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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
▲ 깃발 군기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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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민초들의 삶을 황폐화 시켰다. 가족과 헤어지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했던가? 수많은 백성들이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했다.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짐 보따리를 둘러메고 팔도를 누볐다. 동래에서 의주로, 남도에서 함경도로. 그 중심에 한성이 있었다. 그들은 길이 삶의 터전이었고 길은 정보의 유통로였다.

유교를 이념으로 하는 조선은 직업의 귀천을 계층화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상인을 장인보다도 더 아래 단계에 두었다. 이러한 사회 환경에서 장사꾼들은 물자 유통은 물론 정보도 퍼날랐다.

"난 동래에서 오는 길인데 어디서 오는 길이유?"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나이가 옆자리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한양에서 한 짐 가득 짊어진 부보상은 새재 넘어 상주, 달성, 밀양에서 짐을 풀고 일본에서 들어온 물건을 동래에서 짊어지고 오는 길이었다.

"자흥에서 오는데 남도의 인심이 흉흉합디다."

부보상들은 장흥을 자흥이라 불렀다. 장흥은 강진과 보성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다. 강진 길은 해남 거쳐 제주로 이어지고 보성 길은 순천으로 연결된다. 장흥은 남도의 교통 요충이었다. 때문에 부보상들에게는 물산이 모이고 흩어지는 황금시장이었다.

고을 수령이 습격을 당했다, "예사롭지 않군"

"무슨 일이 있었수?"

"나주 목사가 칼에 찔렸대."
평범한 백성도 아닌 관료가 피습을 당했다면 대단한 화젯거리다.

"왜?"

"이갱생이란 자가 나주 고을의 원이었는데 형벌을 함부로 쓰고 횡포가 심했나봐."

"백성을 함부로 하는 원님은 죽어도 싸. 누가 찔렀대?"

"주리(州吏)가"

"뭐야, 아전이?"

"그래, 이방 양한용이 목사를 죽이려고 했대."

"지네들끼리 먹이 싸움했군, 관리란 작자들 뼈다귀 하나만 보여도 으르렁대거든 개세이 같은 새끼들."
털보가 불쾌하다는 듯이 침을 뱉었다.

"아냐, 좌의정 뒷배로 호남 소모관과 청도군수를 했던 작자가 거친 나주에 있기가 팍팍했겠지. 좋은 곳으로 가기위해 좌상과 임금에게 보낼 진상품을 창고에 감추어 두었는데 아, 글쎄 이방이 훔쳐갔대."

"아전도 미친놈이구만, 진상품을 지가 훔쳐서 뭐하게? 지가 바치고 한양으로 영전하려고 그랬나? 아전 주제에."

"목사가 이방을 힐문했으나 양한용이 '훔쳐간 일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목사가 이방을 하옥했대."

"그래서?"
털보의 눈이 커졌다.

"죄 없는 사람을 옥에 가두었다고 생각한 이방의 외사촌 정이명이 친척 10여 명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감옥에서 양한용을 탈출시키고 관사에 난입하여 이갱생의 목에 칼을 겨누었대."

"그래 가지고?"
털보가 장흥에서 온 부보상 턱밑으로 바짝 붙었다.

전라도를 없애버려라

"정이명이 그랬대. '천하의 매국노 주구 노릇하는 놈, 내손에 죽어라'고 칼을 휘둘렀는데 목사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람 살려'라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노복들이 몰려와 목숨은 건졌다나 뭐라나."

"그 다음엔?"

"전라감사 윤명은이 이렇게 보고했대, '이갱생이 인심을 잃어 이런 변이 생겼으니 이갱생을 파직시키소서' 라고"

"자신의 부하지만 칼 맞을 짓을 했다 이거군. 위엣놈이 그렇게 봤다면 나쁜 놈이었구만."

"이 때 좌상이 이렇게 말했다더군. '적도(賊徒)를 국문도 하기 전에 먼저 그곳 수령을 파직시키는 것은 적도들의 마음만 맞추어 주는 꼴이 될 뿐이니 파직시키지 마소서'라고 말이야."

"큰 그림을 그리려 했군."

"옛부터 전라도에서 조그만 일이 있으면 눈을 크게 뜨고 보는 습성이 있잖아."

"그래서 조정에서는 경차관 장응일을 보내 정이명과 그 일족을 국문하여 사형에 처하고 나주의 칭호를 강등시켜 금성(錦城)이라 하고 전라도를 전남도(全南道)라 했대."

"전라도가 없어졌다는 말이 그 말이군."

전라도는 전주(全州)의 전(全)자와 나주(羅州)에서 나(羅)를 따와 만들어진 지명이다. 나주가 없어졌으니 전라도에서 라(羅)자가 빠지고 해남에서 남(南)자를 따와 전남도를 만든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 관향 능성(綾城)을 능주로 격상시킨 인조는 나주를 금성(錦城)으로 격하시켰다. 전라도와 묘한 인연이다.

보관할때는 깃대와 분리하여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
▲ 깃발 보관할때는 깃대와 분리하여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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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거든."

"뭔데?"

"정이명 일당이 양한용을 빼내고 나주 목사를 죽이러 들어갔다면 왜 기치가 없어지냔 말이야."

"기치가 뭔데?"

"이런 무식한 사람 봤나."

"각도에 절도사가 있고 고을에 병사(兵使)가 있잖아. 그들이 출동할 때 맨 앞에서 펄럭이는 깃발 말이다."

"군기 말이군."
털보가 머리를 극적였다.

"그것도 한 상자씩이나."

"무슨 곡절이 있군."

부보상의 말을 듣고 있던 꺽쇠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가 떠나오기 전, 관군의 깃발 한 상자가 산채에 들어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태그:#전라도, #전주, #나주, #사농공상, #부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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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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