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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정말 지난 10년간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힘든 일이란 힘든 일은 다 겪었던 것 같다. 새천년을 맞는다는 설레임과 함께 큰 포부를 갖고 시작한 2000년의 희망찬 해를 보며 참 많은 계획을 세우고 꿈을 향한 힘찬 첫 걸음을 다짐했다.

진급, 결혼 등 평생 직장으로 꿈꾸던 군에서의 순탄한 진로와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행복한 미래를 설계했다. 하지만, 새천년의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이내 인생에서 겪어야만 하는 힘든 굴곡을 10년 만에 모두 겪어야만 했다.

평생 직장이라 생각했던 군에서의 전역, 정신적 지주이자 평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믿었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국가 대 프로젝트의 희생양으로 수백년 동안 자리잡고 살아왔던 고향을 등지고 강제로 이사를 떠나야 했던 일 등 지난 10년 세월은 희망보다는 고통과 절망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고통의 세월만은 아니었다. 힘들었던 시기에 도움의 손길로 기꺼이 손을 잡아 준 고마웠던 인연들과의 만남과 제2의 고향 태안을 만나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는 것은 절망 속에 핀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 주고 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돌이키고 싶지는 않지만 이 또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쓴 약이 되고, 거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 지난 10년을 되돌아보았다.

진급 그리고 좌절

대위 진급을 하면서 평생 직장으로의 꿈을 다시금 지피게 되었지만...
▲ 진급신고 대위 진급을 하면서 평생 직장으로의 꿈을 다시금 지피게 되었지만...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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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졸업은 곧 실업자'라는 말이 돌 정도로 지금의 사회는 직장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라는 말로 비유될 정도로 힘들어졌다. 그러나 대학교 졸업하면서부터 이미 직업군인 이라는 직장(?)에 취업이 된 터라 취업 걱정은 하지 않았다.

드디어 1997년 7월 바라던 육군 장교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했고 그렇게 직업군인의 길을 걸어온 지 4년. 2000년은 직업군인의 길을 가던 나에게 진급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왕중위라는, 군 계급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중위 계급 최고참으로서의 딱지를 떼는 순간이었다.

동기들에 비해 조금 늦긴 했지만 학수고대하던 대위 진급을 기쁨을 맛보았고 풋내기 장교라는 타이틀도 대위로 진급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직책도 바뀌었고 대우도 달라졌다. 계급이 오르면서 상급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하급부대에 있던 고참들의 태도도, 대우도 달라졌다.

그동안 전방부대를 전전긍긍하면서 마음고생도 많아 잠시 평생 꿈으로 생각했던 직업군인의 길을 멈추려고도 생각했었지만 진급하는 순간 다시 평생 직업군인으로서의 각오를 다시금 새기는 계기도 되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핑크빛 미래만 가득하리라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이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적인 일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아왔다. 2002년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그 해 11월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평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믿었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고 소식과 죽음은 모든 의지를 꺾어버릴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충격으로 인해 더 이상의 직업군인의 꿈은 꺾이고 말았고, 꿈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군에 남아있으라는 주위의 권고를 마다하고 어머니의 죽음이 있은 2년 후 7년이라는 군생활을 마감했다. 서운함과 두려움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

결국 난 군에서 전역해 사회인으로서의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하지만 7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의 군생활은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는 너무 낯설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바늘구멍같던 취업의 문턱을 넘기기에는 나이와 경력에서 경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이도 한참 큰 포부를 가질 20대를 군에서 보내고 30대가 돼서야 군에서 전역을 한 터라 그야말로 사회물정 모르고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객기로 너무 성급하게 달려들다보니 탈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수십통의 이력서 작성과 면접, 그리고 미역국.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중 2006년 구원의 손길이 나락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계룡지역의 작은 인터넷 신문사에서 군 경력과 남다른 각오를 보고는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온 것. 비록 급여는 군에서 받던 것에 비하면 박봉이었지만 지역에서 인정받는 언론사를 만들기 위해 발바닥에 땀나도록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작은 소도시이고 비판기사만 나가면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어떻게든 기사 확산을 막아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공무원들을 보면서 잠시 회의를 느끼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역주민들의 알권리와 기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지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더욱 적극적인 시정 감시와 견제에 나섰다.

지난 2007년 노 전 대통령의 '취재지원 선진화방안'과 맞물려 계룡시 지역신문 기자들이 기자실을 폐쇄하라며 관공서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 기자실 폐쇄 시위(?) 지난 2007년 노 전 대통령의 '취재지원 선진화방안'과 맞물려 계룡시 지역신문 기자들이 기자실을 폐쇄하라며 관공서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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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지난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도했던 '취재지원 선진화방안'에 맞물려 또 다른 지역신문 기자와 함께 담합기사 양성, 취재실이 아닌 취조실, 기자실 비품으로 인한 시민혈세 낭비, 시정홍보에만 앞장서고 있던 기자실을 폐쇄하라며 시와 대항해 앞장서서 싸웠던 일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결국 이 싸움은 지역신문 기자들의 반쪽 승리로 돌아가 기자실을 폐쇄하지는 않고 축소한다는 시장의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르렀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에 대한 분위기가 수그러들자 해당 시에서도 약속을 번복하고 지금까지 기존대로 운영하고 있어 씁쓸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새로운 인연 <오마이뉴스>를 만나다

