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반두비>의 포스터 제목의 뜻이 궁금하지 않은가?

▲ 영화 <반두비>의 포스터 제목의 뜻이 궁금하지 않은가? ⓒ 반두비제작위원회

제목이 <반두비>란다. 궁금증부터 앞선다. 여러 매체를 통해 영화가 청소년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불순하고 정치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제목을 설명해주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드래그 미 투 헬> 등과 같이 원어제목을 그대로 한글화해도 이젠 관객들이 당연히 그 뜻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까? 역시 무식한 나를 탓할 일일까?

에라, 못 참겠다. 나중에 영화를 보면 알게 되겠지만 '네' 선생을 이용하여 영화제목의 의미부터 찾아본다. 반두비. 방글라데시어로 진실한 친구란다. 어쩐지. 영어도 아니고 한낱 방글라데시어를 그대로 제목으로 쓰면 어쩌겠다는 건가. 영화는 이와 같은 '영어가 아닌 방글라데시어'라는 편견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카림은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이주노동자이다. 돈을 벌기 위해 코리언드림을 갖고 입국한 방글라데시인.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척박하기 짝이 없다. 비록 누군가는 해야 되지만,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벽은 높기만 하다.

영화는 우리 사회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대하고 있는지 아주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려나간다. 색깔 다른 이에게는 거스름돈조차 직접 손바닥에 건네주기보다는 앞의 선반에 내려놓는 우리들의 편견. 그러나 그 편견은 카림이 지적한 대로 선천적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피부색 하얀 미국인은 한국 여성을 '스윗'(SWEET)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이주노동자들의 고된 현실 사회가 암묵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노동 착취

▲ 이주노동자들의 고된 현실 사회가 암묵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노동 착취 ⓒ 반두비제작위원회


색깔과 인종에 대한 편견 편견을 넘어서

▲ 색깔과 인종에 대한 편견 편견을 넘어서 ⓒ 반두비제작위원회


결국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단순히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천박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가치의 척도가 돈이 되는 천박한 사회. 사람들은 강한 자 앞에서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선 한없이 강하다. 돈 이외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 간의 서열관계가 필요 이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카림이 지적하듯이 비겁하기 짝이 없다. 대부분의 이들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동정하기보다 그들을 밟아 생존하려 한다. 약자간의 연대는 언감생심일 뿐이며, 사회구조 상 가장 하부에 있는 이주노동자의 인권은 교과서에서나 찾을 수 있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어눌한 말솜씨와 불법체류를 빌미 삼아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사장이 어디 영화 속 인물일 뿐이겠는가. 비극적이게도 그들은 우리 주위에 매우 많이 산재되어 있다. 때로는 옆집 아저씨로, 때로는 중소기업 사장님으로, 때로는 자랑스러운 우리 아버지로 불리면서.

아내의 이별선고를 들은 카림은 바닷가에서 울부짖는다.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그 꿈조차 사치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 행복까지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돈으로만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천박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카림의 외침 모든 이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 카림의 외침 모든 이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 반두비제작위원회


이주노동자의 친구 여고생 민서

사회적인 편견으로 인해 고된 삶을 이어 나가는 이주노동자 카림.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친구 여고생 민서가 있다. 얼핏 보면 너무 어울리지 않는 그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고생은 약자 중의 약자이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이 나라의 새 일꾼이요, 어느 아버지의 소중한 딸로서 묘사되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그들은 이주노동자들만큼이나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할 수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계층이다.

이 시대의 학생만큼 불행하고 불안한 계층이 어디 있던가. 인성을 쌓기보다 스펙에만 관심 을 쏟아야 하는 그들. 어렴풋하게나마 가졌던 꿈은 사라진지 오래이며 영어 몰입식 교육이다, 국제고, 특목고다 하면서 사회는 그들을 극단적인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초등학생이 밤 10시가 넘게 학원을 전전하고 있어야 하는 이 척박한 현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해도 학생들에게 장밋빛 미래는 보장되어 있지 않다.

손에 손을 잡고 소통으로 시작되는 연대

▲ 손에 손을 잡고 소통으로 시작되는 연대 ⓒ 반두비제작위원회

더구나 비극은 그와 같은 경쟁에 있어서 일정 자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부의 대물림이 교육이란 허울을 쓰고 그 정당성을 획득해가는 우리의 현실. 학원비나 과외비가 사치인 이들에게 작금의 현실은 가혹하기만 하다. 물론 영화처럼 여고생이 원어민 영어 과외비를 벌기 위해 스포츠마사지 업소까지 나가는 경우가 대다수일 리는 없겠지만, 이는 분명 현실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개연성을 지닌다.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 부분, 스포츠마사지 업소에서 만났던 담임선생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 자퇴한다며 유유히 학교를 걸어 나가는 민서의 모습은 안쓰러운 동시에 통쾌하다. 그것은 승자만을 위해 구조화된 제도권 교육의 한계요, 학생들을 순치시켜 기존 사회질서에 편입시키려는 권력에 대한 반항이기 때문이다.

