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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에서는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조사 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유적과 유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풍습을 유추해보면서 그들의 문화를 알아갈 수 있는데, 고분은 특히 유적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안겨준다. 그 때문에 고고학에서는 고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또 그동안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발전은 이 고분연구로 인하여 크게 증진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야는 백제와 신라에 비해 국력은 미약한 편이었지만, 고분에 대한 자료는 매우 풍부하다. 중요한 고분군들도 여러 군데에 산포되어 있으며, 이는 가야가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닌 지방분권적인 국가였기에 그 양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가야의 여러 주요한 고분군들 중에서도 김해의 대성동고분군과 고령의 지산동고분군은 전기와 후기가야 연맹체를 주도한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고분군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특별하다.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고분을 살펴보면 비슷한 점과 함께 서로 다른 점도 살펴볼 수 있다. 사실 이는 시대차이가 주원인으로 작용하는데, 가야의 고분문화 중 금관가야의 고분문화가 좀 더 이르고, 대가야의 고분문화는 좀 더 늦은 추세를 보여준다. 이는 고분이 집중적으로 조영된 시기가 서로 다르고, 고고학자들은 그 집중 조영된 시기를 각국의 전성기로 파악하고 있다.

 

가야문화권의 주요 고분은 돌널무덤, 널무덤, 덧널무덤, 구덩식돌방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굴식돌방무덤, 독무덤 등이 있다. 이 중 돌널무덤[石棺墓]은 주로 청동기시대에 사용되었고, 가야뿐만 아닌 전국적으로 널리 사용된 묘제이다. 독무덤[甕棺墓]은 가야시대 전시기에 걸쳐 사용되었지만 주요 묘제는 아니었으며 주로 소형으로 제작되었다.

 

가야시대 주요 고분들, 즉 주로 지배층이나 널리 사용되었던 고분들을 순서대로 말하자면 널무덤, 덧널무덤, 구덩식돌방무덤, 그리고 굴식돌방무덤이다. 대성동고분군에서도 역시 이러한 고분들이 모두 나옴으로서 가야의 고분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주로 널무덤과 덧널무덤에 관한 자료들이 풍부하게 제시되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관가야의 전신(前身), 구야국의 주요무덤인 널무덤

 

 

나무로 관을 짜고 땅을 파서 매장한 무덤을 고고학에서는 널무덤[木棺墓]이라고 하며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무덤은 가야지역에서 널리 쓰인 묘제(墓制)로서 영남지역에서는 주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사용되었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모두 34기가 조사되었는데 대체로 표고 9m 이하의 평지나 거의 평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되었다. 1~2세기 대에 만들어진 것이 많고, 관은 굵은 통나무나 각재를 사용하여서 만드는데, 그동안은 오늘날의 관처럼 판자를 이용하여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하지만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다호리 1호분이, 통나무로 된 구유모양으로 발견되고 나서부턴 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그동안 단순히 판자로만 만들었을 거라는 인식과는 달리하게 되었으며 유구의 조사에 있어서도 이를 염두하고 발굴에 임하게 되었다.

 

널무덤을 발굴해보면 주로 평면이 'ㅍ'자 모양이고 단면이 'ㅂ'자 모양으로 3㎝정도의 두께로 된 판자를 결구시켜서 관을 만든 게 많다. 관 안에는 주로 몸에 지니는 장신구만 넣고, 다른 껴묻거리들은 관 밑의 부장구덩이[腰坑]나 관 밖의 뒷채움흙[充塡土], 혹은 관 위에 두는 경우가 많다.

 

무덤 내의 껴묻거리를 살펴보면 피장자의 신분에 따라 질과 양에서 개인 사이에 큰 차이가 있고 집단 사이에서도 차이가 심하다. 하지만 무덤의 규모나 입지에서는 계층이나 집단차이가 그다지 많이 보이진 않는다. 출토되는 유물은 각종 토기나 철기, 칠기,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와질토기가 대부분이며 철기는 무기와 농공구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장신구는 청색의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나 팔찌가 출토되었다.

