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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고분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분들이 군집을 이뤄 배치되어 있다
▲ 대성동고분군 측량도 대성동고분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분들이 군집을 이뤄 배치되어 있다
ⓒ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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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눠진다. 전기는 가락국, 즉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연맹체를 중심으로, 후기는 반파국, 즉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연맹체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물론 이러한 국가 외에 수많은 가야소국들이 각자의 사활을 걸며 발전을 도모하고 생존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세력들이 흥하고 몰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중심은 역시 수로왕의 나라인 금관가야였다. 금관가야는 일찍부터 낙랑, 왜 등과 교역을 통하여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였으며, 그들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철은 이들을 강대국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의 김해에는 이런 금관가야의 여러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도 대성동고분군은 가장 중심된 고분군으로 금관가야의 왕들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다른 유적들에서 나온 유물들에 비해 격이 높고, 유구의 모습 또한 더욱더 크고 정교하게 되어 있다. 주로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곳은 가야국의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왕은 총 9명이라고 나온다. 수로왕과 거등왕 이후로 9대손인 구형왕까지 있는데, 이러한 계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후기의 왕들의 경우엔 어느 정도 신뢰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가락국기가 저술되면서 정리된 계보로 보인다. 즉 사실상 금관가야의 왕 계보는 미스터리 속에 남아있다고 봐야겠다. 더불어 가야의 역사를 이끌어 나갔던 왕들의 무덤도 그 소재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대성동고분군 내에는 136기의 고분들이 있다. 이 중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여러 고분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왕들의 안식처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있다. 바로 1호분과 29호분, 39호분이 그것으로서 이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며 당시 왕들의 마지막 모습을 유추해보도록 하자.

죽은 자를 위해 산 사람을 죽여라! 대성동 1호분

발굴된 모습으로서 작지 않은 규모이다. 이곳에서는 피장자 외에도 순장자가 3~5인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 대성동 1호분 모습 발굴된 모습으로서 작지 않은 규모이다. 이곳에서는 피장자 외에도 순장자가 3~5인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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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은 주로 조사된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지기 때문에 사실 번호 자체는 크게 중요하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대성동 1호분의 경우 1번이라는 번호가 부끄럽지 않게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그 규모도 꽤 큰 편이다. 대성동 1호분은 목곽묘, 즉 덧널무덤으로 보고 있는데 금관가야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주로 이런 덧널무덤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이런 무덤의 규모가 기존의 널무덤에 비해 커지고 유물들도 많이 매납되고 격이 높아지며 순장된 피장자들도 더러 눈에 띄기 때문이다.

1호분은 주곽과 부곽으로 나눠져 있으며 주곽의 경우 길이가 6m이며, 너비가 2.3m이다. 주곽은 무덤의 주인공, 즉 피장자를 매장하는 곳을 말하며, 부곽은 피장자가 저승세계로 가지고 갈 물건인 껴묻거리들을 매납한 곳을 말한다. 애초에는 2호분과 연결된 모습을 보여, 거기에 딸린 부곽으로 보았지만 유물들을 살펴본 결과 1호분의 부곽으로 판명되었다. 이렇게 물건들을 저승으로 같이 보내긴 하지만 이보다 더한 것도 잇었다.

1호분의 매장 당시 모습을 최대한 복원한 것으로서 여러 유물들과 순장자들의 흔적이 보인다
▲ 대성동 1호분 복원모습 1호분의 매장 당시 모습을 최대한 복원한 것으로서 여러 유물들과 순장자들의 흔적이 보인다
ⓒ 대성동고분박물관 전시안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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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껴묻거리삼는 것, 이를 순장이라고 한다. 즉 묘의 주인공 이외의 사람이 같이 묻히는 것을 말하며, 가야의 고분에서는 이러한 순장이 더러 나타나는데 이를 가지고 당시 사람들의 위계관계를 살펴보곤 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서도 순장의 기록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며, 사실 이는 우리 민족만의 특수한 풍습이 아닌 세계적으로 나타난 하나의 풍습이었다. 인권을 존중하는 오늘날엔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당시엔 오늘날과 사상적으로 달랐기에 가능하였다.

대성동 1호분은 묘의 주인공이 제일 가운데에 묻히고 그의 옆과 아래에 순장자 또한 묻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는데 고배, 유개장경호, 발형기대 등의 토기류와 자귀, 보습 등의 철제 농기구, 화살촉, 창, 등자 등의 무기와 마구가 출토되었다. 특히 통형동기(筒形銅器)라는 유물도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은 철제 창의 끝에 끼우는 물미로 생각된다. 창의 끝에 이런 것을 끼움으로서 내구성을 더 강하게 하고, 혹은 제례 의식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1호분은 여러차례에 걸쳐 도굴되었고,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크게 도굴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유물들이 여럿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당시의 매장 풍습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유적들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역할이라 하겠다.

돈침대, 아니 철침대에서 마지막을 보내다

29호분과 39호분의 모습으로 39호분이 29호분의 일부를 파괴하며 조성된게 특징이다
▲ 대성동 29호분과 39호분 29호분과 39호분의 모습으로 39호분이 29호분의 일부를 파괴하며 조성된게 특징이다
ⓒ 대성동고분박물관 전시안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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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29호분은 39호분과 함께 노출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이라기보단 매장 당시의 모습으로 최대한 복원한 것으로서 사실 당시엔 현재보다 유물들이 적거나 부숴진 게 많았다. 하지만 이 고분들로 인하여 우리가 그 당시 사람들의 매장풍습을 알 수 있으니 소중한 자료라 하겠다.

