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아기들은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고 세상 빛을 본다. 하지만 난 태아였을 때부터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여덟 달 만에 2.0kg 몸무게로 세상을 만났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삶의 전부는 중증뇌병변장애를 가지고 살아 왔기에 평소 비장애인에 대한 호기심이 좀 있는 편이다.

나를 평소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또 저 엉뚱하고 까칠하기 짝이 없는 장애여성이 어떤 태클을 걸려고 이런 말을 지껄이며 서론을 던지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도 해가며 이 글을 시작해 보련다. 지난 4월 21일 '오마이뉴스'에 인어공주와 탈시설에 대한 내 생각들을 써 놓고 난 큰 절망감을 느꼈었다. 내가 쓴 글 제목이 '하반신장애
극복한 인어공주이야기'로 붙여져 있어서였다.

제목을 안 붙인 내 잘못도 크지만, 내가 제목을 안 붙여서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너무 가혹했다. '장애'라는 이 까다로운 친구가 극복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아는 장애여성인 나는 '장애'를 극복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장애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비장애인과 장애인들에게 궁금함이 생긴다.

이 세상을 비장애인으로 평생을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또는 비장애인으로 몇 십년간을 살다 장애를 가지게 되어 '장애여성' 또는 '장애남성'이라는 이름을 얻어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꽤 여러 번이다.

좌절하지 않는 장애인 소녀 아야, 현실은?

 일본영화 <1리터의 눈물>

일본영화 <1리터의 눈물> ⓒ 1리터의눈물


그러다 일본에서 실화를 모티브로 책과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1리터의 눈물>이라는 영화를 접했다.

잠깐 영화 내용을 설명해 보자. 평범한 14살 소녀 키토 아야. 어느날 그는 익숙했던 현관에 부딪히고, 매일 다니던 등교 길에 넘어져 얼굴에 상처가 생기는 등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엄마는 아야를 병원에 데려간다. 

병원 의사는 아야가 '척수소뇌변성증'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금은 증상이 단순히 현기증이지만 나중엔 걸을 수도, 설 수도 없는 것은 물론 말하는 것과 손을 움직이는 동작도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장애자녀를 둔 대한민국 엄마, 세계 거의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듯 일본에 살고 있는 아야의 엄마도 아야의 척수를 고쳐 달라고, 수술해 달라고, 아야의 척수로 모자라다면 자신의 척수를 가져다 이식이라도 해달라고 애원한다. 의사는 현대의학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지금 당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말로 엄마를 위로한다.

세월은 점점 흘러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 좋은 이웃도 만나고 친구들도 사귀며 힘든 학교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을 즈음 담임이라는 사람이 전하는 말. 아야가 장애가 있으니 장애인이 다닐 수 있는 양호학교(우리나라로 말하면 재활학교 정도…)로 옮기란다. 주인공인 아야는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지만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폐(일본식 언어인 듯)를 끼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양호학교로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현실이 슬프지만 장애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체념한다.

양호학교의 생활도 아야에겐 힘들기는 매한가지. 하지만 착하고 예쁜 아야는 좌절하지 않고 자기 앞에 펼쳐진 현실에 순응하며 지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장애판정을 받게 된다면? 다시 말해 '내가 일상생활을 잘 하다가 살면서 갑자기 장애판정을 받게 된다면?' 또는 갑자기 큰 교통사고가 나서 장애가 생긴다면?

이 주제로 글을 쓰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앞에 썼던 것처럼 난 내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장애와 함께였으므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난 비장애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 말이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비장애인들과 소위 중도장애인(살다가 장애가 생긴 분들)인 사람들에게 장애인이 된다면?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때의 기분을 물었다.

대답들은 내 예상대로 거의 대부분 '자살하고 싶을 것 같다'와 '죽고 싶었다'였다. 그런데 대중 매체에는 예쁘고 착한 <1리터의 눈물>의 아야처럼 장애를 숙명처럼 여기며 열심히 살아가는 과정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라는 정상범주를 만들어 두고 완전함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언제나 TV나 영화를 보면,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라고 재활을 강요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은 빠지지 않는다.

교사 중 한명이 '인간은 걷을 수 있도록 되어 있으니 시간을 지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유가 될 수는 없어'라고 말한다. 과연 모든 인간은 걷을 수 있게 만들어졌으며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손상된 몸이 완전(개인적으론 '완전하다'라는 말은 기준의 문제이고 해석하기 나름이기에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해질 수 있는 것일까?

난 절대 "NO"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완전함이라면 난 싫다. 걸을 수 없는 지금의 내가 지금부터 10년 동안 밥만 먹고 자는 시간을 줄여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만족한다면 별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과연 나라는 인간에 만족할까?

나라면 10년이라는 내 젊음이 아쉬울 듯하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그 세월이 아쉽지 않겠는가? 장애인의 수명은 비장애인에 비해 월등히 높다거나 한다면야 속는 셈치고 좀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비장애인의 하루가 24시간이듯 장애인의 하루 역시 똑같다. 이제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 한 가정에 있을 때, 이 사회가 똘똘 뭉쳐 본인이나 "장애극복"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책임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장애인들이 즐기며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 때가 되지 않았나?

여기까지 이야기들을 다시 정리해보자. 비장애로 살다 장애가 생긴 사람이건 태어나면서 장애를 가지고 살던 사람이건, 턱이 있어 휠체어가 다닐 수 없는 길이 있다면 일제히 물리치료나 수술을 하는 방법 말고 먼저 턱을 없에는 원인부터 제거해야 한다.

전동휠체어가 필요하다면 전동휠체어를 주고 수동휠체어를 타길 원한다면 활동보조인을 파견하여 그 길을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이 나이트에 가서 놀든 연애를 하든 그들 혹은 그녀들이 선택하게 두었으면 한다.

그런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장애가 생겨 자살을 하고 싶은 생각들이 조금은 줄어지지 않을까?

1리터의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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