 있는 사이에 그만..."

"우리를 잠실 나루에 내려놓든가 아니면 배 삯을 받을 생각일랑 아예 마슈?"

맨상투에 두건을 두른 사나이가 눈 꼬리를 치켜 올렸다.

"한 번만 봐주십쇼."
"일 없어요."

사공과 승객이 입씨름을 하고 있는 사이 나룻배가 강심을 건너지 못하고 독도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탄천 하류의 시커먼 물이 보이고 봉은사 지붕이 보였다.

"이제는 독도에 대기도 어렵게 됐잖아."

인상이 험악한 사나이가 뱃사공의 목덜미를 거머쥐었다.

"사, 살려주시오. 배 삯을 안 받겠시다."
사태를 파악한 사공이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었다.

"우릴 어디에 내려 주겠다는 거야?"
"저자도에 내려드리겠소."

"지랄하고 자빠졌네. 우리가 돼지새끼냐? 저자도에 내려주게. 일 없으니 우릴 잠실에 내려 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배상한 셈치고 한 사람당 닷 푼씩 내 놓을테야?"

목덜미를 잡힌 사공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허우적댔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하류로 내려와 버린 배를 상류로 되돌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람을 잘 만나면 돛대를 세우고 강안(江岸)을 타고 오르면 갈 수 있지만 지금은 바람이 없다. 더구나 승객과 짐을 잔뜩 실었다. 삿대의 힘으로 강을 거슬러 오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다

"이보시오. 삿대 잡은 사공 멱아지를 잡은 사람이 어디 있소?"
꺽쇠가 끼어들었다.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맨상투 사내가 사공의 목덜미를 붙잡았던 손을 풀고 꺽쇠에게 덤볐다.

"무슨 상관이라니? 우린 한 배를 탔지 않소? 이 배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한날한시에 제삿날이 된단 말이우. 그런데도 상관없다니요?"

"이 새끼가…."
사나이가 꺽쇠의 멱살을 잡았다.

"이 손 놓고 말로 하시우."
꺽쇠가 사나이의 팔을 '탁탁'쳤다.

"이 쉐이가 주둥이는 살아가지고."
"나도 힘이라면 한 힘 하는 사람이니까 좋은 말 할 때, 이 손 놓고 하시우."
꺽쇠가 헛웃음을 흘렸다.

"너, 내손에 뒈져볼래?"
"사공의 실수로 배가 하류로 떠내려 왔다고 배 삯을 주기는커녕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한 것 아니오?"

"너 오늘 제삿날이다."
"입은 비틀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한 사람당 닷 푼을 내놓으라고 했는데 여기 있는 우리가 언제 당신에게 대표권을 주었소? 정이나 손해배상금을 받고 싶으면 당신 꺼나 받으시오."

"어디에다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거야?"
잡은 손을 흔들었다. 난투극이 벌어질 기세다.

"아이구, 이러지들 마시우. 그러다 배라도 뒤집히면 모두 다 함께 죽는단 말이오. 우리가  한꺼번에 죽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소, 내가 밤이 새더라도 잠실에 내려줄테니 이 손들 놓으시오."

배가 뒤집어진다는 소리에 겁먹었는지 사나이가 멱살을 풀었다. 꺽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섰다. 뱃전에 부서지는 포말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꺽쇠는 부서지는 물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인생사 참 묘한 일이다. 조금 아까 송파나루에서 탁배기 한 잔 할 때 말이다. 막걸리를 털어 넣고 안주 하라고 주모가 내어놓은 풋고추를 집었을 때 노인네가 왔잖아. 내 입속으로 넣으려던 풋고추를 그 노인네에게 드렸거든. 그리고 노인네가 먹었구. 결국에 그 풋고추는 내 입속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노인네 뱃속으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지 않았느냔 말이다. 애초부터 씨앗이 뿌려지고 열매가 맺힐 때부터 말이다. 아니, 그 이전 씨앗이 만들어질 때부터 말이다. 오늘 나룻배도 그렇다. 분명 잠실에 내리기로 탄 배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류로 떠 내려와 저자도에 내리게 되었으니 결국 오늘의 행로는 저자도를 거치라고 점지되어 있지 않았느냐 말이다."

머리가 아프다. 고개를 들었다. 폐 속을 파고드는 강바람이 상쾌하다. 사공의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아스라이 멀어지던 독도 미루나무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덧붙이는 글 | 부리도-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던 섬. 오늘 날 잠실 종합 운동장 부근
독도(纛島)-뚝섬
두물머리-양수리
자마장-왕실 목장이 있었으며 숫말은 마장동에서 길렀고 주로 암말을 길렀다. 오늘날 자양동
삼개나루-마포
저자도-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부근에 있던 섬.



태그:#잠실, #송파강, #신천강, #부리도, #저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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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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