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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폭설 내리고

바람 그 위로 미끄러질 때

바람보다 먼저 넘어진

사람 얼굴 하나 있어

그 얼굴 일으켜 찬찬히 보았네

오호라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비명을 지르며 나를 끌어안았네 - 서석화 <자화상>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은?"

"나!"

"세상에서 절대 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것도 나!"

 

생각해보니 꼭 십 년 째다. 이런 싱겁고도 할 일 없는 질문을 내가 나에게 하곤 했던 게. 너무 뻔해 하고 나선 혹시라도 놓친 행간의 의미라도 있나 한 자 한 자 되짚어보는 버릇도 있다. 쓸데없고 바보 같다고 머리를 흔들면 긴 머리칼 사이로 후드득 쏟아지는 지난 십 년 세월. 그래. 나는 지난 십 년 동안 나하고만 친했었고 동시에 내가 제일 싫었었다.

 

새천년이 왔다고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폭죽을 터트릴 때, 눈뜨면 새로운 구원자가 나타나 우리 모두를 에덴동산으로 데려다줄 것 같은 기대가 저절로 생겨날 때, 그래서 사람들 가슴마다 꿈과 희망의 애드벌룬 하나 씩 품어질 때, 나는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이브처럼 그 모든 것들로부터 추방되었다. 어머니가 쓰러졌다. 뇌출혈! 회복불가! 그 뒤 이어진 응급실과 중환자실, 입원과 퇴원….

 

새천년 폭죽과 함께 찾아온 어머니의 뇌출혈 소식

 

낡아서 찢겨진 인형 같던 중환자실의 어머니. 우르르 몰려왔던 친척들이 돌아가고 난 저녁, 중환자 보호자실 구석에서 난 혹시라도 내 이름을 부르며 날 찾는 간호사가 올까 귀 막고 눈 감은 채 공처럼 몸을 말고 떨었다. 재작년 어머니 왼쪽 가슴에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인공심장박동기를 삽입하는 시술을 받게 됐을 때도 그랬고, 한 바가지나 되는 피를 토해 갑자기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셨을 때도 그랬다.

 

중환자실에 환자를 둔 중환자 보호자실의 경우, 면회 시간 전에 보호자 이름이 불려지며 찾는다는 건 환자에게 위급한 상황이 왔거나 그보다 더한 경우 임종도 못 지킨 채 이미 사망했다는 걸 뜻했다. 절대 날 부르지 말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면서도, 혹시라도 불렀을 때 못 들으면 어떡하나 자판기 커피 한 잔도 마음대로 빼 먹으러 갈 수 없었던 그때, 시간은 길고도 캄캄했지만 동시에 이런 시간이라도 더 길게 이어지길 나는 정신병자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자식이라곤 달랑 너 하난데, 이 일을 어쩌냐?"

"하고 많은 병 다 두고 하필이면 병중에도 몹쓸 중풍이라니…."

"중풍은 합병증도 많다더니 심장이 다 망가졌나보다."

"기약 없는 이 수발을 너 혼자 어떻게 해오고 있니? 벌써 몇 년 째야? 강산이 변할 세월인데."

"형제라도 하나 있으면 좀 좋아? 다 남뿐이니."

 

'어쩌나, 어쩌나'를 선심 쓰듯 들려주곤 할 일 마친 사람처럼 삼삼오오 짝지어 돌아가던 친척 지인들. 그들의 말 한 마디, 설핏 보이던 눈물 한 방울에도 와락 의지하고 싶던 순간, 비로소 나는 내 외로움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말한 '자식이라곤 달랑 너 하나'와 '너 혼자 어떡하니'라는 말 속엔, '우리는 너와 남이야. 그래서 이 모든 책임은 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거야'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친한 친구로 삼기 시작했다. 내가 나에게 말 걸고 내가 나에게 의논하며 내가 나를 위로했다.

 

혐오와 수치감을 나는 나 자신에게서 보다

 

발병 후 넉 달간의 병원 생활을 끝내고 지방에 계셨던 어머니의 살림을 정리해 서울로 모시고 와서 2년간, 우리집 부근의 작은 아파트를 하나 얻어 잠자는 시간을 빼곤 어머니 집에 머물며 두 집 살림을 해야 했던 그때, 외가 쪽 친척하나 없는 서울 땅에서 말벗해줄 친구 하나 없이 나만 오길 기다리는 어머니. 그러면서도 둘이 마주보고 있으면 서로가 불쌍해서 가슴 저미던 시간들.