 

<삼국지>에 보면 주수(主帥)와 천군(天君)의 존재가 보인다. 당시 구야국을 비롯한 변한의 지도자들은 바로 이 주수와 천군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각각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유적 상으로는 당시의 여러 무덤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아직까지 강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의 모습을 보이기엔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덧널무덤이 조영되는 3세기 이후부터는 이러한 양상도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가락국 중심으로의 통합, 그리고 덧널무덤의 등장

 

 

나무로 곽을 짜고 땅을 파서 매장한 무덤을 덧널무덤[木槨墓]이라고 부른다. 또한 고고학에서는 이러한 묘제를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라고도 부른다. 이렇게만 보면 널무덤과 덧널무덤은 언뜻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막상 직접 보게 되면 그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일단 크기에서도 차이가 나며,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껴묻거리나 짜임새 등에서도 차이가 크다. 학계에서는 이 시점을 구야국에서 가락국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국가체계를 이룬 것으로 짐작된다.

 

덧널무덤은 2세기 중후엽 영남지역에서 나타나는데, 대형 덧널무덤이라고 하더라도 3세기 대까지는 무덤 외부의 봉토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즉 3세기 대의 덧널무덤은 면적에 비해 깊이가 얕은 편이다. 하지만 4~5세기에 들어서는 무덤의 깊이가 매우 깊어지고 그만큼 외부의 봉토도 높아진다. 4세기 전반부터는 따로 껴묻거리를 더 넣기 위하여 부곽(副槨)이라는 시설이 등장하며, 사람을 순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5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묘광의 깊이가 3~4m정도로 다른 형식의 덧널무덤보다 현저하게 깊은 모습을 보인다.

 

덧널무덤에서는 각종의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류, 의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금관가야 전성기의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토기류는 29호분에서 최초의 도질토기가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주로 항아리류가 먼저 등장한 후, 4세기가 되면서 점차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출토된다. 철기류 또한 풍부하게 출토되는데 농공구, 무기, 갑옷, 마구 등이 보인다. 특히 덩이쇠가 다량으로 출토됨으로서 <삼국지>에서 이를 화폐처럼 사용한다는 기록의 사실성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무기들과 갑옷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아 이 시대에는 수많은 전쟁들이 있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특히 갑옷자료 중에서 판갑들이 다수 출토되어 고대의 갑옷과 전술체계를 연구함에 있어서 큰 자료로 활용된다. 또한 마구류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아 당시 금관가야의 지배층에게는 기마를 이용하는 습속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무덤이 커진다는 것은 무덤의 축조에 많은 인원과 물품을 동원함으로서 지배자의 권력을 과시하고, 또한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대규모 제례행사 등을 통하여 당시 지도자의 권위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영남지역에서는 3세기까지 각 지역별로 다수의 소국이 존재하였는데 3세기 후엽부터는 인접한 소국 사이에 서로간의 통합이나 연합이 이루어진다. 김해지역에서는 이를 가락국, 즉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전체적인 가야제국에서도 금관가야의 권력은 이를 대표할 정도로 이른다.

 

강대해진 국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권위 또한 과시할 필요가 있으며 일반인과의 차등을 두기 시작한다. 그게 고분으로 반영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내세관에 있어서도 이를 적용시켜 순장이라는 풍습이 널리 퍼지게 된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을 죽임으로서 저승에서도 피장자의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한 것으로서, 이는 당시 사회의 확연한 계급차이를 말해준다.

 

 

5세기 이후의 가야무덤을 살펴보면 이른바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槨墓]이 주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묘제는 당시 지배자들의 무덤이 된다. 김해지역에서는 두곡유적과 칠산동고분군, 내덕리고분군 등에서 이런 구덩식돌방무덤이 다수 확인되며, 또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된다.

 

그리고 6세기 대에 들어서는 백제의 영향을 받아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 등장하여 널리 퍼지며 기존의 구덩식돌방무덤과 공존하게 된다. 이러한 무덤은 김해지역에서도 여럿 보이지만, 고령이나 함안 등 주로 다른 지역에서 많이 보인다. 또한 가야가 멸망된 이후로도 굴식돌방무덤은 널리 쓰이는데 김해지역에서는 대표적으로 구산동고분군이 있다.

 

이처럼 가야에서는 다양한 무덤들이 있으며, 특히 김해에서는 주로 가야시대 전기에 관련이 깊은 무덤들이 많다. 그리고 이를 대성동고분군은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보여주어 우리에게 당시 매장문화와 국가의 형성을 추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이를 타임캡슐로 여기고 열어봄으로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서로와 교류하는 창으로서 활용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중심으로 가야 고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주로 널무덤과 덧널무덤을 중심으로 고찰하였습니다.


태그:#가야 고분, #금관가야, #가야문화권 답사, #김해, #대성동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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