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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정비되어 있는 대성동고분군. 크게 대성동고분군과 노출전시관 그리고 대성동고분전시관으로 나뉘어 있다.
▲ 김해 대성동고분군 잘 정비되어 있는 대성동고분군. 크게 대성동고분군과 노출전시관 그리고 대성동고분전시관으로 나뉘어 있다.
ⓒ 다음 스카이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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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분명 맞게 찾아 왔는데 왜 고분들이 안 보이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출발한 우리는 근처에 있는 대성동고분군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정작 고분들은 보이지 않고 큰 언덕과 근처 2개의 건물만 있을 뿐이었다. 고분군이라고 한다면 먼저 큰 봉분들이 연상되는데, 이곳에는 전혀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우리가 바라본 큰 언덕은 바로 애꼬지언덕. 애꼬지언덕을 왜꼬지언덕이라고도 하는데, 이 언덕에는 금관가야의 수많은 무덤들이 잠들어 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무덤들이 잘 드러나지 않아, 처음 이곳에 온 사람들을 굉장히 의아하게 만든다. 이곳이 바로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인 대성동고분군이다.

김해 대성동고분군(金海大成洞古墳群)은 사적 제 34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의 김해 시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높다. 그리고 주변에는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 봉황대유적 등 가야의 여러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이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대성동고분군 내에서 중요한 유물과 유구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유적의 중요성, 그리고 접근의 용이성 등으로 인하여 대성동고분군은 정비가 잘 되어 있는 축에 속한다. 크게 대성동고분군과 노출전시관, 그리고 대성동고분전시관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특히 대성동고분군은 시민들이 편하게 산책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대성동고분군은 왜 큰 언덕 하나가 전부일까?

발굴 전 광경으로 그 전엔 낮은 언덕이었다. 봉분들이 솟아있는 다른 고분군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 대성동고분군 원경 발굴 전 광경으로 그 전엔 낮은 언덕이었다. 봉분들이 솟아있는 다른 고분군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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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고분군은 왜 애꼬지언덕 하나가 전부일까? 부여나 경주에 가면 높게 쌓아올린 봉분들로 이뤄진 고분군들이 많다. 이는 가야문화권 내에서 고령 지산동고분군이나 함안 도항리ㆍ말산리고분군, 고성 송학동고분군도 마찬가지이기에, 더욱더 특이해 보인다. 이는 고분의 양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며, 당시의 묘제와 사상을 보아야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외면상으로는 큰 언덕뿐이지만 발굴된 바에 따르면 이곳엔 고분들이 6개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고 하며 조사된 무덤만 총 136기나 된다. 이곳의 묘제, 즉 고분양식은 다양한데 널무덤, 덧널무덤, 독무덤, 돌덧널무덤, 그리고 굴식돌방무덤와 앞트임식돌방무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된 묘제는 덧널무덤이다.

덧널무덤[木槨墓]은 큰 나무 널을 써서 만든 무덤으로 널무덤[木棺墓]과는 차이가 있다. 널무덤은 나무로 된 관에 시신을 묻고 매장함에 비해 덧널무덤은 큰 널을 짜서 그 속에 관을 넣어두거나 아니면 그대로 안치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고고학에서는 주로 그 규모 등을 가지고 차이를 따진다.

널무덤 다음에 조성된 것이 덧널무덤인데,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총 46기가 있으며 이 중에서 대형 덧널무덤이 30기나 된다. 이들은 언덕의 중심과 능선부에 위치하며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이르는 금관가야 지배집단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그럼 왜 이렇게 많은 무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고분군에서 쉽게 보이는 봉분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덤의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의 경우 봉분을 쌓긴 하지만 그 이후의 무덤양식들에 비해서는 봉분을 낮게 쌓는다.

또한 이 대성동고분군은 무덤을 중복되어 조성한다는 게 특징인데, 이 말은 기존 무덤 위에 다시 무덤을 쓴다는 뜻이며, 나중에 무덤을 쓸 때 기존 무덤 일부를 파괴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게 계속되고 봉분이 뚜렷하지 않거나 흙이 깎아 내려지는 등의 변화 때문에, 지금의 우리는 그냥 큰 언덕 하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가야인들은 왜 무덤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무덤을 썼을까?

대성동고분군의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전시해 놓은 곳으로서 당시의 묘장 모습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 노출전시관 대성동고분군의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전시해 놓은 곳으로서 당시의 묘장 모습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 대성동고분박물관 전시안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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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가야인들은 자신들 선조의 무덤 위에 바로 자신의 무덤을 썼다. 그러면서 그 선조의 무덤을 파괴하곤 했다.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바로 노출전시관에 있다.