 

지팡이를 짚고도 다른 팔로는 온몸의 힘을 다 모아 내 손을 붙잡고서야 걸음을 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일으켜 매일 걷는 연습과 목욕을 시키고 하는 동안, 내겐 걸을 때마다 어머니 무게를 온전히 짊어진 어깨 관절 사이 연골이 찢어진 것부터 시작해, 목엔 디스크, 위축성 위염에 불면증,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터지는 증세까지 병명을 늘려가며 병원 순례를 해야 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너무도 왜소한 어머니지만 넘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공포까지 더해진 몸무게를 받치는 일을 감당하기엔 나 역시 44kg, 맑은 하늘도 철따라 지천에 핀 꽃도 보이지 않았다.

 

운동을 끝내고 청소와 빨래 식사 준비까지 끝낸 뒤 밤늦은 시간 어머니를 두고 돌아올 때면, 남편도 아이도 나 자신조차도 다 떼어내 버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안쓰럽고 걱정되어 나는 미쳐 가는데, 아내로서 그리고 중학생 아들을 둔 엄마로서의 내 삶은 조금도 날 봐주지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왜 나를 걱정해주지 않았겠는가. 잠자는 시간 말고는 언제나 부재중인 아내와 엄마의 빈자리에 불편 또한 얼마나 컸겠는가. 밤중에도 홀로 계신 어머니 걱정에 몽유병자처럼 온 집안을 서성이다가. 끝내는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고 우는 날이 부지기수인 내 모습에 그들의 잠인들 편했으랴. 온 신경이 어머니에게로만 향한 채 미이라로 변해가는 내 모습이 그들에겐 또 다른 공포요 불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끊임없이 바랐던 것 같다. 내 쪽에선 의논도 도움 요청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먼저 베풀어 줄 따뜻한 위로와, 우리도 있다는 응원 혹은 지지 같은 것! 바라는 것만큼 가슴 안엔 피폐한 내가 시간시간 자라나고 있었다. 온 몸, 핏줄 하나까지도 조여오던 부담감과 질식할 것 같던 막막함. 부담과 막막함이란 감정 앞에서 지쳐가던 나를 발견하던 날, 그 혐오와 그 수치감을 나는 나 자신에게서 보고 말았다.

 

"세상에서 누가 제일 싫니?"

"나."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날이 많아졌다. 날 낳아준 어머니와 7년 연애해서 결혼한 첫사랑 남편, 내 심장보다 귀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이들에게 부담과 막막함을 느낀 내가 나는 정말 싫었다. 겨우 이 정도였나? 당연히 해야 될 의무조차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려야 할 만큼 내 사랑은 이것 밖에 안 되는 거였나?

 

이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어떻게 해야 하나

 

2년 후, 주변의 권유와 표면적으론 어머니의 간청에 승복한 모양새지만 나는 어머니를 요양시설로 모셨다. 자식보단 차라리 남한테 의지하는 게 더 편하신 걸까? 어머니는 몸도 마음도 평화로워 보이신다. 어머니의 그 평화 곁에서 우리 모녀는 서로에게 하는 말이 바뀌었다. 곁에 있을 땐 거의 숨 쉴 때마다 반복하셨던 미안하다는 말 대신 한 달에 한 번 찾아뵐 때면 고맙다는 말을 꼭 그만큼 하시는 어머니, 곁에서 모실 땐 이렇게라도 살아줘서 고맙다고 늘 해 왔던 내 말이 이젠 모시지 못해 미안하다고, 우린 서로 반대되는 단어를 나눠 가진 것이다.

