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두 개의 테마가 얽혀 있는 영화다. 씨줄과 날줄이라 할까. 하나는 세대를 초월하는 러브스토리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의 가해자가 자신의 숙명을 인정하는 이야기다. 러브스토리에 대한 논의는 접고 아픈 역사를 끔찍이도 많이 겪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아직도 지난한 역사에 비해 명쾌한 가해자가 없는 이 나라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싶다.

<더 리더>는 법대 교수인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작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2차 대전 이후(1950-60년대)를 배경으로 36세 여인 한나 슈미츠와 15세 소년 미하일(마이클)의 뜨거운 사랑을 담아낸 소설이다. 사랑이야기만이 아닌 것은, 유대인 학살 가해자인 한 독일인의 어쩔 수 없는 숙명과 절망을 풀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스티븐 달드리의 행동하는 문제의식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 포스터와 책 표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 포스터와 책 표지 ⓒ Mirage Enterprises, 이레


여태까지 대부분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다룬 영화들은  비참한 수용소 생활에 포커스를 맞췄다. 할리우드화 된 당시의 '유대인 참상 알림' 정도가 주류를 이룬다는 말이다. 하지만 <더 리더>는 아예 유대인의 참상을 담는다는 의도는 없다. 차라리 가해자 중 한 사람인 한나 슈미츠(케이트 윈슬렛)의 고뇌를 조명한다. 상대역인 마이클(어린 마이클: 데이빗 크로스, 어른 마이클: 레이프 파인즈) 역시 그 고뇌의 동참자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감추기 위해서 늘 싸워왔고 또 싸웠다. 그것은 실제로는 힘찬 후퇴일 수밖에 없는 전진과 실제로는 은폐된 패배일 수밖에 없는 승리로 이루어진 삶이었다.(책 <더 리더> 144쪽)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어디까지인가. 그럼,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후퇴인 전진'은 무엇이고, '은폐된 패배인 승리'는 또 뭔가. 주인공 한나는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 평범한 독일인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대는 그녀를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한다. 당시 '경비직'을 얻은 직장인 한나, 이후 시대는 '몹쓸 짓'을 한 한나로 바꿔놓는다.

1995년 출간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소설을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스크린에 옮겼다. 케이트 윈슬렛이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스티븐 달드리는 2000년 <빌리 엘리어트>나, 2002년 <디 아워스> 등에서도 인간내면의 문제에 집중했다. 1980년대 중반 문제의식 강한 연극 <돌이킬 수 없다>를 탄광촌을 순회하며 공연하였고, 실제로 폐광에 항의하는 광부들의 마지막 런던 시위 대열에 함께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은 전후 영국 정치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스티븐 달드리의 말이다. 삶과 사상이 다르지 않다. 역사의식과 실제가 다르지 않다. 현장과 영상이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스티븐 달드리가 들여다본 나치전범 재판정에서의 문제의식은 탁월하다.

가해자는 가해자만일 수 없다고?

 1995년 출간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소설을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스크린에 옮겼다. 케이트 윈슬렛이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1995년 출간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소설을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스크린에 옮겼다. 케이트 윈슬렛이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 Mirage Enterprises


피해자와 가해자의 모호함, 용서와 복수심의 모호함, 패배와 승리의 모호함, 죽음과 삶의 모호함….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불명확함에 익숙해져 살아가고 있다. <더 리더>가 이런 사회에서 사는 내게 더 진지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모호함 속에서 명확함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더 리더>는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서 만났던 가해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소위 '고문기술자'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 이근안. 왜 이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일까? 우리는 평화의 시대인 오늘, 목사가 된 그를 만난다. 그는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그는 자신이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한다. 그가 2006년 11월 7일 만기 출소하면서 남긴 말은 이렇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개과천선한(?) 이후에도 강연을 통해 "억울하다. 나라에 충성했을 뿐인데 나라는 자신을 희생양 삼았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쉽게 말해 자신도 피해자란 말이다. 우리의 아픈 역사는 왜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것일까? <더 리더>를 보면서 자꾸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라는 물음이 떠나지 않는다. 더 답답한 것은 이런 질문에 대한 완전하고도 매끈한 답이 없다는 것이다.

범인 취조 과정에서 이근안이 가했다는 고문들, 소위 관절빼기, 볼펜심 꼽기 등의 고문 기술에 악몽 같은 날들을 보냈던 한반도평화와 경제발전 전략 연구재단 김근태나, 함주명 조작 간첩사건에 관련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렇게 이근안은 몇 년간의 옥살이로 과거를 묻은 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이런 모호함 속에 한국사회가 커가는 걸 보면 참 대단하다. 비단 이근안만이겠는가.

그는 누구의 명령을 들은 것일까. 명령자가 있었다 해도 그렇게 악랄할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그 누구도 그리 용납이 쉽지 않을 터. 영화 속에서 한나는 어린아이(?)를 사랑한 자책감으로, 잘 다니던 직장을 포기하고 이사를 가 찾은 직업이 바로 강제수용소의 경비원이다. 소위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택한 직업이다.

