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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0년 전에는 7남매 막내둥이로 나를 낳았던 친정엄마가 살아계셨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이른 여름날에 내가 사는 곳으로 내려오셨다가 깊은 눈물을 소리내면서 흘리셨다. 이 땅의 엄마만이 느낄 수 있는 애가 끊어지는 것 같다며 내 손을 잡고 오랫동안 방바닥을 치며 우셨다.

그 때의 나는 중증청각장애인이지만 이 땅에 장애인등록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세상에 홀로서기를 막 시작했지만 위자료를 받았거나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등록되지 않은 컴맹, 운전맹으로 말씨도 택시를 타면 사람들이 화교인지 재일교포, 동남아인지 물어볼 정도로 많이 어눌했다.

단지 조그만 서예교습소를 월세를 내며 운영하고 있었고 '나는 하루 두 끼 소식이고, 별로 소비생활도 안하니 위자료를 못 받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괜찮아요!' 하면서 엄마가 보면 그냥 답답하고 멍청해 보일정도로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단순하게 지냈다.

엄마가 애 타게 내 손을 잡고 우셨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이혼했다는 것이나, 집도 의료보험도 없거나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경제적인 역량이 미흡하다는 염려가 아니다. 유독 정감이 똘똘넘치는 막내의 특성에 피붙이 두 딸과 헤어져 살아가야가는 쓸쓸한 비애감과 엄마를 그리워할 외손녀들이 겪어야 할 마음고생들이 훤히 보이시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등생, 중학생이었던 두 딸들은 내가 이혼을 한 후  '가정'과 '가장' '가족사랑'' 자녀의 존재감' 등의 여러 가지 정체성의 혼란에 빠졌다. '새엄마와의 갈등' '이산가족' 등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마음고생이 극심했던 딸 중의 하나는 안 그래도 사춘기라서 내적인 고통이 원인이 되어 많이 아파서 외국어고등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아이가 학교도 못 가고 한창 아프다가 생사의 고비를 알 수 없는 와중이라는 연락만 팩스로 왔고 병원은 적히지 않았다. 10년 전에는 문자 메시지도 없었기에 전화도 할 수 없었던 나는 알아낼 방법이 없어 딸을 만나러 갈 수 없었는데 딸은 나를 간절히 찾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엄마가 애장이 꼬이며 아프다던 그 생생한 아픔을 그 날 나도 경험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꼬이는 배를 바닥에 엎드리며 간절히 기도를 거듭하는 것 밖에 없었다.

다행히 딸은 의식을 회복했고 회복하자마자 "우리엄마에게 데려다 주세요!" 하고 강하게 요구해 내가 왔다. 하지만 내가 보살필 따스한 집과 경제적 능력이 없어 인천의 외할머니댁에, 또 다른 딸은 새엄마와의 갈등으로 친할아버지댁에 떨어져 살았다.

두 딸들이 처음부터 나와 함께 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 땅의 중증장애인이 대부분 그렇듯, 사회적인 차별 환경과 경제적 자립이 넉넉하지 못해 두 아이의 학자금과 생활비 감당이 어려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엄마와 자식이 떨어져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체험을 한 이후로 두 아이들은 상처받은 마음을 새롭게 도닥이며서 집중하여 공부를 했고 , 나 또한 죽자고 생존의 절박함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하나씩 갖춰나갔다.

시한부 3개월이란 암선고를 받았는데도 친정엄마는 꼭 필요한 외할머니와 친정엄마란 존재감 탓에 살아야할 강한 이유가 생겼고 그것이 암을 주춤하게 만들었다고 회상하셨다. 강남성모병원이 정말로 드물고 드문 경우라고 할 정도로 친정엄마는 4년 동안  암과 투병이 아닌 사이좋게 지내면서 우리 아픈 딸아이에게 사랑을 듬뿍주면서 잘 돌봐주셨다. 

덕분에 아이는 외국어고등학교 복학을 하지 않고 고졸검정고시와 수능을 무사히 잘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곳으로 와서 나와 함께 어려운 환경속에서 우여곡절끝에 사범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주경야독이라고 낮에는 가르치고 밤에는 외국어대학원 공부를 한다.

