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화장실> 영화 속 한 장면

<아빠의 화장실> 영화 속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언제나 말은 쉬운 법. 남의 속도 모르고 하는 말은 자기 입장만 전달하면 그만이다. 대표적인 예로 얼마 전 재래시장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한 말이 있다. 상인들이 대형 마트 대형 마트 때문에 죽겠다고 하소연 하자, 이 대통령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운을 뗀다.

"내가 노점상 할 때는, 하소연 할 데도 없었는데."

그리고 시장경쟁체제를 재래시장에도 도입하려는 초강수를 둔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하면 웬만한 건 좀 양이 적어도 농촌에서 보내준다. 농촌에도 전부 인터넷이 다 들어가 있어서 개인이 인터넷으로 (주문) 하면 보내주는데 시장에서는 안 보내주겠느냐?"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위로는 못할망정 '그게 세상의 이치'라는 현실감각을 일깨워 준다. 문제는 왜곡이다. 귀를 닫고 눈을 감자 코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후로 대통령은 재래시장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우루과이 작은 마을에 교황이 방문한다?

 <아빠의 화장실> 메인 포스터

<아빠의 화장실> 메인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우루과이에서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 <아빠의 화장실>을 보면 남일 같지 않다. 제목이 시사하듯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잃어버린 가족의 원형을 찾고, 가정에서 권위를 상실한 아버지의 위상을 추켜 세워준다. 그래서 훈훈하다.

동시에 영화는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현실감각을 배가하는데, 제목에 있는 '화장실'이라는 코드는 일종의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정치풍자를 암시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식상한 말이지만 웃음과 감동이 있는 영화다.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작은 마을 '멜로'. 마을 사람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식료품을 밀매해 생계를 이어간다. 이 작은 마을이 교황의 방문 때문에 시끄러워진다. 1988년 5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멜로를 방문한다는 말에 주민들은 흥분한다. 신앙심 때문에 감격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교황을 보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몫 챙기려는 것이었다.

전 재산을 털어 소시지를 사들였다는 노점상, 빚을 내어 음식을 장만한 아주머니, 솜사탕을 만들려는 머리가 희끗한 노인까지. 멜로 주민들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교황이 오면 가난이 가버릴 줄 알았다. 이때 주인공 비토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생리활동을 할 터이니, 유료 화장실을 만들면 대박이 날거라고 생각한다.

허나 20만 명은 족히 모이리라 예상했던 인파는 실제 8000명에 그치고 만다. 게다가 멜로 주민이 대부분이었고, 기자들이 300명, 브라질 사람들은 고작 400명뿐이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던 교황은 다시 오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무지개는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답다. 마찬가지로 희망은 야누스 얼굴처럼 성공과 좌절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속 희망은 의외로 소소하다. 한 집안의 가장인 비토는 자전거를 타고 국경을 넘나들며 생필품을 밀매한다.

그가 페달을 밟고 지나가는 국경지대의 야트막한 초원과 그 초원 위를 점점이 수놓고 있는 소 떼들의 모습은 목가적이다. 비토는 배달료로 받은 푼돈으로 가족들의 일용할 양식을 책임진다. 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런 아내와 딸이 있다. 딸의 소원은 기자가 되는 것이고 비토와 그의 아내는 딸의 소원을 이뤄주는 게 삶의 목표다.

본디 가장의 가장 큰 임무는 가족들이 달콤한 꿈을 꿀 수 있는 잠자리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더불어 사치가 아니라면 오토바이를 하나 장만하고 싶은 게 아빠의 소박한 꿈이다. 문제는 오토바이보다 더 급한 딸의 학비를 마련하는 일이 녹록치 않다는 거다. 영화 속에서 비토의 자전거 페달이 바삐 움직일수록 삶의 여유는 페달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달아난다.

'희망의 부재'를 말하는 영화... 그래서 우리네 현실과 닮았다

 자전거는 아빠의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자전거는 아빠의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 영화사 진진


<아빠의 화장실>은 이상보다는 현실에 주목한다. 멀리서보면 원대한 이상에 가까워 보이던 것들도, 실상 가까이서보면 참혹한 현실인 경우가 더러 있다. 영화 속 풍경은 목가적인 모습에서 살풍경하게 변한다. 한가롭던 길거리는 세태에 찌들어 천태만상이 벌어지는 거리가 되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린다.

즉 영화는 애초에 정치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우루과이, 종교인들이 희망을 말하는 보편적인 인간과 세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카메라는 이상을 좇지 않고 현실을 담는다. 이 때 영화는 리얼리즘의 계보로 걸어 들어간다.

세트가 아닌 길거리에서, 그것도 삶의 척박한 풍경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담아내는 이 영화의 스타일은, 2차 세계 대전 후 폐허가 된 이탈리아의 풍경을 담아낸 <자전거 도둑>을 연상케 한다.

조금 가까운 사례를 들라치면 영국 좌파 감독인 켄 로치가 <자전거 도둑>을 재해석해서 만든 <레이닝 스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레이닝 스톤>에서 아버지가 딸의 성찬식에 사줄 드레스를 마련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듯, <아빠의 화장실>의 아버지는 딸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진땀을 흘린다.

이 영화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의 부재를 말한다. 희망을 가질 권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권위 있고 부를 가진 사람들에게나 적법하다는 걸 보여준다. 검문소에서 아버지를 괴롭히는 군인, 부정부패한 밀매단속반은 서민들에게 악의 축이다.

하물며 교황의 보편적인 인류애, 민족과 민족 간의 화합, 그리고 여성의 존엄성에 대해서 훈훈한 이야기는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보편이라는 것은 중심을 차지한 소수를 대변하지, 특수와 부분을 대변하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시장바닥에서 뻥튀기를 샀다고, 서민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아빠들은 비정규직의 칼날에 벌벌 떨고, 그의 자식들은 대학등록금 마련에 전전긍긍하는 오늘. 희망은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아빠의 화장실>이 값진 영화로 다가오는 것은 가까운 나라, 우리네 이야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빠의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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