시대가 만든 행동일지라도

 이근안씨가 7년의 형기를 마치고 경기도 여주교도소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고 있다.(왼쪽)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회고록 출판기념회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방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오른쪽)

이근안씨가 7년의 형기를 마치고 경기도 여주교도소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고 있다.(왼쪽)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회고록 출판기념회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방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오른쪽) ⓒ <연합뉴스> 신영근, <오마이뉴스> 권우성


전범 재판정에 선 그녀에게 '유대인을 죽인 가해자'란 죄목이 찍히는 것은 당연한 일. 전범의 대표자가 되어 법정의 온갖 삿대질을 한 몸에 받는다. 왜 그녀에게만 화살을 쏘아댈까. 다른 경비원들은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그녀에게 모든 걸 덤터기 씌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그녀만 '죽일 놈의  가해자'가 된다.

글자를 모르는 그녀에게 모든 서류의 작성자라는 누명이 씌워지는데, 그녀는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듯…. 그녀는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라고 재판장에게 말한다. 다른 가해자들이 다 쏙쏙 빠져나간 현장에서 그녀의 말은 공허 자체다. 우리 역사 속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도 많은 가해자들 중 재수 없는(?) 한 명일 수 있다.

몸통은 두고 꼬리만 자른다는 말도 있다. 머리는 두고 곁가지들만 친다는 말도 있다. <더 리더>는 그런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도 왜 그런 예가 없겠는가. 하지만 이미 그가 몸통인데 자신은 꼬리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한나, 그녀의 행동에 주시해야 한다. 책에서 베른하르트 슐링크에 의해 던져진 말,

나의 생각과 결정이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행동은 그에 앞서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것을 단순히 그대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행동에는 나름대로의 원천이 있으며,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은 나의 결정이듯이 나의 행동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인 것이다.(<더 리더> 23쪽)

그것이 그녀의 독자적인 행동이었다. 무기징역형에 처해지면서도 다른 경비원들을 원망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나도 피해자일 뿐이다'는 그 흔해빠진 말 한마디조차 안 한다. 여기 가해자의 아픔이 있다. 나치독일의 국민이므로, 나치강제수용소의 경비원이므로, 그녀가 가져야 할 규칙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기를 포기한다.

내게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그 폭동(당시는 그렇게 말했다)을 잠재우기 위해 진압군으로 참여했던 친구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는 그 시대에 군대란 곳에 가 있었다. 한나가 나치독일 시대에 수용소의 경비원으로 가 있었듯이. 이경남이란 이 친구는 이미 여러 차례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하며 '지옥 같은 시대의 아픔'을 고해성사했다. 한나 역시 삶을 송두리째 감옥과 죽음에 내던지며 자신을 참회한다.

가해자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더 리더>는 법대 교수인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작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2차 대전 이후(1950-60년대)를 배경으로 36세 여인 한나 슈미츠와 15세 소년 미하일(마이클)의 뜨거운 사랑을 담아낸 소설이다.

<더 리더>는 법대 교수인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작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2차 대전 이후(1950-60년대)를 배경으로 36세 여인 한나 슈미츠와 15세 소년 미하일(마이클)의 뜨거운 사랑을 담아낸 소설이다. ⓒ Mirage Enterprises


이런 때 우리는 그 참회를 보며, 더욱 헷갈린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그렇다. <더 리더>는 그 모호함 속에서 문제의식을 본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그랬다고 말하길 원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 짓기 원한다. 그러나 역사는 애석하게도 그것을 시원스럽게 답하지 않는다.

'누가 진압명령을 내렸는가?' 이게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의 문제의 핵심이었다. 여전히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전직대통령 대우를 받으며 살아있고, 누구 하나 확실하게 명령의 최고통수권자를 말하지 않는다. 메달을 목에 걸었던 지휘계통의 군인들도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며 한나처럼 자신이 짊어지겠다고 하는 이가 없다.

그냥 자신이 짊어질 것을 자신이 짊어지기만 하면 된다. 광주 사건 뿐 아니라 작금에 벌어지는 모든 '리스트'에 관련된 이들도 그렇다. 다 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는 결코 한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의 아픈 역사가 뱉어놓은 피해자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죄의식이란 무엇인가. 그 죄의식 속에 감춰진 비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는가. 추악함으로 맞닥뜨리는 소위 '피해자(희생양)'라고 말하는 가해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한나를 보며 우리 시대를 훑고 간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고비마다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가해자들이 스쳐지나간다. 그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제5공화국 때 박종철씨 고문사건을 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할 때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런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다. 이 나라에서는 '한나'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걸까?

덧붙이는 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스티븐 달드리 감독/ 케이트 윈슬렛, 레이프 파인즈 주연/ Mirage Enterprises 제작/ SK 텔레콤(주) 배포/ 상영시간 123분/ 2009년 3월 26일 개봉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스티븐 달드리 개봉영화 영화평 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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