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

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 ⓒ 유성호


골키퍼는 피치 위의 그 누구보다 자주 잔디와 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는 그만큼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났다. 라틴 문학의 거장이자 비판적 지식인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그의 책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서 위로할 수 없는 골키퍼의 고독한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지기는 단 한 번의 실수로 게임을 망치거나 우승을 놓치기도 한다. 그러면 관중은 그가 지금껏 쌓은 공적은 순식간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끝없는 저주를 퍼붓고 만다. 그에 대한 험담은 죽는 날까지 꽁무니를 따라다닐 것이다."

대전 시티즌의 안방인 대전월드컵 경기장 '퍼플아레나'의 골문 앞에는 최은성이 서 있다. 그는 축구가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들어야할 이 골키퍼라는 '독이 든 성배'를 13년째 전담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한경기 한경기가 쌓여 결국 지난 18일 대전 시티즌에서만 출전한 경기 수가 402경기에 이르렀다. 한 팀 선수로서 최대 출장 기록을 세운 것이다.

K리그 역사 27년 동안 한 팀에서 400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지금은 은퇴한 신태용 성남 감독(401경기)과 최은성, 두 사람뿐이다. 최은성은 그 후에도 한 경기를 더 치러 그의 기록은 현재 진행형이다.

신기록을 세우던 날, 팬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 조촐한 기념식도 치렀고 대전 시티즌에서 그의 등번호 21번은 21년간 아무도 달지 못하게 됐다. 가슴 뿌듯해 할 만도 한데 24일 오전 훈련을 마치고 선수단 숙소에서 만난 그의 첫마디는 뜻밖이었다.  

"선배가 후배들의 앞길을 막은 것 같아 미안한 것도 사실이에요. 제가 잘나서 다른 팀으로 옮겨가기라도 했다면 후배들이 더 많은 출전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원래 올 시즌은 400경기 출장을 목표로 두고 팀이 쉬어가는 경기에나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개막 후 후배 양동원 선수가 컨디션이 나빠 제 출장기회가 늘어난 겁니다. 등번호 결번도 큰 영광이긴 하지만 저에겐 과분한 것 같아요."

피나는 노력으로 세운 한팀 최다 출장 대기록

 대전 시티즌 구단에서 골키퍼 최은성 선수를 위해 등번호인 21번을 21년간 결번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24일 오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구단 숙소에서 최은성이 자신의 유니폼을 들어보이고 있다.

대전 시티즌 구단에서 골키퍼 최은성 선수를 위해 등번호인 21번을 21년간 결번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24일 오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구단 숙소에서 최은성이 자신의 유니폼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프로팀에서 그가 13년간 주전 자리를 놓지 않은 것은 다른 어떤 경쟁자보다 실력이 뛰어나서이지 감독이 특혜를 주거나 후배들이 자리를 양보해서 아니다. 남모를 피나는 노력으로 이룬 대기록을 놓고도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그는 자신을 희생하는 일에 익숙해야 하는 골키퍼의 천성을 타고난 것만 같았다. 

골키퍼는 팀 동료들이 저질러 놓은 잘못의 뒷수습을 도맡아야 하고 축구의 가장 큰 즐거움인 골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달갑지 않는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처럼 "팀이 억세게 재수 없는 어느 날 오후라도 만날라치면 골 세례를 받고 괴로워하면서 남이 저지른 죄로 인한 온갖 허물을 뒤집어쓰는 사람 또한 골키퍼"이다.