29호분은 대성동고분군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고분 중 하나이다. 무덤의 크기는 길이가 9.6m, 너비가 5.6m에 이르고 무덤에서 껴묻거리를 놓는 쪽과 피장자가 묻힌 쪽으로 나눈게 특징이다. 단지들을 질서정연하게 놔두었는데 6×8열로 나열하였으며, 덩이쇠도 91점 가량 열을 지어 깐 것이 특징이다.

다른 무덤보다 너무나도 질서정연하게 된 모습이 피장자가 왠지 결벽증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마저도 들게 한다. 특히 눈여겨 볼 만한 점은 덩이쇠[鐵鋌]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덩이쇠는 당시에 통용되던 화폐로서 이른바 철덩어리이다. <삼국지>에도 이를 화폐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에 덩이쇠를 가공하여 철제품을 만들었다.

청동솥은 주로 북방민족들이 사용하던 유물로서 이를 통하여 당시 금관가야의 활발한 교역활동을 엿볼수 있다
▲ 대성동 29호분 출토 청동솥 청동솥은 주로 북방민족들이 사용하던 유물로서 이를 통하여 당시 금관가야의 활발한 교역활동을 엿볼수 있다
ⓒ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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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시상대(屍床臺), 즉 침대처럼 피장자가 눕는 부분을 덩이쇠로 깔아놓았다. 이른바 당시의 돈 침대라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현세의 부귀를 저승까지 갖고 가려는 인간의 욕심은 똑같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내세에도 누리고자 크게 무덤을 조성하고 온갖 진귀한 물건들도 다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일까? 영원하길 바라던 그의 운명도 한 세기가 못 지나 무너지고 만다. 그 위로 다른 이의 무덤이 쓰이고, 그럼으로 인하여 무덤의 일부가 훼손되게 된다. 그 훼손된 부분 중 시상대도 있다는 것을 본다면, 아무리 내세를 위해 많은 유물들을 가져가도, 그게 과연 영원히 지속될지는 의문이 생긴다.

29호분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철촉이 300여 점이 넘게 출토되었으며 칼이나 도끼, 철검 등 여러 무기류가 발굴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청동솥이다. 청동솥은 우리나라에선 자주 쓰지 않던 것으로 주로 북방민족들이 사용하였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몽골 도르릭나르스(Дуурлиг нарсны) 흉노 무덤에서도 청동솥이 발견되어 세간의 흥미를 끈 바가 있다. 이러 유물들을 통하여 당시 김해의 활발한 교역을 알 수 있다.

4세기 후반 가야의 타임캡슐, 39호분

주곽과 부곽으로 나눠져 있으며 여러 무기와 갑옷들이 발굴되어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 대성동 39호분 모습 주곽과 부곽으로 나눠져 있으며 여러 무기와 갑옷들이 발굴되어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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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분은 앞서 말한대로 29호분의 일부를 파괴하면서 조성된 무덤이다. 이 또한 덧널무덤으로서 주곽과 부곽으로 나눠진다. 주곽은 길이 5.6m, 너비 3m이며, 부곽은 길이 2.6m, 너비 3.2m이다. 흥미롭게도 이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출토되었기에 4세기 후반의 가야 무덤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일단 주곽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곽의 남쪽과 서쪽면에는 토기들을 두었으며 북동쪽에는 투구 2점과 갑옷을 놔두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목가리개와 허리가리개, 갑옷부속구와 칼 등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통형동기와 철제 창, 그리고 2구의 순장유골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부곽은 토기를 가득 메웠으며 토기 사이에서 재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곽은 애초에 주곽을 보조하는 용도를 갖는다. 따라서 주곽에 미처 다 넣지 못한 물건들을 부곽에 넣기도 하는데, 이는 내세에서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해주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도가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많은 수의 갑옷과 무기들이 발견되어, 삼국의 갑옷과 무기를 연구하는데 있어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 대성동 39호분 출토 갑주 가야는 많은 수의 갑옷과 무기들이 발견되어, 삼국의 갑옷과 무기를 연구하는데 있어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 김해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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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과 무기들이 출토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전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는 전쟁이 굉장히 많아지고 군인들이 그만큼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된다. 39호분의 피장자 또한 갑옷을 입은 채로 매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활발한 정복전쟁의 소산물로서 가야 내부터 소국끼리는 물론 주변을 에워싼 세력과의 싸움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물들을 위세품으로 판단하고, 실제로 사용하였다기보다 단순히 지배층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하여 매장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엔 우리의 생각보다도 많은 전쟁이 있었고, 지배층 또한 스스로의 권익과 백성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9호분은 이런 점에서 당시의 유물들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 또한 소중하게 여겨지지만, 이를 넘어서 그 당시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대성동고분군 내에서는 이 외에도 수많은 무덤들이 있으며, 그런 무덤들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무덤들은 그런 대성동고분군 내에서도 의미가 깊은 유구들이 많은데, 개중에는 왕릉도 더러 있지 않을까 추정해본다.

사실 삼국시대에는 무령왕릉 외에 다른 무덤들 중에서 과연 무엇이 왕릉이고 그 주인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성동고분군의 고분들은 이러한 수수께끼를 푸는데 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이 많다. 후손된 몸으로서 이에 깊은 관심을 갖고 또 연구하여 조상들의 모습을 알아가는 것, 이게 바로 우리의 사명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주요 고분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주로 왕릉급 무덤들을 주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태그:#대성동고분군, #금관가야, #가야문화권 답사, #김해, #가야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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