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강윤후 시인이 쓴 <불혹 혹은 부록>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40대의 삶을 사는 이 시대 가장들의 허탈한 마음을 담은 시다. 이 시는 수 년 전에 방송됐던 MBC 주말 드라마 <떨리는 가슴>에서 가수 겸 배우 김창완이 곡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이 시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더욱 가슴 깊이 와닿을 것이다. 40대의 나이에는 은퇴 후에 지도자 혹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혹 현역에 있다 하더라도 '최고령 선수'라는 반갑지 않은 타이틀 속에 팔팔한 후배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쓸쓸히 현역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나 이 선수는 다르다. 비록 전성기는 지났지만, 4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2경기에 한 번 꼴로 마운드에 올라 독수리 군단의 마운드를 지탱하고 있다. 그가 없는 한화 이글스의 불펜은 아직 상상할 수 없다. 영원한 '대성불패' 구대성(40)이다.

일본킬러- 정규리그 MVP- 한국시리즈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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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고 시절부터 팀을 청룡기 우승으로 이끌며 주목받은 구대성은 이후 한양대에 진학해 정민태(히어로즈 투수코치)와 함께 '좌대성 우민태'로 대학야구와 대표팀을 넘나들며 맹위를 떨쳤다.

특히 일본전에 유난히 강해 '일본킬러'로서 명성을 얻었다. 김광현(베이징올림픽), 봉중근(2회WBC), 양현종(2009 한일 챔피언십 시리즈) 등 일본전에 호투한 투수들이 등장할 때마다 야구팬들의 뇌리에 구대성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구대성은 1993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했고, 2년차이던 94년 7승 8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60으로 이름값을 하기 시작한다. 비록 1995년에 4승 14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3.54로 잠시 주춤하지만, 그것은 리그를 지배하기 위한 잠깐의 움츠림이었다.

구대성은 프로 4년차이던 1996년에 타자의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을 지배하는 완벽한 코너워크와 마구에 가까운 슬라이더를 앞세워 18승 3패 24세이브 평균자책점 1.88이라는 만화 같은 성적을 거뒀다.

구대성은 그 해 다승, 평균자책점, 세이브, 승률 부문을 싹쓸이하며 시즌 MVP에 오르는 영예에 올랐다. 같은 해, 프로야구 최초로 30-30클럽을 달성한 '괴물신인' 박재홍(SK 와이번스)도 '대성불패의 강림' 앞에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매년 40경기 이상 마운드에 오르며 100이닝 이상을 책임지던 구대성은 1999년 한화 이글스 창단 첫 우승의 주역이 되며 자신의 야구인생에 '화룡점정'을 찍게 된다. 한국시리즈 1승 1패 3세이브. 시리즈 MVP도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후배들에게 병역혜택 안겨준 '합법적 병역 브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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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식의 181구와 김홍집의 141구. 각각 1993년과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한 경기를 완투하면서 던진 두 선수의 저 투구수는 야구팬들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숫자들이다. 아름다운 투혼의 상징이면서  에이스에게 모든걸 의지해야 했던 시절의 씁쓸한 기억이다.

이후 한국 야구는 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구대성, 임창용(야쿠르트 스왈로즈), 진필중(은퇴) 같은 걸출한 마무리 투수가 등장했고, 투수들의 분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박충식이나 김홍집처럼 한 경기를 모두 책임지는 투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쉬움과 허탈함 이 환희와 기쁨으로 바뀌었다는 점. 이번에도 주인공은 구대성이다.

시드니 올림픽 3-4위전. 굳이 젊은 선수들의 병역 혜택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결코 놓칠 수 없는 한일전이었다. 선발 투수로 나온 구대성은 15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일본 타선을 단 1점으로 막아냈다.

'일본 킬러'의 명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후배들에게 병역 혜택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안겨준 의미있는 완투승이었다. 이 호투는 일본 프로야구 스카우터의 눈을 사로잡았고, 구대성은 2000년 시즌이 끝난 후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하게 된다.

한미일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한 역대 두 번째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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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성은 일본에서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4년동안 24승 10세이브를 챙겼고, 2002년에는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구대성은 2005년 시즌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에서 활약했고, 국내 복귀가 확정된 후에는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8이닝 1실점이라는 안정된 투구로 대한민국의 '퍼펙트 4강'을 견인했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 일본과 미국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한 선수는 이상훈과 구대성 뿐이다(공교롭게도 두 선수는 프로 입단 동기다).

구대성은 복귀 후에도 2006시즌 37세이브, 2007 시즌 26세이브를 따내며 리그를 대표하는마무리 투수로 건재를 과시했다. 특히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홀로 권오준-오승환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KO펀치'와 대등한 승부를 펼치기도 했다.

비록 2007 시즌이 끝난후 무릎 수술을 받으면서 마무리 자리를 외국인 투수 브래드 토마스에게 내줬지만, 여전히 최근 2년 동안 109경기에 등판하면서 한화의 주축 불펜 투수로 활약하고 있다.

'회장님' 송진우 은퇴, 이젠 '최고령 투수' 타이틀까지

지금까지 구대성은 나이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았다. 그의 위에는 언제나 '회장님' 송진우(1966년생)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년 시즌부터 송진우는 없다. 구대성보다 세 살이나 어렸던 정민철마저 은퇴식을 치렀다.

이제 내년 시즌 프로야구에서 구대성보다 나이 많은 투수는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프로야구 최고령 투수'라는 타이틀을 안고 가야 하는 입장이다.

통산 214개의 세이브에 1124이닝 동안 1218개의 삼진을 잡아낸 무시무시한 파워피처. 이제는 전설로 기억되고 있는 선동열이나 최동원의 기록이 아니다.

여전히 내년 시즌 프로야구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당당한 현역 투수, 구대성의 피칭을 직접 볼수 있는 이 시대의 야구팬들은 분명 커다란 행운을 타고난 것이 분명하다.

구대성 한화 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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