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는 이른바 '박찬욱 스타일'이 극한까지 이른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는 이른바 '박찬욱 스타일'이 극한까지 이른 영화다. ⓒ 모호필름

나는 박찬욱이 자기 스타일이 대단히 강렬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보기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나는 <올드보이>(2003)를 기점으로 하여 박찬욱이 어떤 '터닝 포인트'를 지나지 않았나 의심한다. 혹여 그때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을 전후하여 평단이 보인 두 얼굴이 그의 영화를 달리 만들지 않았나 하고도 의심한다. 박찬욱이 지면에 많이 떠들지는 않았지만 종종 그때 평단에 대한 조롱과 경멸이 엿보였던 때가 있다.

하여튼 <올드보이> 이후 박찬욱은 스타일의 과잉과 비약을 보이며 자기 세계로 더욱 깊이 숨었다. 그리고 박찬욱은 그러한 행보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박찬욱은 <박쥐>를 걸작은 장담 못해도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낫다고 했다. <박쥐>는 완전히 박찬욱의 영화다. 이번에 한을 풀겠다는 마음인지 온갖 수법을 아낌없이 쏟아낼 셈이다. 신인 감독에게서 볼 법한 무시무시한 패기가 느껴진다. 박찬욱은 독불장군처럼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누가 따라오든 말든 마음 쓰지 않겠다는 태도다.

분명히 <박쥐>는 관객을 살갑게 대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보기 전에 화장실에 필히 들르길 바란다. 혹 중간에 화장실 다녀오느라 잠깐 장면을 놓친다면 이야기를 따라잡기 쉽지 않다. 이야기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오가고 있다. 편집을 탓하기 전에 짜임새 자체가 그렇다. 장면 하나만 놓쳐도 실타래를 놓쳐 버리고야 만다. 상황은 극으로 치닫는데 인물의 내면을 공들여 설명하지도 않는다. 박찬욱이란 양반에게 익숙하지 않다면 불쾌감을 느낄 정도다.

다중적인 텍스트라기보다는 독하게 말해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하고 싶다. 서로 연결되지 않은 장면을 더듬더듬 이어보고 들여다보는 것이 딱 그렇다. 저마다 떠들며 나팔이다, 기둥이다, 솥뚜껑이다, 뿔이다 말하지만 전체의 모습은 다 파악하지 못하겠다. 나도 더듬대며 읽을 밖에 도리가 없다. 정답이 없는 영화니 산만하고 어수선하다. 그러나 극한으로 밀어붙인 박찬욱 스타일은 살갗에 소름이 쭉쭉 끼칠 정도로 빼어난 장면을 만들기도 한다. 박찬욱 냄새가 물씬 나는 미장센 또한 영화의 맛을 비범하게 한다. 상현(송강호)의 품에 안겨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태주(김옥빈)의 심정이다.

 상현(송강호)은 신부의 양심과 흡혈귀의 욕망 사이에서 박쥐처럼 갈등한다. 태주(김옥빈)을 지옥에서 구하겠다는 말은 결국 모두를 파멸로 몰아가고야 만다.

상현(송강호)은 신부의 양심과 흡혈귀의 욕망 사이에서 박쥐처럼 갈등한다. 태주(김옥빈)을 지옥에서 구하겠다는 말은 결국 모두를 파멸로 몰아가고야 만다. ⓒ 모호필름