 

어머니 쓰러진 지 올해로 꼭 십 년. 나는 그동안 세상 속에서 철저히 나를 가두고 살았다. 이래저래 얽혀 있는 모임은 물론 직책상 도리상 꼭 참석해야 하는 문단 행사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은둔과 칩거가 너무 길다면서 무슨 대단한 작품 쓰는 중이냐는 동료 선후배들의 전화를 받을 때면, 아주 잠깐씩은 흔들리는 나를 본다. 차라리 그들의 말처럼 작품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걸어 잠근 은둔과 칩거라면 어쩌면 호탕하게 웃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요양시설에 모신 죄의 형기를 살고 있는 중, 그래서 근황조차 솔직하게 밝힐 수 없어 언제부턴가 걸려오는 전화조차 받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이제 내 나이 쉰, 귀신도 눈에 보인다는 나이를 지나고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 아수라장 같던 지난 십 년을 돌아보는 요즘, 화들짝 나를 깨우는 정말 큰 죄가 떠오른다. 어머니 요양시설 입소 후 8년 동안 치약 하나 휴지 하나도 그곳으로부터 받는 일 없이 살뜰하게 챙겨드리고, 천하에 둘도 없는 효자라도 뜸해진다는 긴 기간 동안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잘하냐는 칭찬에 가끔은 동조하기도 하며, 억지로라도 내가 나를 덜 미워하려고 애쓰면서도, 나는 오히려 죄의 무게를 더 늘였던 것이다. 그건 한 번도 기쁘고 행복한 표정을 어머니께 보여드리지 못했다는 자각이었다.

 

요술방망이처럼 어머니에게 필요한 건 미리 알아채 해드렸고, 또 해드리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진짜 어머니가 원하는 건 눈치 채지도 못한 지난 십 년, 죄 중에도 제일 큰 죄를 나는 의식도 못한 채 계속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지, 나의 그런 절망의 표정이 어머니껜 더 큰 아픔과 자격지심을 일으키게 한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양심에 빗대어 최선을 다하려 애쓰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으니, 이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어떻게 해야 하나.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면 웃는 연습을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면 거울 앞에서 웃는 모습을 연습해 본다. 기쁘고 행복해서 삶이 평화롭다고 조리 있게 말하는 연습도 해본다. 십 년 만에 정반대의 캐릭터로 배역 배정을 받은 배우들의 심정이 이럴까? 낯설고 어색하고 도무지 내가 나 같지 않아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는 시간이 길다. 하지만 연습만큼 소질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으며, 그것보다 더 빠른 지름길은 배정 받은 캐릭터에 몰입 동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배역의 삶을 내가 사는 것. 결론은 내가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게 어머니를 그렇게 사시게 하는 길이란 사실이다. 둔한 머리가 깨어지는 소리, 자식을 키우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걸 몰랐었다.

 

십자가는 멍에가 아니라 구원의 증표다. 지난 십 년을 살아내면서 나는 나를 누르는 고난의 무게에 순응하기만 했지 그것이 나를 구원해 줄 무엇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러나 이젠 안다. 느껴진다.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내 어머니가 나를 살게 했다는 것, 어쩌면 딸한테 닥쳤을 지도 모르는 불행을 어머니가 온몸으로 막아냈을 거라는 것, 그래서 나와 내 가족이 이만큼 안전할 수 있었다는 것. 나를 눌렀던 고난의 무게는 어머니가 져 준 십자가의 또 다른 구원의 증표였다는 것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로소 제대 앞에 촛불을 밝히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내 어머니에게 기쁜 딸이 될 것이다. 행복한 딸이 될 것이다. 당신 쓰러진 후 세상과 연을 놓은 것처럼 집안에만 갇혀 있다고 걱정하시는 어머니께, 동네 마트에 가면서도 근사한 모임에 간다고 들뜬 목소리로 전화하는 딸이 될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웃기는 이야기를 채집해 어머니를 웃게 하는 딸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심스럽게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것이다. 사실 그 첫걸음이 <오마이뉴스>시민기자인 아들의 권유로 시작하게 된 <오마이뉴스>시민기자로의 이런 글쓰기다.

 

그간 여러 권의 책을 냈으면서도 한 번도 경험 못한 실시간 내 글을 읽은 조회 수 확인, 숫자만큼 친구 형제가 생긴 것 같은 뿌듯함과 함께, 나 역시도 그들에겐 친구요 형제가 되 주고 있을 수도 있다는 위안은, 내게 많은 무장을 한꺼번에 해제시켜주는 자유로움을 선물로 주었다. 

 

이걸 아는데 꼬박 십 년이 걸렸다. 오늘은 날씨가 참 맑다. 어디선가 성급하게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 굳었던 심장에 미리 맡는 향내 아름다운 날이다.

덧붙이는 글 | <창간 10주년 기사 공모>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응모 작품


태그:#새천년, #십년, #십자가, #구원, #기쁜 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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