천성을 타고난 것 같지만 최은성이 골키퍼 시작하게 된 것은 다소 운명의 장난 같은 구석이 있다. 성남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필드선수였던 그는 아버지 덕분(?)에 골키퍼 장갑을 끼게 됐다. 거친 몸싸움을 벌이고 상대 선수들의 발길질에 언제 채일지 모르는 필드플레이어를 하다가는 언젠가 큰 부상을 당할지 모른다고 염려한 최은성의 아버지가 아들 몰래 감독에게 이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

"감독님, 우리 은성이가 몸이 많아 아픈데다 허리도 좋지 않아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골키퍼를 시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최은성의 허리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골키퍼를 하라는 감독의 말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골키퍼를 시작하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상대 공격수들은 골키퍼의 얼굴이나 가슴을 피해 슛을 날리는 호의를 결코 베풀지 않는다. 오죽하면 세계 최고 수문장이자 '독일의 혼'이라고 불리는 올리버 칸이 "골키퍼는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겠는가. 최은성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골키퍼를 시작하고 날아오는 공을 무서워한다고 야단을 많이 맞았어요. 하루는 선배가 캄캄한 밤에 골문 앞에 저를 세워놓고 슈팅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힘들었지만 그 때 그 훈련이 두려움을 없애는 데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솔직히 지금도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연습할 때는 얼굴로 날아드는 공은 그냥 피해요. 슈팅을 머리에 맞으면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가슴에 공을 맞으면 멍이 드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사람이라면 뭔가가 자기 몸 쪽으로 날아오면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게 되잖아요. 근데 골키퍼는 반대로 날아오는 공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하죠. 본능을 거스른다는 것, 그게 가장 힘든 점이에요."

"솔직히 지금도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

 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

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 ⓒ 유성호

그럼에도 다시 용기를 내 골문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골키퍼만이 만끽할 수 있는 '희열'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축구는 골키퍼가 없으면 경기를 할 수가 없잖아요. 그 정도로 골키퍼의 영역은 다른 선수들이 넘볼 수 없습니다. 그게 빠져나올 수 없는 골키퍼의 매력적인 것 같아요. 특히 골과 다름없는 슈팅을 막아냈을 때 온몸에 전율이 흐르죠. 그 기분은 정말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스트라이커가 골을 넣을 때보다 더 좋으면 좋았지 덜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정적인 선방을 하고도 골을 넣은 스트라이커처럼 멋진 세리머니를 펼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골키퍼는 기쁨을 음미하는 대신 재빨리 일어나 수비진 재정비를 지휘하고 또 다른 슈팅에 대비해야만 한다.

그리고 골이라도 먹는 날이면 번민과 자책의 밤을 보내야만 한다. 골키퍼는 자신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실점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최은성도 지난 13년 동안 수많은 자책 속에 살았다. 그는 프로통산 501골을 내줘 가장 많은 실점을 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누군가는 불명예라고 할 기록이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그만큼 많은 경기에 출전했다는 '훈장'이기도 하다.

"골을 먹을 때마다 동료들에게 가장 미안해요. 결국 제가 골을 막지 못해 승리를 얻지 못한 거니까요. 그래서 경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도 자꾸 실점 상황이 눈에 아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조금만 더 빨리 뛰어 나왔다면', '더 신중했다면' 이런 후회 속에 자책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어느 포지션보다도 정신적으로 강해야 하는 것 같아요."  

최은성이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이유

 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이 24일 오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구단 숙소 체력단련실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이 24일 오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구단 숙소 체력단련실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 유성호


 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이 24일 오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숙소에서 가족과 팀에 대한 사랑을 담아 새긴 문신을 보여주고 있다. 문신은 대전 시티즌 엠블렘과 부인과 딸의 영문이름 첫글자로 디자인했다.

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이 24일 오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숙소에서 가족과 팀에 대한 사랑을 담아 새긴 문신을 보여주고 있다. 문신은 대전 시티즌 엠블렘과 부인과 딸의 영문이름 첫글자로 디자인했다. ⓒ 유성호

그래도 최은성은 경기장에서만큼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결정적인 실수를 한 동료나 후배라도 미소로 격려할 뿐이다. 심판에게 좀처럼 항의를 하는 일도 없다.

"경기 중 골키퍼는 소리치고 인상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경기를 하느라 안그래도 힘든데 실수 하나에 인상 쓰고 소리를 지르면 제가 후배들이라도 정말 싫을 것 같아요. 웃음으로 격려하는 것과 인상 쓰고 달려가는 건 정말 차이가 커요.