그러니 <박쥐>는 위험한 놀이판이다. 박찬욱이 대장이다. 눈치 보지 않고 뭐든지 맘대로 한다. '나랑 놀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이런 식이다. 좋은 친구가 있고 싫은 친구가 있는 것처럼 박찬욱과 친구가 되고 말고는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갑은 박찬욱의 놀이가 참 재밌어 좋아할 테지만, 한편 을은 참 재미없어 싫어할 테다. '행복한복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행한 이야기는 그만큼 새로운 맛이다. 송강호의 아랫도리나 김옥빈의 가슴은 침이 꿀떡 넘어가긴 해도 그 다음의 문제다. 박찬욱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영화감독이다. 일찍이 칸에서 상을 받은 바 있고, 올해도 <박쥐>가 경쟁부문에 다시금 진출할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다. 이제 박찬욱은 더 이상 자신을 포장하기를 거부하고 날것을 보여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박찬욱은 이야기를 장르에서 끌어다 만들었지만 정작 완성된 이야기는 장르의 관습법에서 이탈해 있다. 흡혈귀가 나오지만 장르적 쾌감에는 야속하리만치 관심이 없다. 박찬욱의 관심은 흡혈귀 신부의 이중적인 정체성에 있다. 상현의 이중성은 이야기를 소박하게 시작하게 하지만 갈등의 파장은 널리 퍼져서 전체를 통째로 뒤흔든다. 실제 영화의 많은 구석에서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흡혈귀가 되기 전 상현은 '천사' 같은 신부였다. 흡혈귀가 된 계기도 병자들을 구하려 오지의 실험에 자원했다가 우연히 흡혈귀 피가 수혈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키스 한번 없었던 상현은 흡혈귀가 된 이후 비로소 욕망에 눈뜨게 된다. 많은 죄악을 저지르지만 역시 흡혈귀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살인을 해야했다. 하지만 상현에게 남아있는 신부의 양심이 그러지 못하도록 만든다. 환자들 혈액을 조금씩 훔쳐야 하는 비루한 신세는 그래서다. 그의 갈등은 피를 부른다.

 상현과 태주의 사랑에는 천국도 지옥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둘의 사랑은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른 바닷물 같다.

상현과 태주의 사랑에는 천국도 지옥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둘의 사랑은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른 바닷물 같다. ⓒ 모호필름


천주교 십계명에는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말씀이 버젓하다. 끈적끈적한 섹스의 유혹도 이기려 하지만 불타는 사랑의 감정은 '천사' 상현을 점차 '악마'로 만들어가고 있다. 태주를 지옥에서 구하겠다는 말에는 천사와 악마의 두 목소리가 모두 있다. 그때부터 상현의 갈등은 심해져 분열을 걱정할 지경이다. 시체의 동맥을 잘라 빨래처럼 걸어놓으면 피가 잘 빠진다며 가르치고 한편으로 '인명 경시'를 들먹이는 상현의 모습은 양심과 욕망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강우(신하균)의 축축한 망령은 돌덩어리 같은 죄책감을 부르며 심연으로 이끈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죄의 무게도 더해지는데 상현으로 하여금 자꾸만 괴로운 선택을 하게 만든다. 지옥불에 타는 몸부림 끝에 상현은 신부도, 흡혈귀도 바라지 않는다. 날짐승인지 길짐승인지 모를 박쥐같은 존재라도 좋다. 그가 갈구하는 것은 오로지 태주 하나다.

결말은 아마도 누구나 예상했던 그대로일 테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물'은 언제나 '파멸'의 공식이었다. 죄악에 허덕이던 그들이 당도한 곳도 바다가 되었다. 너무 빤해서 일견 상상력이 빈곤해 보이기도 하겠다. 허나 나는 <박쥐>의 결말만큼 기나긴 여운을 남기는 것이란 좀체 체험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리여사(김해숙)가 괜히 그 자리에 있지 않다. 이 추악한 사랑을 변명하지도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겠다는 뜻이다. 신을 배반한 그의 곁에는 태주밖에 남지 않았지만 정작 그녀는 종교가 없다. 때문에 인간으로서 바닥까지 추락한 상현을 위해 기도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파국을 맞이하며 둘이 나누는 마지막 말은 가슴을 저민다. 다음을 약속하지 않는다. 구원은 물론이요 징벌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그냥 이 자리에서 끝나는 순정이다. 상현이 그토록 갈구하던 사랑은 찰나처럼 짧았으나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이제 더는 목마르지 않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고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박쥐 박찬욱 송강호 김옥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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