여고생의 비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학생인 동시에 여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고생은 세라믹 복으로 상징되는 로리타 성적 담론의 대상이며, 남학생과 달리 마초적인 사회에서 언제든지 희생자로 전락할 가능성을 담지한다. 성과 관련해서는 철저하게 이중적인 우리 사회에서 그들이 정상적으로 생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영화는 폭력적인 사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민서를 통해 이를 강변한다.

사회적 약자들이여, 단결하라!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의 만남.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록 어쩌다가 사귄 친구 같지만 그것은 결국 좀 더 나은 사회를 바라고 있을 감독이 꿈꾼, 약한 자들 간의 연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만남 그건 우연이 아니다

▲ 그들의 만남 그건 우연이 아니다 ⓒ 반두비제작위원회


물론 처음부터 그들의 소통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문화적 차이도 차이려니와 둘 사이에 불신과 편견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후진국에서 돈 벌러 온 사람과 후진국 사람이니까 깔보는데 익숙한 사람.

그 불편함은 민서가 카림에게 마음의 문을 열면서 소통의 방법으로 카림의 자위행위를 대신 해주는 행위에서 극에 달한다. 사회에서 경험한 대로, 남자들이 돈까지 줘가면서 하고 싶어 하는 자위행위를 도와주려는 민서의 행위. 어쩌면 그것은 이 추잡한 사회에서 민서가 알고 있는 가장 효과적인 소통방식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카림은 그와 같은 소통을 거부한다. 욕망으로 거래되는 소통이 참될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다. 대신 그들은 함께 먹으며, 함께 운동을 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며, 함께 불의에 저항하며 소통하기 시작한다.

소통의 시작 함께 운동하며

▲ 소통의 시작 함께 운동하며 ⓒ 반두비제작위원회


소통의 시작 함께 먹으며

▲ 소통의 시작 함께 먹으며 ⓒ 반두비제작위원회


그리고 그 소통은 연대의 바탕이 된다. 민서는 카림 대신 분노하고, 카림 대신 행동한다.  영화 말미 민서가 카림 대신 과거 카림의 사장 집에 쳐들어가 벌였던 난동은 이와 같은 연대감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아마도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약자들 간의 연대겠지. 때문에 끊임없이 분열을 획책하는 그들.

어쨌든 영화는 이제 극장에서 그 간판을 내리려 한다. 좀 더 많은 이들이 관람해서 이 답답한 시국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기를 바란다.

타인에 대한 이해 타문화에 대한 이해는 음식에서부터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 타인에 대한 이해 타문화에 대한 이해는 음식에서부터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 반두비제작위원회


참, 영화에는 적지 않은 MB에 대한 직설적인 혹은 간접적인 풍자들이 등장한다. 처음 빨래 바구니에서 하필 쥐가 등장하는 것부터 심상치 않더니 MB학원 로고를 달고 있는 봉고차에서부터 스포츠마사지 업소의 빨간 네온사인 MB(오호라 통재라! 왜 하필 마스터베이션의 약자가 MB이었던가!), 피리 부는 사나이 등등 영화 곳곳에 낯부끄러운 장치들이 대놓고 들어가 있었다.

물론 관객으로서 그 조잡한 상징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 또한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이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그리고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 비스 무리한 행위를 하던 작년 여름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누가 상상했으랴. 현 정부가 촛불집회 나왔다고 아기 엄마, 장애인마저 잡아가며 요즘처럼 표현의 자유를 대놓고 통제하리라고는.

어쩌면 감독도 지금 이 시점에 영화를 보면서 조금 뜨끔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감독님, 부디 무사하시길.

P.S. : 무척 기대를 했건만 25일부터 방영한다던 <대한늬우스>는 보지 못했다. 물론 <반두비>를 선택한 관객들에게 <대한늬우스>를 방영한다는 것은 극장의 자살행위가 될 것이 빤하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아쉬울 뿐이다. 다른 영화를 핑계로 정부의 역작을 감상할 수밖에.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반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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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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