<오마이뉴스>가 내놓은 야심작 '엄지뉴스' 초기 엄지짱에 등극해서 받은 치킨을 어린이집에 전달하는 사진으로 광고모델(?)로 데뷔하는 영광을 얻었다.
▲ 엄지뉴스 광과에 실린 사진 <오마이뉴스>가 내놓은 야심작 '엄지뉴스' 초기 엄지짱에 등극해서 받은 치킨을 어린이집에 전달하는 사진으로 광고모델(?)로 데뷔하는 영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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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에서 일하면서 가장 의미있었던 일은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비록 첫 기사가 생나무에 걸려 '괜히 가입했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까지 550여건에 이르는 기사를 올리면서 <오마이뉴스>의 가족이 되어 가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지인의 소개로 지난 2007년 4월부터 인연을 맺게 된 <오마이뉴스>를 통해 모든 기자들의 꿈인 특종을 잡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더 큰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풀뿌리 지역언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활동을 시작했지만, 시민기자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과 정을 돈독히 쌓을 수 있는 기회도 갖을 수 있었다.

특히, 지난 2007년 12월 <오마이뉴스>가 야심차게 선보인 '엄지뉴스'에서 첫 '엄지짱'에 등극해 선물로 받은 치킨 10마리는 나의 존재를 이웃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선물 이상의 보람을 안겨주었다.

당시 받은 치킨은 사무실과 인접해 있던 경로당과 어린이집으로 배달돼 지역에서 '따뜻한 이웃'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웃에게 치킨을 전달하는 사진은 엄지뉴스 광고에도 실려 메일을 타고 시민기자들에게 보내지는 등 인생에서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인해 정든 고향을 떠나다

지난 2008년 4월 고향집에서 떠나 이사를 했다. 행복도시 만든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이사했는데...
▲ 고향 떠났지만 세종시 수정안이 웬말? 지난 2008년 4월 고향집에서 떠나 이사를 했다. 행복도시 만든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이사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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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전역, 취업 등 인생의 심한 굴곡이 이어지고 있을 무렵 또 하나의 충격적인 상처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2007년 추석 즈음 행정복합도시건설청으로부터 최후통첩이 날아들었다. 2008년 6월까지 고향마을을 떠나라는 것. 이후 추석과 설명절을 맞아 가족, 친구, 이웃들은 서너명만 모이면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들로 가득했고, 침울한 명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국가프로젝트의 희생양으로서 수십 년간 아버지, 할아버지 아니 증조, 고조할아버지 적부터 대대손손 터를 잡고 살았던 정든 고향을 등지고 강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고향을 떠난 지 불과 두 달이 지나서는 선산에 고이 잠들어있던 조상들의 묘까지 고향 땅에서 이장을 함으로써 이제 고향마을에는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추억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의 미래와 고향의 발전을 위해 고향마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대대손손 살아오던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고향마을은 전 정부에서 결정한 행정중심복합도시 원안 추진을 뒤짚고 교육과학중심의 경제도시라는 생뚱맞은 수정안을 내놓았다.

당연히 고향마을 사람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온다고 해서 기꺼이 고향땅을 내놓은 것인데 고향에서 다 내쫓아 놓고 계획을 바꾼다는 것은 사기꾼이 하는 짓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순간에 고향을 잃어버리고 철새꼴이 되어 버린 세종시 주민의 일원으로서의 바람은 단 한가지다. 고향을 잃은 주민들의 아픔을 정부가 헤아린다면 수정안을 철회하고 반드시 세종시 건설 원안추진을 간곡히 당부한다.

오순도순 형제처럼 모여 살던 고향마을이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지금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미래를 보며 기꺼이 고향을 떠난 이주민들의 기대를 부디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의 10년, 희망찬 미래로 가득차길...

올해 경인년 새해 희망차게 떠오른 해를 바라보며 소망을 빌었다. 앞으로는 희망찬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 희망찬 미래만 가득하길... 올해 경인년 새해 희망차게 떠오른 해를 바라보며 소망을 빌었다. 앞으로는 희망찬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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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되돌아보니 보람되고 기뻤던 일보다 충격적이고 슬펐던 일만 기억나는 건 왜일까?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니 비록 힘든 여정이었지만 다시 돌이킬 수만 있다면 좀 더 희망적으로, 좀 더 보람되게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지만 돌이킬 수 없는 10년이 되어버린 지금 후회보다는 앞으로의 희망찬 미래를 보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그래서, 2020년에 10년을 되돌아보면서 글을 쓰게 된다면 절망적이고 충격적이고 슬픈 일보다는 희망적이고 보람되고 기쁜 일들이 지면을 가득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하며 희망찬 미래를 설계해 본다.

덧붙이는 글 |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응모작



태그:#희망, #10년, #행복도시, #세종시,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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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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