경기 지고 있는데 웃는다고 안 좋게 보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화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거든요. 오히려 따뜻하게 실수를 감싸주면 신뢰가 쌓이고 서로 동료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럼 경기도 잘 풀리는 경우가 많죠. 웃음은 의외로 많은 힘을 발휘합니다."

최은성의 왼쪽 어깨에는 가족과 대전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문신이 새겨져 있다. 대전에서 뛴 지 10년째 되던 2006년 중국에 전지훈련을 갔을 때 대전의 구단 엠블럼에 아들과 딸의 영문 이니셜, 그리고 자신의 등번호 21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브라질에서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라는 브라질어를 추가해 지금의 모양을 완성했다.

"다른 의미는 없어요. 멋을 부리기 위해서도 아니에요. 제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들과 또 저를 키워준, 제 가족과 마찬가지인 대전의 상징을 몸에 새겨놓고 싶었어요."

"대전을 지키기 위한 2002년의 뜨거웠던 열정, 잊지 못할 것"

1997년 구단 창단과 2001년 FA컵 우승, 짧았던 영광 뒤에 혹독하게 몰아친 2002년의 팀 해체 위기, 그리고 2007년의 극적인 6강 플레이오프. 감독이 3번 바뀌고 팀을 대표했던 간판스타 이관우와 김은중이 떠나가는 상황에서도 팀의 역사를 지켜온 최은성이 가장 기억에 남고 기뻤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프로선수라면 대부분 우승이나 대표팀 발탁 순간을 꼽는 게 보통이지만 그는 2002년 팀을 살리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때를 떠올렸다.

2002년은 그야말로 대전 창단 이후 최대의 위기였다. 창단 때 컨소시엄을 이뤄 대전을 운영해 왔던 동아건설, 동양백화점 등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구단 운영에서 손을 뗀 후, 팀의 재정을 도맡은 계룡건설마저 그해 2002년 11월 팀 운영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서포터분들도 거리로 나섰고 저희 선수들도 모두 거리로 나가 대전을 살려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모금운동도 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정말 마음 고생이 많았지만 선수들과 팬들이 위기를 넘기 위해 하나로 똘똘 뭉쳤고 결국 팀을 살려냈어요. 그 해의 뜨거웠던 열정,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에 남네요."

 지난 18일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한 팀에서 가장 많은 개인 통산 402경기째 경기에 뛴 선수로 등록한 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이 24일 오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구단 숙소에서 골키퍼 장갑을 끼고 환하게 웃고 있다.

지난 18일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한 팀에서 가장 많은 개인 통산 402경기째 경기에 뛴 선수로 등록한 대전 시티즌의 골키퍼 최은성이 24일 오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구단 숙소에서 골키퍼 장갑을 끼고 환하게 웃고 있다. ⓒ 유성호


프로 데뷔 후 그는 항상 가난한 중하위권 팀의 선수였고 실력에 걸맞는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우승컵을 실컷 들어 올리지 못했고 상복도 없었다. 그래도 최은성은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욕심 같아서는 대전에서 500경기 출장을 채우고 싶어요. 부상만 없다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웃음) 그리고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도 싶고 최우수선수나 베스트11에 뽑혀 연말에 시상식에도 참석해 보고 싶어요. 너무 욕심이 많은가요? 사실 저는 지금 이대로도 행복해요. 후배들과 함께 뒹굴고 땀 흘리고, 경기장에 서있는 삶 자체가 행복한 거죠."

끝으로 최은성에게 꿈을 물었다.

"은퇴 후에 구단에서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선수생활을 하면서 배웠던 것들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하지만 코치직에 크게 욕심을 내지는 않을래요. 축구장을 떠나게 된다면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계획입니다.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많이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거든요."

그가 또다시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최은성 골키퍼 대전시티즌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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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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