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편집자말>

내게 아이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인간의 이중성, 위선, 모순 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인 나는 이 영화가 피부로 와 닿았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그것도 몹시 불편하게.

 

영화 <마더>를 보고 난 뒤 집에 돌아와 그동안 일부러 제껴놓은 <마더>에 관한 기사평이나 영화평을 모조리 읽었다. 평론가마다 관객마다 제각기 평이 다 달랐다. 엄마의 은밀한 섹슈얼리티, 광기, 싸이코패스, 소통의 부재 등 영화 <마더>를 보는 의견은 분분했다. 그만큼 좋은 영화라는 방증이다.

 

하지만 엄마의 입장에서 쓴 영화감상은 보지 못했다. 엄마들의 속내가 궁금했다. '내가 혜자였더라면?'

 

 <마더>의 한 장면

<마더>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얼마 전 우리집에 작은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하굣길에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유를 물어보니 같은 학교에 다니는 상급생 언니가 거리에서 머리를 쥐어박았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머리를 잡아당겼다고 했다. 딸아이는 억울해서 서럽도록 울었다.

 

속이 쓰렸다. 아이 일에는 대범할 줄 알았는데 나도 보통 엄마였나보다. 분했다.  하루종일 일에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분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이지. 우리 딸아이도 뭔가 잘못을 했을 거야'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생각처럼 쉽지않았다. 내가 이렇게 옹졸하고 소심했나싶어 새삼 놀랐다.

 

그리고 보름 후, 딸아이가 그 언니 이야기를 또 했다. 친구랑 같이 지나가는데 볼을 꼬집고 머리를 때렸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핑' 소리가 났다. 나는 하던 일을 제치고 당장 딸아이의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각 학급의 홈페이지를 달달 뒤졌다. 각 학급 홈페이지마다 단체사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딸아이에게 그 언니를 색출(?)해내라 다그쳤다. 딸아이는 약간은 두려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아이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나는 딸아이에게 재차 확인시켰다. 그리고 그 아이의 사진을 몇 번이고 보면서 얼굴을 익혔다. 잊지 않으려고 인상 착의를 꼼꼼이 머릿속에 새겼다. 인쇄도 했다. 다음날 당장 학교로 찾아가 그 아이를 찾아내리라. 따끔하게 혼쭐을 내주리라 다짐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댔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가 무서워졌다. 나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름도 모르고 생전 처음 보는 그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스캐닝해가는 내 모습이 무슨 공포영화의 주인공이나 된 듯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내가 지금 뭘 하고있는가 싶었다. 어른답지 못하게 이렇듯 순식간에 이성을 잃을 수 있을까 싶었다.

 

자식이 개입되니 '눈에 뵈는 게 없더라'

 

평소 욱하는 면이 없잖아 있지만 자기 자식 문제가 걸리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깨달았다. '모성'이라는 건 양 날을 가진 검과 같다는 것을. 한쪽엔 아름다움, 위대함이라는 날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위험함' '광기'라는 또 하나의 날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꾸 아름다운 면만 보려고 한다. 그럴 때 모성애는 위험하다.

 

 <마더>의 한 장면

<마더>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마더>는 이 양날의 검을 다 보여준 영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애써 모른 체 하는 그 한쪽면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그래서 선량한 '보통' 엄마들은 그 영화 후반부에 마음 한구석이 뜨끔해지고 불편해진다. 자신이 혜자라면 자신 역시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지마 엄마가 구해줄게'라는 이 한 줄의 카피를 보고 대부분 '눈물겨운 모성애'를 떠올릴 것이다. (하긴, 나도 '낚였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후 다시 읽은 이 한줄의 카피는? 무서웠다. 그리고 다시 묻고 싶다. '모성애'가 정말 아름다운 것이냐고.

 

모성애는 과연 아름다울까?

 

나 역시 예전에는 모성애가 굉장히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를 키워보니 모성애는 나의 본능에 국한된 것임을 깨달았다. 모성애는 본능 중의 하나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잠이 와서 잠을 자는 사람에게 그 행위를 두고 숭고하다거나 거룩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행위는 숭고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본능 그 자체다. 칭찬받을 일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모성 역시 마찬가지다. 내 자식이니까 예쁜 것이다. 내 딸, 내 아들니까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 뿐이다. 절대적 맹신이다. 신비스러운 감정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때론 예상치 못한 광기로 치달을 수도 있다. 광기를 넘어서면 그것은 죄악이 된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그냥 모성애일뿐이다.

 

영화 <마더> 후반에서 혜자는 아들(도준)의 누명을 대신 쓰게 된 청년에게 면회를 간다.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있지만 '정의'나 '양심'은 자신의 아들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너, 엄마는 있니?'라는 말로 양심의 가책을 달래보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위안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장면, 모든 시름과 근심을 없애주는 허벅지 자리에 침을 스스로 놓고 일상의 춤판으로 들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지독한 이기심을 느끼는가. 하지만 혜자는 침을 맞아야 했다. 조금 모자란 아들의 엄마 역할을 독하게 하기위해서,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어쨌든 살아내야 했다. 더러운 과거는 잊고 시름을 잊어야했다. 그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처절한 본능이고 욕망이다. 결국 모성애는 자기애의 또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더> VS <어느 어머니 아들>

 

 아일랜드 영화 <어느 어머니 아들> (1996)

아일랜드 영화 <어느 어머니 아들> (1996) ⓒ Columbia Pictures Corpora

<마더>를 보고 난후 그 위로 겹치는 영화가 있다. 아일랜드 영화 <어느 어머니 아들>이다. 이 영화는 아일랜드의 IRA 대원으로 행동하는 아들과 그의 어머니에 대한 영화다.

 

영화속 이 어머니들은 영국정부에 대항하는 아들의 신념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아들이 수감되어도 꿋꿋하게 아들을 격려하고 영국정부와 맞서 싸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부분 '아들이냐 정의냐', 선택의 귀로에 서게 되자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희생한다. 아들의 신념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참으로 비정한 어머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숭고하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는 단지 '제랄드' 한 사람만의 어머니가 아니다. 아일랜드 전체의 어머니다. 나같은 범인은 꿈도 못 꾸는 어머니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제랄드의 어머니보다 도준이 어머니가 더 많다. '신념' '정의' '민족'보다는 일상의 자잘한 욕망과 감정에 더 충실하면서 악착같이 사는 엄마들이 몇만 배쯤은 많다. 우열을 가리자는 게 아니다.

 

나는 '모성애'라는 단어가 참 부담스러웠다. 그 부담스러움의 원인을 <마더>를 보며 알게되었다. 영화 <마더>는 그간 '거룩함' '숭고함'이라는 말로 지나치게 미화되었던 모성애를 한꺼풀 벗겨냈다. 엄마는 마냥 착한기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사회가 엄마를 착하게 만들지 않는다. 엄마는 때론 전사이며 야누스이다. 

2009.06.20 13:50 ⓒ 2009 OhmyNews
마더 어느 어머니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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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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