그리고 다른 아이도 새엄마와 살면서 과식증과 거식증이 반복될 정도로 위장장애를 겪었으나 고졸을 하자마자 졸업장도 받지 않고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대학을 가서 3년 만에 전체수석으로 학사졸업하고 다시 의사가 되겠다고 주독야경으로 공부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만들어가고 있다.

두 딸들이 내 곁으로 올 수 있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얘들아! 엄마와 같이 살자!" 고 끊임없이 말하거나 " 두 딸들과 함게 살게 해 주세요!" 하고 전 남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체험했다. 아이들은 사랑을 원하지만 그 사랑은 아이들의 빈 마음을 채워주는 따스한 가슴과 부드러운 손길만이 아닌 하나의 능력도 포함되어 있어야 했다.

부모다운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눈물은 남몰래 흘리면서 자주 더불어 웃으려고 노력하면서 새끼들을 품에 안을 수 있는 날개를 키워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 날개는 내적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포용력과 더불어 외적으로 자본주의 물질세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헤엄을 칠 수 있는 경제능력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쉴 새없이 날개의 잔털이나 길어지는 발톱을, 거친 세파와도 같은 바위에 비벼서 다듬어야 하는 큰 새들의 생태와도 비슷했다.

적어도 중증여성장애인인 내가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살아가면서 경험한 것은 그랬다. 절대로 물질적인 자급자족능력이 없이는 사람의 목숨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한 구성원으로서 역할하기는 너무 자주 무안해지고 눈치가 보여 숨고 싶게 만드는 것이 이 나라였다.  

친정엄마는 두 딸 중의 작은 아이도 내 날개밑으로 돌아와서 세 모녀가 한 지붕밑에 살아가게 된 것을 보고 5년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돌아가시면서 친정엄마가 기증한 눈과 간과 신장을 이식받은 3사람의 누군가는 아직도 잘 살고 있다.

10년 전에 있었던 나와 두 딸들을 힘들게 하던 부정적인 상황들이 많이 사라졌다. '이산가족' '부모의 존재감'등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던 아이들의 사고 방식도 꼭 양부모아래서만 살아야만 하는 것이 행복한 가족이 아닌 '한부모가족' '대안가족' 등에 대한 가족형태도 당당하고 멋진 가족형태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가치관으로 많이 변화되었다.

10년 전에 살아계셨던 우리엄마는 그 시대에 참 드문 억척어머니였다. 병고에 시달리던 시어머니와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간병하면서도 자식교육 뿐 아니라 세상을 말없이 많이 사랑하고 실천하고 가셨던 엄마였기 때문이다.

그런 친정엄마의 사랑덕분에  10년 전의 나는 세상문턱을 넘어서다가 넘어진 채로 주저앉아 눈치만 많이 보고 있던 구제불능의 실패한 존재 같았던  나도 엄마의 반은 못되지만 닮은 꼴이 되려고 노력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지난 10년 전에 세상속으로 걸어나온 나를 가로막았던 장벽이었던 '컴맹' '운전맹'' 언어 어눌함' '대인관계기피증''조울증' 등에서 벗어났고, 비장애인들이 99%를 차지하는 새로운 직종에 도전하고 자격을 취득해서 일하고 있다.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의 특이체질로 인한 여러 질병과 친구하며 10년 간 매주 병원을 다니며 지낸다. 세상의 높은 문턱에 여러 번 걸려 넘어졌던 나는, 세상속으로 가서 세상과 하나 되어서 열심히 하루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어차피 빨리 가나 늦게 가나 돌아오지 못하는 시간의 길이기에 가급적이면 바람을 자주 마시고 햇빛과 하늘을 많이 쳐다본다.

10년 전엔 혼자라고 느껴 많이 두려웠던 세상살이였지만 지금에는 여럿이 함께가는 길...
10년 전과 그대로인 것들도 많다. 외적인 상황은 여전히 나는 이혼녀이고 그 달 일을 해야만 그 달을 살아가는 중증여성장애인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친정엄마의 따스한 가슴의 체온을 느끼고, 두 딸들의 손도 영혼으로 꼭 잡으면서, 아직도 많이 남은 문턱들이 숨어  있음을 감지하면서 숨 고르기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  아무에게나 속을 열어 금세 속살에 상처 생기는, 그래서 누구나 쉽게 다가서는 못 생긴 나무이기는 하지만...

덧붙이는 글 |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응모글



태그:#여성장애 가장, #좋은 엄마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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