노출전시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견된 무덤 중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겨 놓아 복원해 전시한 것이다. 다른 무덤들은 흙으로 덮은 데에 반해 그 모습을 그대로 두었기에 당시의 무덤 축조 방식과 유물의 배치 모습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29호분은 3세기 후반의 왕묘로 보며, 39호분은 4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즉 100년이라는 시대 차이가 나는데, 29호분의 경우 청동솥이나 최초의 가야 도질토기 등 중요한 유물들이 많다.

29호분이 먼저 조성되고, 이를 39호분이 일부를 파괴하면서 조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 29호분과 39호분의 모습 29호분이 먼저 조성되고, 이를 39호분이 일부를 파괴하면서 조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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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덤 간의 중복은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한 다른 금관가야 무덤축조방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이유를 학계에서는 주로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세력교체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조금 달리 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그 이유는 이 시기 동안 가야 역사에서 뚜렷한 세력교체를 보여주는 계기가 없을 뿐더러 무덤 양식과 유물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금관가야 내의 복잡한 내부사정을 오늘날까지 알기는 어렵지만 이를 무조건 정치적 변동으로 해석하기보다 조금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비록 정치적 변동이라고 하더라도 무덤의 일부를 파괴한 것이고 이러한 양상은 계속 보이는데, 이는 좁은 지역 중 일부에다가 계속 무덤을 쓰려고 하는 성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가야인들은 이 대성동고분군의 언덕을 중요시하게 여겼으며 이곳에 무덤을 쓰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고 추측해본다면 꼭 불가능한 추론은 아니다. 기록에서도 고대인들은 소도(蘇塗) 등 일부 지역을 신성한 지역으로 삼기도 하였다는 점을 볼 때, 이곳도 당시엔 일종의 성소(聖所)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대성동고분군, 지금 그곳엔 무엇이 남아있나

봉분이 없는 대신 이를 보도블럭이나 목재를 사용하여 유구의 테두리를 표시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 대성동고분군 유구모습 봉분이 없는 대신 이를 보도블럭이나 목재를 사용하여 유구의 테두리를 표시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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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이곳의 고분군은 29호분과 39호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흙으로 덮어 놓았다. 그 때문에 이곳에 있는 고분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다른 지역의 고분군들이야 봉토를 쌓아 올렸기에 고분군임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지만 이곳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럼 대신 어떤 방식을 사용하여 고분을 구분할까?

바로 보도블록이나 목재를 이용하여 아래의 무덤 모습을 위에서 보여주고 있다. 꽤 독특한 발상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밟고 있는 땅 아래의 고분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또 중첩관계도 어찌 되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또 안내판을 설치하여 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놓았다. 다만 그 설명이 또렷하지 않고 색이 바란 것도 더러 있다는 점이 아쉽다.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놓았다.
▲ 대성동고분전시관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놓았다.
ⓒ 오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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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성동고분전시관을 세워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나 당시 금관가야의 무덤이나 유물들, 그리고 생활모습과 고분의 축조 방법에 대해서 전시를 해 놓고 있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아쉽게도 리모델링을 하고 있어서 내부를 관람할 수 없지만, 당시 가야의 모습을 성심성의껏 복원하여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조성해 놓았다.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기마무사상과 병사들의 모습을 복원하였는데, 그 얼굴의 모습 또한 김해 예안리 12호분과 41호분에서 출토된 두개골을 바탕으로 만드는 등 나름대로 고증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고분형식들의 차이나 유물들의 모습 등도 보기 쉽게 만들고, 당시의 순장 광경까지 복원함으로써 가야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국립김해박물관이 실제 유물들을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대성동고분군박물관은 복원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입지적인 환경이나 고분과 유물의 격으로 볼 때 3세기부터 5세기 정도의 가야 왕족들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가야를 대표하는 고분으로서 비록 봉분이 없어 다른 고분군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지만, 그 속에 숨은 비밀은 어마어마하다. 김해 애꼬지언덕, 겉으로 보기엔 야산보다 낮은 작은 언덕일 뿐이지만, 가야인들에겐 자신들이 가장 우러러보았던 왕족들의 마지막 안식처이자 성소였을 것이다.


태그:#대성동고분군, #김해, #금관가야, #가야문화권 답사,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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