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퇴근 후 영화 한 편을 봤다. 황정민 주연의 영화 <그림자 살인>. 평소 같았으면 아내와 함께 볼 것을. 임신한 아내에게 '살인'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는 영화를 추천할 수 없었기에 굳이 혼자 찾아간 극장이었다. 임신한 아내의 눈치까지 살피면서 꼭 보고 싶었던 영화 <그림자 살인>. 난 무엇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했던가.

근대 전환기와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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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가 <그림자 살인>에 끌렸던 것은 영화가 표방한, 소위 탐정영화란 장르 때문이었다. 스릴러보다는 덜 무섭지만 그 대신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며 관객들의 추리력을 자극하는 탐정영화.

결국 영화 <그림자 살인>에 대한 나의 기대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추리소설을 찾았던 이유와 같은 맥락이었다. 주어진 단서를 가지고 어려운 사건을 풀어나갈 때 느끼는 바로 그 쾌감. 나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셜록키언으로서 셜록 홈즈 시리즈를 모두 읽고, 베이커 거리 221b번지를 동경하던 내 유년 시절의 그 설렘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홈즈를 모방해 버스를 타도 승객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나의 어린 시절.

특히 영화 <그림자 살인>은 문호개방과 함께 온갖 근대서양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혼란했던 구한말을 그 배경으로 함으로써 탐정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한층 극대화시키고 있다. 근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근대로의 전환기야말로 탐정이 활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홈즈가 괜히 19세기 영국에서 태어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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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근대로의 전환기는 기존의 공권력이 무력해지거나 약해지면서 '탐정'이란 존재가 두각될 수 있는 토양을 지니고 있다. 근대의 탄생과 함께 개인의 사적 영역이 발생하고 사회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공권력이 사회 전체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데, 바로 이 틈새를 사설탐정이 나서서 메워주기 때문이다.

전근대의 미신과 근대의 이성이 공존하는 그 시공간 속에서 근대 이성적 사고로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탐정의 모습.

근대 전환기 탐정의 매력은 요즘 소위 대세인 미드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 등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최첨단 과학기술과 의학적 지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현대 수사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경탄하고 감복하지만 감정이입 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건 해결을 하는 데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터, 그것은 나의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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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근대 전환기의 탐정을 보자. 그들은 결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를 쓰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우리가 쉽게 놓친 것들을 따라 논리적으로 사고할 뿐이다. 홈즈는 사건 현장을 조사한 뒤 범인의 윤곽을 잡고, 포와로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사건의 단서를 찾는다. (굉장한 과학기술이라고 해봤자 영화에서
엄지원이 맡은 순덕이 발명하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물품들일 뿐이다.)

따라서 독자들이나 관객들은 쉽사리 그 시대 탐정에 감정이입 되기 마련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셜록 홈즈 등 추리소설의 고전을 찾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탐정이 되어 범인을 잡으며 그 속에서 '추리'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근대 전환기 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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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화 <그림자 살인>이 그 배경으로 삼고 있는 구한말은 탐정이 활약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시대이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앞서 정치적 무력감이 만연하고 여러 가지로 혼란한 시대였지만, 동시에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생동감 넘치고 변화무쌍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와 근대, 조선과 세계가 얽히고설켜 그 어느 때보다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구한말.

실제로 구한말은 우리 역사에서 국가 공권력이 매우 약한 시기임에 분명하다. 실패한 근대화와 일본을 비롯한 서구제국주의의 방해로 인해 대한제국은 공권력을 채 갖추지 못했었으며, 근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추지 못한 조선의 민중들은 근대국민국가로서 대한제국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구한말의 탐정을 재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에 대한 기록도 부족하거니와 대한제국이 근대국가의 틀을 잡아가는 과정이기에 탐정이 활약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어디 그뿐인가. 구한말은 결코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곧이어 벌어질 한일합병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시대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일본인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왠지 구국의 심정으로 시대상황을 바라보아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의 존재. 과연 영화는 그와 같은 한계를 극복해내고 그럴 듯한 탐정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영화 <그림자 살인>의 구한말

워낙 나의 기대가 높았던 탓일까? <그림자 살인>은 전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 꽤 큰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영화는 그 추리적 요소가 부족하다. 감독은 진호 역의 황정민과 광수 역의 류덕환을 묶어 관객에게 셜록 홈즈와 와트슨을 연상시키게 하고 여류 발명가 순덕을 배치하여 과학적 수사의 기반을 마련하지만, 홍진호는 추리소설의 명탐정보다는 모험소설이나 활극의 좌충우돌 주인공에 가까운 인물이다.

따라서 진호는 영화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다. 관객들이 주인공의 명민함을 인정하기에는 영화 속 사건이 생각보다 단순하며 범인이 너무도 많은 단서를 아주 쉽게 흘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억지에 가까운 영화의 반전.

덕분에 관객들은 추리영화나 소설에서 기대하는 두뇌싸움을 할 수 없다. 주인공과 관객들은 조각난 퍼즐을 갖가지의 경우수로 맞추기보다는, 우연찮게 얻은 단서를 가지고 롤플레잉 식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갈 뿐이다.

그러나 2% 부족한 추리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영화 <그림자 살인>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구한말 풍경 때문이다. 영화는 기존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한계, 즉 불필요한 역사적 강박관념을 걷어내고 그 시대를 그대로 주시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너무도 많은 풍경을 담으려 한 덕에 조금은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구한말은 죽은 시대가 아니라 활기가 넘치는, 살아 있는 시대다.

어느새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렸지만 아직까지도 돈 대신 현물이 오고 가는 전근대적이면서 동시에 근대적인 사회 구한말. 그 시공간 속에서 미국은 현대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으레 가야 되는 이상향으로 자리 잡혀 있고, 벌써부터 특종에 목숨을 건 황색저널리즘이 판을 친다. 또한 전환기의 사회가 으레 그렇듯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편에 중독되어 있으며 심지어 유아성매매까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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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그 어지러운 시대상과 함께 그 시공간을 살아낸 사람들을 하나씩 그려낸다. 혼잡한 사회 속에서 돈을 좇는 주인공과 의료/위생이라는 근대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하여 의사가 되고자 몰래 시체를 해부하는 젊은 의학도, 사대부 집안과 성(性)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명가가 되고자 하는 신여성, 자신의 단원까지 팔아가며 돈을 벌려 하는 서커스 단장, 출세에 눈이 멀어 그 모든 관계를 배신하고 권력자에게 영혼까지 파는 경찰서장 등.

구한말은 현재 우리가 재단하듯이 선과 악이 분명한 시대가 아니다. 비록 현재의 역사 교과서에는 친일파와 독립투사들만이 거론되지만 그 사회는 훨씬 복잡다단하며 그 속에서 개인의 욕망은 또 다른 욕망과 부딪혀 새로운 변주를 만들어낸다. 친일은 그 욕망에 있어서 현재 우리가 인정할 수 없는 욕망일 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욕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영화 <그림자 살인>은 우리가 모르던 100년 전 사회를 훌륭히 재현해냄으로써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 영화이다. 비록 캐릭터가 그 시대에 완전하게 녹아들지는 못했지만 구한말의 탐정이라는 새로운 인물상을 만들어 우리가 잊고 있던 시대를 재구성해낼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해 주었다. 속편이 나와 또 다시 그 시대와 대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쯤이면 진호는 더욱 탐정다워졌을 것이고, 광수는 훌륭한 의사이자 조력자로 진호를 보좌하리라.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림자살인 황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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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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